예수님 비유의 진의

씨 뿌리는 자: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옥토와 제외된 길가, 돌짝, 가시밭

오직 은혜 2019. 6. 21. 23:38
마태복음 13: 3-9 / 18-23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가에 뿌리운 자요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첫 번째로 시작되는 비유가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주님은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주시면서 만약 이 비유를 알아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분명 다른 비유들이 담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할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 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막4:13).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모든 비유는 예수그리스도 자신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의 진리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지금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담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분명 다른 비유들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먼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상태를 밭으로 묘사하고 구체적으로 네 종류로 분리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길가, 돌밭, 가시 떨기 밭, 좋은 밭이다. 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어있는 흙 자체이다. 가시와 엉겅퀴와 돌로 덮여있는 땅을 ‘밭’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농부의 수고가 있어야 하고,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농부가 밭에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좋은 씨를 뿌려줘야 한다.

 

만약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에게 “너 먼저 스스로 돌과 가시덤불을 다 치워버리고 옥토로 갈아엎어야 씨를 뿌려 줄게” 라고 말한다면 분명 미친 말로 취급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교인들에게 스스로 ‘돌과 가시덤불을 제하여 버리고 옥토로 가꾸어 열매를 맺으라. 라고 억지 선동을 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흔들면서 ‘너 빨리 일어나 일을 해라’ 라고 외치는 것과 똑 같은 부질없는 미친 짓이다. 

 

그럼에도 교인들은 설교자의 미친 선동에 호응하여 미친듯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돌과 가시덤불을 제하여 옥토가 되겠다고 열심을 부리고 있는데 마치 죽은 송장이 살았다고 착각하고 설치고 다니는 존비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하여도 그러한 미친 설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흙 자체이다. 그런데 죽은 흙에서 무슨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열심과 업적이 나울수가 있겠는가! 죽은 송장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악취뿐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 (엡 2: 1-3) 라고 말씀하고 있고, 주님은 그렇게 죄로 죽은 자들이 부리는 열심과 행함을 썩은 송장에 비유하여 “훼칠한 무덤”, “마귀의 행사” 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열심과 선한 행위에 근거한 공로와 업적을 내어놓기를 원하셨다면,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를 밭을 가꾸는 농부로 묘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흙의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밭을 가꾸는 농부로 묘사하고 있고,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씨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원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어있는 흙, 땅 그 자체이며 가시와 엉겅퀴와 돌로 덥혀있는 상태이다. 그런 땅을 농부가 밭으로 정해놓고 돌과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뒤집어엎어서 밭으로 가꾸신 후 생명의 씨를 뿌려 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 씨 뿌리는 비유는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농부가 되셔서 죽어있는 우리를 옥토 밭으로 가꾸어 내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우리 안에 심어주셔서 가시와 엉겅퀴와 돌들이 그 강력한 생명의 씨에 의해 부셔지고 제거됨으로 죽어있던 흙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받아 찬국의 아들로 탄생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시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롬 3: 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죄인에게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럼에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 뿐이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즉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여 주셨기에 생명을 공급하여주는 뿌리에 의해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면 예수님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왜 인간을 밭으로 묘사하며, 그 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창세기 시작에서 이미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고 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흙에 자신의 생기를 넣어주심으로 흙이 살아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이라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특별한 밭을 친히 만 드셔서 첫 인간 아담에게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 2:7-8). 그 동산 안에는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불순물이 없는 완전한 ‘옥토’였기에 선악과 외의 모든 열매는 임의대로 마음껏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창 2:16).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순간 이내 흙으로 다시 되돌림을 받는 죽음이 선포되고,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를 내게 된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8).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9).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게 되는데 그 되돌림을 받은 땅 전체가 바로 ‘엉겅퀴와 가시’로 채워진 저주의 상태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주와 죽음으로 선포된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 (엡 2: 1-3) 라고 부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생명력을 떠난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왔기에 다시 한줌의 흙으로 되돌림을 받아 ‘없음’ 의 가치로 종결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동산 밭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또 다시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은 장차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를 모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천국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긴 역사동안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여 온 그 가나안 땅의 실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려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나안과 같은 어떤 정해진 장소를 가리키는 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여온 하늘나라이시며, 그 하늘의 천국이신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성취자이시며, 약속하신 그대로 현재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우리는 그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천국을 소유한 하늘나라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즉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시와 공간을 초월하여 곧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누리는 처소를 우리 안에서 짓고 계신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2). 즉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천국이 임하였다고 선포한 것이고, 예수님도 자신이 바로 천국임을 계시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영생으로 살려내어 영원히 함께 거하는 그 상태가 바로 영생을 사는 천국임을 미리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와 같이 성경 전체는 어떻게 죽은 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산 자가 되었으며, 죄로 죽은 흙의 존재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씨가 심겨져서 영원을 사는 천국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인간을 밭이라고 비유하신 것과 그 밭의 상태를 네 가지로 (길가, 돌짝, 가시떨기, 옥토) 표현 하신데는 무엇인가 교회와 성도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깊은 영적 메시지가 들어 있다.

