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세상을 향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죽음
사람이 주리고 목마르면 당연히 죽게 된다. 그럼에도 주님은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시고 ‘배부름’ 이라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설로 천국을 설명하신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씀은, 육이 먹어야 사는 양식과 육이 마셔야 사는 물이 끊어진 죽음의 상태를 말하며, 그렇게 굶어서 목말라 죽어가는 자는 살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물과 먹이를 찾아 헤매게 되며, 절대로 중도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는 말씀을 던지고 있다. 즉 굶어서 목말라서 죽어가는 사람이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는 그 절박한 갈증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구원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세상이 주는 양식을 점차적으로 끊게 됨으로 굶주리게 되고 목말라 죽게 되는 십자가 자기죽음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세상양식을 끊게 됨으로 굶어서 죽고 목말라 죽게 되지만, 그 죽음은 성도에게는 살기위한 귀한 죽음이며, 그 비워진 마음에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 즉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져 진짜 ‘배부른 자’로 영생을 살게 됨으로 그자가 복된 자라는 말씀이다. 똑같은 원리로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너희가 죽으면 살리라
요 12:24~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마 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태까지 자신의 탐심과 유익만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것들로 배부르게 살던 내 옛 사람은 반드시 세상 탐심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혀 죽는(갈 2:20) 죽음을 통과하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죄와 마귀의 종으로 살던 내 옛 사람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내 영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진리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매일 진리의 양식을 구하고 먹으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끄집어내시고 광야로 인도하셨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곳이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처지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망의 음침한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황폐한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세상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옛 사람 애급인은 죽게 하시고,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만 먹고 태어난 새 사람만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주신 것이다. 세상 양식을 완전히 끊으심으로 세상 사람으로 살던 육신이 굶주려 죽고, 오직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먹이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는 새 생명의 잉태를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들이 광야에서 육신이 죽는 금식을 해야 하는지를 친히 말씀하여 주셨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 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도에게 오직 당신의 의만을 필사적으로 구하고 갈망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는 구원을 이루시며, 세상과 격리시키는 광야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는 세상의 것으로 배를 채워 멸망으로 달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광야의 삶에서 이태까지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가 기각되고 부서지고, 깨지고, 빠져나가는 자기 부인의 가난으로 끌어내리시며, 죄에 대한 자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의만을 필사적으로 구하는 애통하는 자로 만드시며, 하나님의 뜻과 인도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온유한 자로 서게 하시며, 이제 굶주리고 목마른 사슴같이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받아먹는 진정한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내신다.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105,107)라고 생명이 바로 말씀에 있음을 정확하게 알고 말씀으로 살려달라고 간구하였다. 선지자 아모스는 인간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이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요 7:37).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진정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갈증을 주시며, 그것이 복이라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늘나라의 복을 받은 성도는 가난함과 애통함과 주리고 목마름에서 벗어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세상을 위해 살던 내 옛 사람이 죽게 되는 죽음을 먼저 통과하게 됨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세상을 향한 육신의 욕망과 탐심 같은 내 자아가 굶어죽는 십자가 죽음을 먼저 겪어 내야만이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할 수 있으며,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먹게 되며,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5:38)는 뜻이다. 즉 성도는 이 세상 광야의 일생에서 금식으로 세상을 위해 살던 육이 죽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그리스도의 참 신부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더는 이 세상의 것을 양식으로 먹지 않게 됨으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게 되며, 진리의 말씀을 존재양식으로 먹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하늘나라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의와 말씀에 갈급하는 자로,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선자로, 영원히 변치 않는 확고한 믿음의 자녀로 당신의 나라에 들여보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먼저 다 털리는 가난으로 이끌어 가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갈망하는 애통함을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하는 온유한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생명의 말씀만을 먹게 하신다. 즉 세상을 향하여서는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하여(롬 6:11), 하나로 연합을 이루는 아들로, 신부로 만들어 가신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함과 같이 그리스도로 채워진 자가 바로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게 되는 진짜 배부름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바울의 진술과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되고 성취되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거저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리킨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9).