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비유의 진의

빚진 자 와 '용서' 의 참 뜻

오직 은혜 2019. 6. 21. 09:48
마태복음 18: 23-35

18:21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는 베드로의 ‘용서’에 관한 질문에 ‘용서’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주신 답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주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7번을 70번 하라는 7의 완전 수자를 주심으로 용서는 수자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용서도 아니며, 그 ‘용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구원에 관한 용서임을 이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죄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모든 죄가 탕감되는 구원에 관한 용서임을 임금이 빚진 자의 빚을 몽땅 탕감하여 주시는 비유로 설명하시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러한 구원의 용서가 나올 수 없음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개입시켜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완전한 용서와 구원과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자신이심을 주인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의 용서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어 낙타와 같은 자신의 어마한 죄는 삼키고, 다른 이의 티끌 같은 죄는 용서치 않고 정죄와 폭력을 휘두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 묘사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그 빚을 탕감하여 주시는 주인이 등장하고,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개입시켜 죄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동시에 율법주의 대표인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을 폭로하시고 있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죄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그 긍휼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은혜를 악으로 갚는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이다. 그분은 모든 관계에 개입하시며 행위대로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이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길이 없는 너무 어마한 수자이기에 그 빚으로 평생 감옥에서 죄인으로 자유의 삶을 박탈당한 살 가망이 없는 죽은 자와 방불한 자이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혜가 그에게 입혀진 것이다. 임금이 아무 조건 없이 그 어마한 빚을 몽땅 탕감하여 주심으로 감옥의 죽음에서 풀려나 자유와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인은 생명의 은인이며 구원자였다. 그렇게 주인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그가 자기에게 아주 적은 빚 백 데나리온을 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감옥에 처넣은 것이다. 그는 자유와 살 소망을 박탈당하고 평생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 그 죽음의 시궁창에서 건지심을 받은 은혜를 전혀 깨 닫지도 마음에 두지도 않았기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이에게 흘러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되는 일은 참지 못하였고, 아주 적은 빚이라도 받아내겠다는 욕심으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잡고 감옥에 처넣은 것이다.

임금은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하여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참여하셔서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에, 자신의 욕심과 탐심으로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치 않고 폭력을 휘드리는 그를 두 번 용서 없이 다시 죽음의 감옥에 처넣는 심판을 내린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율법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율법주의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죄와 죽음에 처해있는 자신들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였고, 그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실 메시아가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적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들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워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폭력을 휘드리는 악행을 감행하고 있음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개입시켜 폭로하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지 않으면 죄와 사망에 처한 자신의 실체를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으며,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되는 성령님의 인도와 말씀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받은 은혜를 그대로 자기 형제들에게 흘러주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있음을 성도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우편의 양들만이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라고 자신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부정한 것이다. 이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늘의 의를 거저 받은 자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자기 형제 이웃을 율법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되며, 이웃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증인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