 

 

첫 인간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연약한 실체가 드러나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죽음이 내려지고, 동시에 땅을 저주하심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하셨다. 그렇게 ‘가시와 엉겅퀴’로 저주받은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마음 상태가 바로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죄악의 상태임을 미리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창세전 이 세상 땅의 실체는 “어둠과 공허와 흑암”이었다 (창 1:2).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어둠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서 태어나 그 땅을 거처로 살게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어둠과 공허와 흑암’에서 태어난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고 깨닫게 하기위해 선악과를 주신 것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신이 바로 비천한 한줌의 흙의 존재이며, 가시와 엉겅퀴만 토해내는 죄인임을 깨달아가게 된다. 사도바울은 인간의 최악의 마음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롬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 도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세 종류로 분리하여 말씀하신 길가, 돌짝, 가시떨기의 죄인의 마음 상태이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아담의 죄로 ‘가시와 엉겅퀴’로 저주가 임한 땅이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7-18).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흙으로 다시 돌려보내시고, 그 흙인 땅이 이제부터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라고 선포하신다. 즉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저주받은 멸망의 땅으로 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먼저 이 땅에 ‘어둠과 공허와 흑암’을 두시고, 그 ‘어둠과 공허와 흑암’으로 하늘나라를 설명하여 주시는 천지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계신다.

히1:10-12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잠 2: 22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 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벧후 3:6-7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와 영광과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이며 진리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멸망하시기로 정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가시와 엉겅퀴’에서 태어난 인간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멸망으로 향하는 죄 일뿐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이다.

욥 14: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 51: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창 8: 21 이는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전 7: 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롬3: 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럼에도 저주받은 이 세상 땅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옥토 밭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친히 농부가 되셔서 당신 백성의 마음에 채워져 있는 돌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해 버리고 옥토로 가꾸어 내신다. 그리고 그 옥토 밭에 생명의 씨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심어주셔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주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흙은 오직 은혜의 덮음으로 전적으로 농부의 가꾸심으로 옥토 밭이 되어 예수 생명의 씨를 받아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은혜이며, 불가항력적 구원이며, 곧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담긴 복음의 진수이다.

더 확실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게 된 문맥상의 배경을 알아보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골육이냐?’ 라고 매몰찬 질문을 던지시고, 누가 진정 예수님의 진짜 가족이냐에 대한 대답을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다. 그리고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듣는 관중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이적을 쫓아온 큰 무리였다 (마13:2). 예수님은 자신의 기적을 보고 쫓아온 큰 무리를 향하여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교를 시작하셨지만 이 비유의 진의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다시 풀어서 해석하여 주시면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마13:11)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의 복음은 가시와 엉겅퀴와 돌짝들과 같은 그 큰 무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하게” (마13: 13)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으셨다는 것이다 (마13:10-15).