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자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라” (롬 3:25-26).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십자가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죄인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른’(롬 5:18)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게 된다. 주님이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먼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아내셔서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주셨기에 그분 안에 있는 성도의 삶도 매일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내라” (사 43:7-8).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이 역사는 절대로 인간이 왕이 되어 세상을 군립 하는 인간 주체의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너희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즉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러내며 찬양하는 자로 처음부터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의 티끌로 ‘없음’의 존재로 만드시고, 다시 티끌로 되돌림을 받는 ‘죽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의 토대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정해 놓으시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죄를 알게 하는 선악과를 첫 인간에게 먹게 하심으로 티끌에서 만들어진 모든 인간은 바로 이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당신의 ‘의’ 와 나라를 설명하는 교제로 쓰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의 티끌로 ‘없음’의 존재로 죽음을 정해 놓으시고, 죄 아래에 가두어 두심은, 이 역사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의와 영광만이 영존하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심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러나)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오직 ‘주 만이 영존할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멸망할 것으로 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의’ 와 그분의 나라의 영존함을 드러내가 위하여, 영원한 진리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나타내기 위하여 소품으로 쓰는 모형과 허상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영존할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곧 낡아져서 멸망할 것이며 오직 주 만이 영존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히 1:10-12). 그러므로 만물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안에서만 영원한 것이며, 예수를 떠나서는 멸망과 지옥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영성으로 깨닫고 말씀하시기를,
골 1: 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늘나라의 영원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를 설명하시기 위해 세상이라는 물질적 창조가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존재함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적 존재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곧 멸망과 죽음임을 성경은 반복하여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즉 예수 없는 자는 죽은 흙이며, 아무리 살았다고 하여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멸망의 존재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 그리하여 요한은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에 오직 그분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3-4).
성도는 이 가시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배우고 깨닫고 믿고 소유하는 자로 이끌려가게 된다. 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그분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우리의 아버지와 신랑이 되시며, 우리에게 향한 그분의 참 뜻이 무엇이며, 어떠한 삶을 지향하게 되는가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의에 주리는 목마름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 자체가 진리이며, 생명력이며, 영존이며, 복의 근원이시기에 성도는 그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갈증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며, 그렇게 찾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됨을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눅 11:9-12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3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의
하나님은 오직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십자가 구원의 의만 받으신다. 그 의는,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보탬이 없는 창세전 하나님이 뜻하신 계획이며, 오직 의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룰 수 있는 의이기에 그분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구원의 의를 성취하셨다. 그리고 그 성취하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기 위해 그분은 성령으로 친히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켜 의인이라고 인처 주신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는 희생으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닫혀있던 지성소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롬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 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만을 요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 받았기에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채워주신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과 생명을 얻은 자들이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자랑하며 나타내며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는 나만을 위해 살던 그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이며,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의존하여 살아가는하늘의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 배부른 자를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의의 앞에서 인간의 의는 더러운 걸레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와 명예를 쌓는데 열혈되어 있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항복하거나 구하거나 목말라하는 일이 없으며, 도리어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거역한다고 바울은 인간의 죄악 된 본질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롬 10:3). 자신의 의를 세우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는 불순종을 택하게 되어 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오직 열린 무덤과 같은 존재이기에 절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늘의 의가 나올 수가 없다.
