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비유의 진의

선한 사마리아인: 네가 바로 '율법'이라는 강도 만난 자이다

오직 은혜 2019. 6. 21. 20:57
 

누가복음 10:25-37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돼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을 잘 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는 선한 행위를 요구하는 도덕적인 교훈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바로 강도 만난 죽어가는 자이며 너에게는 반드시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죄인의 행함은 오직 자신의 부와 명예와 의를 쌓기 위한 ‘자아’에서 나오는 탐심뿐이다. 죄인의 행함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늘의 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행위로는 영생에 이를 수가 없도록 모든 인간을 죄 아래 불순종으로 가두어 두심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2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2).

예수님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근원은 누구이시며, 어떻게 얻는지를 설명하여 주셨다. 주님은 청년에게 네가 열심히 지켜 행한 그 율법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는 그 율법이라는 강도를 만나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는 불가능한 자이며, 누군가가 와서 구해주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너의 실체라는 것을 폭로하신 것이다. 즉 네가 열심히 지키고 행하여 의를 쌓아서 영생을 얻는다고 굳게 믿어온 그 율법이 바로 너를 죽음으로 후려치는 ‘강도’ 이며, 너는 지금 그 ‘강도’를 만난 죽은 자와 방불한 존재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의 권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켜 그들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보면서도 구하지 못하고, 피하여 지나가는 자로 묘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숨으로 지키고 행한 그 율법에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능도 역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는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된 자에게 선물로 입혀지는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줄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또한 그러한 능력도 없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즉 강도 만난 자와 방불한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이다. 그래서 제사와 율법의 권위를 가진 제사장도 율법사도 그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도울 수도 살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강도 만난 자와 다름없이 율법에 의해 죽어있는 자들이기에 죽어가는 자를 눈앞에 보면서도 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도 바로 강도 만나 곧 죽게 됨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즉 그들이 목숨으로 지켜온 그 율법이 바로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강도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바로 죄로 죽어있는 자임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임을 믿고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라는 역할로 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 (롬 8:2)이라고 선언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이 비유에서 주님은 유대인의 원수로 경멸과 천대로 ‘개’로 취급받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는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배척하고 멸시하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이 죄인에게 임하게 되는 복음을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와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 구원과 생명은 율법 지킴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 나의 모든 것이 세상 강도에게 다 빼앗기고 털리고 맞아서 죽어가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죽음으로 내려가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될 때 임하게 된다는 은유적 말씀이다. 즉 인간의 모든 힘과 노력과 의지가 박탈당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죽음에 처해 있을 때, 주님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살려내신다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구원을 설명하시고 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악에 차 있는 강도 굴에 친히 뚫고 들어오셔서 그렇게 죽어있는 우리를 살려내시고 다시 우리를 데리려 오신다고 약속하시는 참 복음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 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2:1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그러므로 구원과 영생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노력을 철저히 배제한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자에게 임하게 되는 선물이다. 

 

모든 것이다 털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거지 나사로와 같이 또한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그 상태에서 자신이 죽었음을 인식하고 오직 구원자만을 기다리는 그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존재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의 존재로 살려 내신다. 인간의 그 어떤 것도 기여할 수 없는 오직 우리 주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이 강도 굴에서 끄집어내어 주심으로 그분의 의로운 행함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는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