 

사 6:8-13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 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6: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씨’, 구원의 복음을 약속하시지만 아직 때가 아니기에 숨기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때는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토지가 전폐될 때 까지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옛것이 완전히 전페되어 없어지는 그곳에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모든 인간은 티끌의 존재이며 이 세상이 바로 황폐한 곧 멸망으로 치닫는 땅임이 들어날때까지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씨, 생명나무를 숨기신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자신을 못을 박을 그 때에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어 생명이 잉태되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렇게 인간은 황페한 티끌에 불관한 존재이며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임이 폭로됨으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옛 죄인의 멸망과 죽음으로 끌고가시겠다는 약속이다. 즉 옛 사람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만 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씨에 의해 하나님에게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는 복음을 이사야를 통하여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죄인이 저주의 죽음에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구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보탬이 될 수가 없는 오직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성취할 수 있는 구원이기에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의지와 공로와 업적을 배제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이 되고 구원과 영생이 입혀지는 것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의 씨가 뚫고 들어옴으로 멀고 막혔던 눈과 귀가 열리고 그분의 의로운 은혜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달게 됨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고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게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눈과 귀를 가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 백성 중에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생명의 말씀이 임하는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지만 그 나머지는 눈과 귀를 가리게 하여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거룩한 씨’(13절), 복음의 씨가 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 ‘거룩한 씨’가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가시와 엉겅퀴로 황페되고 전페된 이 세상 땅에 천국으로 내려오셔서 오직 당신이 택한 백성에게만 나타내어 보여주시고 소유하게 하신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쫓아온, 즉 육신의 떡을 먹으려 쫓아온 큰 무리에게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천국의 비밀은 가시와 엉겅퀴로 황페한 그 큰 무리에게는 감추시고, 오직 택함을 받은 12제자들에게만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알아들을수 있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즉 천국의 복음은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쫓아온 황페한 큰 무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택함을 받은 12제자들에게만 소유되는 복된 소식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비유로 감추시고, 오직 12 제자들에게만 이 비유가 담고 있는 참 진리를 풀이하여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기쁜 소식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천국으로 오셨음에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다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천지의 창조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진리와 생명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때문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피조물은 구원과 영생으로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며, 오직 당신이 택한 백성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시고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고 믿게 하시며 당신을 진심으로 소유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또는 육적인 노력과 혈통의 관계로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라 할지라도, 예를 들면 율법의 권위자로 자고한 바리새인과 세기 관들은 태어나면서 평생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영을 열어주지 아니하였기에 그들은 그 율법이 담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영생을 읽어내지 못하였고, 그 율법의 계명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걸림돌이 되어 버렸고, 그들에게는 심판의 근거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으로 오신 예수 생명의 씨가 ‘가시와 엉겅퀴’ 로 황페된 이 세상 땅에 심겨지거나 생명이 잉태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황페한 돌짝밭, 가시밭, 길가로 묘사하신 것이며 그들에게는 생명의 잉태가 허락되지 않았다고 비유로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쫓아다닌 그 큰 무리는 천국의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행하신 5병 2어의 기적을 육신의 떡으로 보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쫓아온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다. 오늘날 자신들의 유익과 자신들의 부족함을 기적과 이적으로 채우기 위해 벌떼처럼 교회에 모여드는 큰 무리를 상징한다. 아무리 큰 예배당에 큰 무리가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예수를 쫓는 황페한 무리이며, 처음부터 선택에서 제외된 돌짝밭이고 가시밭이고 길가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큰 대가를 지불하고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열심히 예수를 쫓아 나온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주심으로 주님을 쫓는 그 큰 무리들을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생명을 잉태치 못하는 돌짝과 가시와 길가로 표현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육신의 욕구를 충족하여 주는 물질적 예수, 즉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힘을 얻어 자기들의 유익을 챙기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온통 자신의 배만을 위한 그 사악함을 가시와 가라지 와 돌짝으로 도저히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밭이라는 형태만 가진 황페한 땅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만 당신이 뚫고 들어가 옥토로 만들어 주시고 자신의 생명의 씨를 마음에 심어 영생을 얻게 하시는 은혜를 입혀주신다는 복음을 제자들에게만 제시하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생명의 씨를 받아 천국의 백성으로 잉태되는 옥토가 바로 주님의 가족, 즉 어머니이며, 형제자매라는 새로운 영적 가족관계를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시 떨기와 돌 짝 밭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상태를 가르키고 있는가를 보면, 성경에서 이들은 항상 하나님의 저주의 상태에 놓여있는 자들임을 읽을 수 있다.