롬 3: 10-18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 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패역함을 들여다보고 죄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지를 깨달으라고,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렇게 패역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으라고 선하고 의로운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열심히 지키고 행하여 자신들의 가치와 자존감을 세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의로운 자로 힘써 세우더라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분명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그 죄와 사망의 율법을 지켜 행하여 자신들의 죄 된 의를 세우는데 목숨을 걸어 결국은 죄와 사망을 자초하더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가 된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걸레이며, 먼지이며, 초개이며, 훼칠한 무덤이며, 배설물’임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성경말씀은 인간이 얼마나 패역하며 죄악 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동시에 그러한 패역 속에서 당신이 택한 백성만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반대로 자신들의 의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윤리와 도덕으로 가르치는 강령으로 악용하는 망령된 짓을 하더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 15:3, 7-9). 이와 같이 인간은 오직 자신들의 거짓된 의와 가치를 높여 사람들의 칭찬과 숭배를 얻어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으로 삼아 가르치며’ 열심히 공로와 업적들을 쌓는 일에 열혈 되어 있다. 주님은 이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더럽고 추악한 의를 세워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망령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회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걸레 같은 의를 철저히 깨고 부셔서 죽이시고, 그 자리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채워주신다. 진리의 말씀이 좌우에 낱선 예리한 검으로 내 마음에 파고 들어와 나라는 ‘자아’를 쪼개고 도려내기에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며 자기죽음으로 정착된다. 선지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을 때려 부수는 방망이요 인간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녹여서 태워버리는 불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신약에서는 그 어떤 검보다 예리한 칼로 우리의 생각 골수 관절 뼈까지 찔러 쪼개는 해부로 죽이는 역할로 말씀하고 있다.
렘 23: 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타락한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찔레와 가시덤불로 저주받은 이 땅에 속한 것들이기에, 인간이 만들어내어 ‘의’라고 자칭하는 행위들을 더러운 걸레, 거름더미, 배설물이라고 성경은 부르고 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이사야 64:6). 인간은 죄가 더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의롭다고 내어놓는 행위의 의가 바로 죄에서 발산하는 더 악하고 더럽고 가증한 것들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위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다고 열심이 옷을 엮어 입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니라 그 수치를 가리겠다고 입은 그 옷이 오히려 더 가증스러운 수치이며 죄로 얼룩진 더러운 걸레조각들이다. 인간의 수치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만 가려진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고 스스로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서 둘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더러운 옷을 벗겨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상징하는 양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가치를 매기는 ‘의’를 정해놓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정의롭게, 선하게, 경건하게, 절제와 구제로 사는 것을 ‘의’ 라고 판단하고, 열심히 자아를 건설하고 확장하고 실현하는 거짓 의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은 의롭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쌓아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사람들의 숭배를 얻어내려는 가장 교활한 거짓된 의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렇게 의롭다고 자칭하고 열심에 특심으로 의를 쌓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너희가 행하는 의는 ‘마귀의 행사이며’ ‘너희는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이며, ‘훼칠한 무덤’이라고 진노하신 것이다.
인간이 인정하는 선한 일, 착한 일, 경건의 삶, 의로운 행위 같은 것들은 티끌이라는 ‘없음’ 의 존재에 가치를 매기는 헛되고 가증한 일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은혜에 도전하는 악한 행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없음’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위해 이 땅의 티끌로 만드시고, 무가치로 정하셨다. 그리고 그 없음의 티끌, 무가치한 인간이 어떻게 ‘있음’ 의 존재가 되며 가치가 있는 생명의 존재가 되는지를 하나님의 독립적인 사역으로 새 창조를 일으키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창세전에 정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증명하시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행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의 의와 선한 법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함이었으며, 그럼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가 필수적임을 계시하시기 위한 의도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면서 죄인으로 사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해 놓으셨다는 계시이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음에도 그 율법으로 선을 행하여 의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선은 죄인이 꾸며낸 거짓 선이며, 위선이요, 가식이며, 훼칠한 무덤이며,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하다고 하시며 반드시 멸하신다.
마 23: 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은 죄인이라 정죄 받는 세리와 창녀를 향하여 ‘화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제사와 율법 지킴에 목숨을 거는 그들의 거짓된 의에 대하여 노하신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한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눅 18:11-12) 그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심판을 선언하신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의롭고 경건한 모양으로 위장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교만과 탐심과 위선과 거짓 등 끊을 수 없는 죄의 본질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 사도바울이 폭로하기를,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3∼17).