창3:17~18 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타락한 것은 아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땅을 저주 하시는데 그 저주의 산물이 바로 ‘가시덤불과 엉겅퀴’ 이다. 그리고 흙으로 만든 인간을 다시 저주 받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으로 되돌림을 받게 하신다. 이제 그 저주 받은 땅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끝임 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해 냄으로 결국 인간 자신들이 생산해낸 그 가시와 엉겅퀴에 숨이 막혀 멸망과 죽음으로 끝나게 됨을 창세기에서 미리 제시하여 주셨다. 타락한 인간이 저주받은 땅과 한 몸이 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저주와 죄악뿐이라는 것을 미리 제시하여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티끌’, ‘진토’, 거름더미’ (상 2:8) 로 묘사하신 것이고, 바울도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과 성공이라고 인간들이 열심으로 쌓아놓은 이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 (빌 3: 7-9) 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사 7: 23-25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렘 4: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 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삼하 23: 6-7 그러니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 살리리로다 하니라

이와 같이 구약에서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가시덤불과 찔레와 가시로 묘사하고, 거기에는 그 어떤 씨도 파종 하지 말라고 명하시며, 당장에 불살라 버리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찔레와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씨를 담을 수도 씨가 자랄 수도 더더욱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양의 옷을 입고 양을 노략질하는 이리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하라 (마7:15-17) 라고 경고 하시면서 어찌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6)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와 엉겅퀴’ 라고 부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을 돌짝밭, 길거리, 가시밭으로 묘사하고 그들이 아무리 열심을 부리면서 선지자 노릇, 의인행세를 한다고 할지라고 그들은 처음부터 포도와 무화과를 맺을 수 없는 가시나무이며 엉겅퀴라는 것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 돌짝과 길가는 그 자체가 밭이 아니기에 씨를 받아서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설사 그들에게 씨를 준다하여도 죽여 버리는 형국으로, 즉 햇볕에 타서 죽고, 빼앗기고, 질식해서 절대로 생명의 씨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의 씨를 죽여 버리는, 즉 생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형국까지 가더라는 은유의 말씀이다.

반면에 택함을 받은 밭이 옥토가 되는 것은 그 밭 자체에서 발생되는 일이 아니다. 이들도 다른 밭과 마찬가지로 돌짝, 길거리, 가시었다. 그런데 이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엡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기”(엡 1:5)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와 돌짝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제거되고 옥토로 화해가 된 것이다. 택함을 받은 일부에게 예수 생명의 씨가 심겨져 있었기에 그 한 알의 밀알이 희생함으로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집요하고 끈질긴 죄가 제거되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옥토로 화해된 것이다. 이 현실을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3~24). 땅이 먼저 옥토 밭이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열매를 맺는 옥토 밭으로 화해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자신을 한 알의 밀로 묘사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이 잉태되는 구원 성취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구원의 원리는 먼저 가시와 엉겅퀴와 돌들을 제거하여 밭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씨가 먼저 불가항력적 은혜로 뚫고 들어옴으로 내 옛 죄인이 죽는 형국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제거되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옥토로 회해 된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내 옛 사람 죄인이 함께 못을 박아 죽음으로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악들이 죽음으로 제거되고, 그리스도의 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됨을 말씀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취하여 주신 의로운 구원에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공로나 노력이나 선행이나 업적들이 단 0.1%도 전혀 기여가 안 된다는 말씀이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에 의해,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분이 내 안에 침노해 들어오셨기에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내 옛 죄인이 제거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분의 의로운 아들로 의로운 신부로 탄생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어머니, 육적 형제들을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들어 부정하심으로 혈통이나 업적이나 열심이나 도덕적 성취 등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 12:48-51).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가시덤불과 돌짝과 길가의 상태에 있는 이들이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으며 왜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지를 주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마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길가에 뿌리운 자: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밭에 뿌려져야 싹이 트는 씨가 밭이 아닌 길가에 잘못 뿌려졌기에 생명이 잉태되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길가는 자신을 나타내기를 좋아하며 자랑하기를 좋아하며 자신들의 명예와 유익만을 추구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를 끌어 자신들의 가치 상승과 이름 높이기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기에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때문에 생명의 씨가 그 속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알아볼 수도 또한 받아 들일수도 없게 되며, 결국은 악한 마귀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그들의 마음이 이미 악한 마귀에게 빼앗겨 마귀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영생의 주님을 알아 불수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길가 상태를 잘 표현해 주는 에피소드가 창세기에서 두 번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 24:38-39)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즉 육신의 즐거움과 세상 쾌락에 빠져 심판에 처해있는 멸망의 상태임에도 전혀 깨 닫지도 상관하지도 않는 스스로 구원을 배척하는 길가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에서도, 롯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제 곧 불 심판으로 타서 없어질 소돔에서 함께 떠나기를 사위들에게 권하였으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 19:14)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돔이 그들에게 주는 쾌락과 즐거움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말씀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구원과 생명의 진리를 들려주어도 멸망의 직전에 있음에도 이들은 절대로 깨 닫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들은 구원의 선택에서 제외된 갈가,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으로 의인이라 자칭하여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를 끌어 다른 이들보다 높아지는 월등으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길가에 서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길가에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 라고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율법 행위를 의롭다고 자랑하며 도전하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절대로 은혜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일 필요성을 깨닫을 수도 또한 영접할 수도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영광만을 챙기는 악한 마귀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마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신으로 모셔놓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여 하나님의 의를 자신들의 의로 갈취하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독사, 마귀의 자식, 회칠한 무덤, 지옥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하여 그들에게 먼저 구원과 천국의 말씀을 주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지키기 위해 천국으로 오신 예수생명의 씨를 죽여 버리는 형국까지 가더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이미 율법을 받은 백성으로 제사도 잘 지내고 있고, 율법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잘 지키고,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고하여 회개가 필요 없다고 자만하였고, 구원자가 필요 없이 자신들의 율법적 의를 쌓아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평생 쌓아놓은 의를 ‘훼칠한 무덤’으로 부정하시고, 그들의 율법적 행위를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행위로 매도하여 ‘너희는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정죄하심으로 그들의 모든 율법적 행위와 열심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시고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타나는 도덕과 윤리적 행위로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높아지기를 추구하는 그 모든 시도가 바로 자신을 자랑하여 사람들의 인기와 칭찬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는 외식하는 자들이며, 길가에 서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밭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이름을 나타낼 수 있는 길가를 좋아하고 선택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간증거리들이 홍수처럼 쏘다져 나오고 있지 않는가!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길가를 스스로 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돌 짝 밭:

돌짝밭은 전형적인 종교인을 말한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로서 예수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예수를 찾아오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기적으로 이 세상 물질적 복을 얻어먹기 위해 처음에는 예수를 쫓는 일에 도에 지나치게 열광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거나 환난과 핍박이 닥치면 곧 예수를 부인하고 떠나는 자들의 마음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돌짝밭 모습을 출애굽기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출 14:10~12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급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들은 자신들을 애급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을 따라 나섰다. 이미 애급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기적과 이적을 10번씩이나 보고 체험한 자들이며,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그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다. 그런데 애급 군대가 뒤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는 긴급한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해 대며 애급으로 다시 되 돌아가 하나님 대신 애급인, 즉 애급 신을 섬기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능력과 기적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고 이 세상 물질 복으로 채워져 있는 안일한 낙원을 마음에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애급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의 속내가 완전히 폭로된 사건이 바로 시내산 금송아지 축제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심히 만들어낸 신이 바로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던 세상 물질 복을 상징하는 애급 다산의 신 금송아지였다. 오직 자신들의 탐심과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따라 나선 이들의 추악한 속내가 시내 산에서 완전히 폭로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타산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숭배하는 번영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 신앙관을 가진 자들로 넘치게 차 있다.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은 자신보다 더 강한 능력과 힘을 가진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이 세상 물질적 복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5병2어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하늘의 떡을 먹여주신 것은 그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며, 장차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생을 설명하는 표적이었다. 그런데 그 기적으로 떡을 먹은 많은 군중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육신의 떡으로 생각하고 떡 달라고 주님을 쫓아올 때 주님은 그들을 이 비유에서 돌짝으로 묘사하여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시 떨기밭:

 