이들이 바로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은 자신들의 의에 배부르고 만족한 부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말씀하심으로 이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쌓아놓은 패역한 거짓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자신들이 쌓아놓은 의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 영생을 구하는 청년을 ‘부자’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그가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열심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고하는 자신의 의로 꽉 차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의가 전혀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세워 영광을 챙기는데 굶주리고 목마른 자였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거짓된 의를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려는 율법주의자, 인본주의자들의 모형인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돈을 좋아하는 자,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찍어서 말씀하셨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의지로 율법을 지켜 행하여 ‘의인’이라는 가치와 명예와 이름을 높여 사람들의 숭배와 칭찬을 얻어내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눅 16:14)라고 부르시고,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 이와 같은 자신의 의에 배부른 ‘부자’의 결국과 ‘하나님의 의’에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복이 어떤 것인가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눅 18:9-14) 설명하여 주신다. 당시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지킴과 제사와 경건한 삶과 선행으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으로 믿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그들의 인식과 관념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엎어서 그들이 율법적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영원한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부자’로 비유하신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의로운 일 하나 행한 것없이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거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복 받은 자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있더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옥 불에 떨어진 부자로 표현하심으로 자신들만이 의로운 선민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그 자존심을 철저히 부정하시고 부숴버린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늘이고, 십일조를 꼬박 내고, 구제에 힘을 썼으며,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고, 도덕과 윤리적으로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우월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 지킴과 경건한 삶과 청빈한 삶으로 자신들은 돈을 좋아하는 세상 부자와 죄인으로 정죄 받는 세리와 창녀들과 완전히 구별된 청결한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기를,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자신을 의인으로 칭하고 다른 이는 죄인이라 정죄하고 멸시하였다. 하지만 주님은 ‘너희들이 바로 돈을 좋아하는 부자’(눅 16:14)이며, 너희가 가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이 비유를 들어 지적하신 것이다. 즉 그렇게 구별된 청결한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열심히 행한 율법 지킴이 바로 돈을 좋아하는 부자의 행실이며,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행사이며, 그 결국이 바로 지옥에 가 있는 ‘부자’임을 이 비유에서 확실히 밝혀주고 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부르면서 아브라함이 원하는 것은 행치 않는다고 주님은 그들의 거짓된 외식을 지적하신다. 주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도리어 진리인 나를 죽이려고 하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부정하신다(요 8:39-40). 아브라함의 행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 아버지가 된 것인데 너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지 않고 도리어 마귀가 원하는 욕심을 따라 자기들의 의와 가치를 세우는 자아 확장으로 하나님처럼 군립하려는 탐심으로 마귀의 행사를 하고 있으니 너희 아비는 마귀이며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요 8:44). 주님은 지금 이 지옥 간 ‘부자’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비유하시고 있다.
반대로 그의 대척점에 선 거지 나사로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아무것도 내 놓을 것 없는 빈털터리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럽고 추한 사람구실도 못 하는, 또한 그는 부자처럼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없는 거지 그 자체임에도 주님은 그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음으로 진정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인정한 것이다. 나사로를 한끼 밥도 자신의 능력으로 챙겨 먹지 못하는 거지로, 온몸에 종기가 나서 움직일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무소유의 거지로 묘사한 것은, 그가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비워진 마음으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살아냈다는 의미이다. 그 삶이 장차 제자들과 성도들이 살아가게 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등장한 나사로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산 자로 천국의 백성이 됨으로 구원과 영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긍휼임을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거지 나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바로 택함을 받은 자로 그 마음에는 예수라는 보화가 숨겨져 있었기에 은혜를 입어 천국에 이끌어 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며, 편애임을 은유하고 있다. 거지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도 또한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한 가지 다른 것은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들로 세상에 숨겨져 살았고, 하루하루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다 털리고 비워진 삶을 살다가 때가 차매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나사로, ‘하나님의 돋우심’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심으로 나사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돋우심으로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이름 하나로 설명해 주시고 있다. 