예수님은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마 13:22) 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일락, 곧 쾌락을 덧붙이고 있다(눅8:14). 즉 이생의 염려, 재물, 일락이란 이 세 가지 가시떨기가 생명의 씨가 싹트는 것을 막고 자라는 것을 막음으로 결국 죽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어 일상이 돈과 쾌락을 쫓는 욕망으로 잡혀 있다.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종교가 개입되면 이들은 곧 하나님을 자신들의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는 방패로 삼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도 믿고 세상 맘몬도 믿는, 즉 하나님 외에 자신의 유익에 해당되는 신이라면 그 신이 어떤 신이든 복주는 신이면 서슴없이 쫓고 섬기는 세상 재리에 잡혀 노예로 살게 되어 있다. 좀 더 많은 재물을 모아서 이 세상에서 쾌락을 즐기기 위한 욕심에 끌려 고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오직 자신의 행복과 유익만을 위해 사는 그 인생은 행복이 아니라, 염려와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으로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쾌락은 곧 바로 멸망과 지옥으로 직행하는 길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까지 제단에 두 신을 모시고 제사를 드렸던 모습을 볼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풍요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단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맘몬을 함께 섬긴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 즉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그렇게 두 신을 함께 섬기는 자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하늘나라 보다는 물질 복을 상징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 신에게 집착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과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딤전 6:7-10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하나님은 선택에서 제외된 가시떨기와 길가와 돌짝들을 절대로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멸망으로 정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 땅에 하나님은 일부를 택하여 옥토 밭으로 가꾸어 내신다. 하나님은 옥토 밭 주위에 길가 밭과 돌짝과 가시떨기의 상태를 남겨두심으로 그것들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를 계속 경험하게 해 주시는 그 이유를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다. 그래서 이 두 비유가 연결되어 있다. 주님은 택함을 받은 성도를 옥토 밭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주신다. 옥토 밭에 알곡만 자라고 있었는데 그 옥토 밭에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주인은 그 가라지를 뽑지 말고 알곡과 함께 자라게 놔두라고 명하신다 (마13:29). 가라지가 심겨져야 알곡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가라지를 알곡과 함께 자라게 놔 두심으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그들로 인해 훈련받고 성장하는데 에, 즉 성도의 거룩한 훈련에 필요한 소품으로 쓰시고 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가라지 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 가는데 도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가라지는 바로 우리 안에서 문득문득 발견되는 길 가의 모습이요, 돌짝밭의 모습이요, 가시떨기의 모습이다. 환난과 핍박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언제든지 흔들리기도 하고,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좋은 밭이 되어 남들에게 잘 보여 인정과 칭찬을 얻어내려고 허위적인 의를 쌓기도 한다. 우리가 바로 그런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만을 생산해내는 추악한 존재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였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해만을 의지하여 새 생명이 잉태되는 옥토의 성장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주님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알곡과 함께 놔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처음자리가 바로 가시와 엉겅퀴로 생명의 씨를 잉태할 수 없는 돌짝으로 굳어있는 땅이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들을 옥토라고 부르시고 그 옥토에 합당한 자로 가꾸어 가시는 공사를 반드시 완성해 내신다. 즉 그분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죽음으로 우리를 옥토로, 즉 당신이 거하는 처소로 만들어 내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매일 그분이 공급하여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 즉 진리의 말씀을 먹으면서 스스로 좋은 밭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며, 그런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시고 옥토로 가꾸어 가시는 그분의 열심에 점차 자신을 내려놓고 부인하게 되며, 완전히 하나님의 가꾸심과 인도에 순종을 하게 되며,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가꾸어 가시는 그분의 사랑에 항복하게 되며, 이제는 죽어도 살아도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살아감을 최고의 행복으로 감지하게 된다. 성도는 그렇게 점차적으로 사도바울의 고백으로 정착되어 가게 된다.

고전 15: 9-10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빌 1: 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 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옥토로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분이 은혜를 입혀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는 죄인의 괴수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이다” 라는 자기부인의 타이틀을 붙이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쓰임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가시와 엉겅퀴로 꽉 차 있는 저주로 죽어있는 흙 자체였다. 그분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끈 질게 도시리고 있었던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가 완전히 제거되고 새 생명이 잉태되는 옥토로 화해된 것이다. 

 

생명은 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심겨지는 씨에 있다.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셨기에 생명이 잉태되어 영원히 사는 그분의 자녀로 신부로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성도는 그냥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옥토 밭으로 만들어 생명을 잉태시키는 그분의 능력을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그분의 모든 인도에 순종하며 그분의 의로운 열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무상으로 임하게 되는 기쁜 소식임을 이 비유에서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