즉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이 세상의 것을 소유로 가질 수 없는 거지와 방불한 빈털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며, 그 털린 가난하고 애통하며 굶주린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하늘나라의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지향성을 그림으로 제시하여 주시고 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나사로라는 거지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도우신다’ 는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로 등장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시는 나사로의 삶은 모든 인간이 소원하는 호화로운 만사형통의 삶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삶이라면 적어도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은 아니기를 바라며, 그 누구도 그렇게 가난으로 버려진 거지의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삶은, 시편 73편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아픈 고통이 없는 마음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삶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시는 나사로의 삶은 머리 둘 잠자리도 소유하지 못한 거지로 끼니도 누군가가 주어야 먹고 주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사는 자였다. 그 거지의 삶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러한 비참한 삶을 원치 않는다. 나사로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한 억지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의 조롱거리와 비방거리와 버려진 비참한 인생이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온 몸이 곪아 터져서 개가 그 헌데를 핥아도 쫓을 힘조차 없는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는 저주스러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거지 생활을 개선하여 주거나 그의 헌데를 치유하여 주거나 거지에서 벗어나는 도움을 주지 않으시고 끝까지 거지로 방치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돋우심을 받는 나사로를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몽땅 털리는 거지로 개보다도 못한 고통스러운 비참한 삶을 사는 자로 묘사하신 것은, 바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추구하게 되고 지향하게 되는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치가 송두리째 뽑혀지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사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거지의 삶으로 완전히 털리는 빈 그릇의 상태로 이끌어가게 되며, 그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배부를 것이며, 긍휼을 받을 것이며, 천국이 저회들의 것임이라고 (마 5:3-9) 산상수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국의 아들이 된 성도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으로 나타나는지를 주님은 거지 나사로를 투입하여 그림처럼 확실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반대로 이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부자는 매일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잔치로 사람들의 인기와 높임을 받는 유명한 자로 명성을 날리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지닌 세상을 즐기는 삶을 살고 있는 자로 묘사하셨다 (마 16:19). 시편 73편의 묘사처럼 이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 형통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추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의 삶을 정확하게 시편 73편에서 묘사한 악인의 만사형통으로 잘못 인식하고 악인의 형통한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내용이 바로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없고 재앙이 없고”,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고”, “소득이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이와 같은 모두가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자신의 유익과 안일만을 구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영화와 만사형통과 이름을 높이는 썩어짐의 우상들이라는 것이다. 온통 나를 이 세상 부자로 악인의 만사형통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 사항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이 열심히 구하는 내용으로 금식 기도, 새벽 기도, 철야기도, 작정 기도,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와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자신들의 탐심한 배를 채우기에 목숨을 걸고 종교행위를 벌이고 있더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자아’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오직 자신에게만 집요하게 집착하는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이 세상의 것으로 배를 채울 수가 없다.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생명의 말씀만을 먹고 사는 자들이기에 이 세상에서 비쳐지는 삶은 당연히 거지 나사로와 같은 나그네의 삶이다. 즉 세상에 향하여서는 다 털리고 비워지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으로 밀려 내려가게 된다. 거지는 누군가가 빵 부스러기라도 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의 자리로 밀려가서 오직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삶은 바로 거지 나사로와 같이 이 세상에서 무소유로 그 비워진 마음에 오직 하나님의 의를 담아 영생으로 살게 되는, 진짜 하늘나라의 양식으로 배부른 복된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말하기를,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임’의 내용이다. 즉 ‘너는 세상 속에서 너 자신의 의로 배불리 먹었지만 네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음으로 지옥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나사로는 세상 속에서 무소유로 하나님의 의에 굶주리고 목 말랐기에 이제 그는 내 품에서 배부름과 쉼을 얻게 되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앙생활에서 날마다 말씀의 해부로 점점 더 굶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나중에는 나는 정말 구제불능한 자이며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 놓을 수 없는 완전한 죄인으로 “죄인중의 괴수이다”를 고백하는 자로 자신을 부인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말년에 로마서를 쓰면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 좀 건져다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7:24-25, 8:1) 라는 마음의 신음을 토해 내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진정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애통한 부르짖음이며, 그 자리에 진정 하나님의 의가 부어지고 채워짐으로 하나님의 의로 배부른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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