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에게만 약속된 위로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산상수훈에서 천국의 복을 받은 자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며, 그 심령의 가난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애통함이며,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고 말씀하신다.
심령의 가난함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며, 그 자아인식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애통이다. 자신이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이었으며, 또한 죄로 인하여 한없이 부패한 존재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심령의 가난과 애통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는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로 내려가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며,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천국으로 들림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처음 자리, 즉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살아있는 ‘있음’의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없음’의 티끌로 만드시고, ‘흙’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름을 ’아담’이라고 붙여주셨는데 그 뜻이 바로 ‘흙’ ‘사람’이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실체는 흙이며,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곧 ‘죽은 존재’임을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다. 인간은 본래 죽은 흙이며,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져야 비로소 ‘있음’의 존재로 살아나게 됨을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없음’의 상태, ‘죽어있는’ 상태에만 부어진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천지창조 전에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와, 질서가 없는 ‘혼돈’과, 빛의 생명이 없는 ‘흑암’의 상태로 먼저 등장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 혼돈에서 질서로, 죽음에서 생명이 발생함을 창세기 첫 서도에서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없음’의 존재,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던 이 땅의 죽은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있음’의 가치를 논하며 챙길 수가 있단 말인가. 죽은 흙이 무슨 의가 있으며, 무슨 선이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창조와 구원 사역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열심을 부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서 드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흙이라는 질그릇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영광만을 드러내는 그릇의 역할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인간은 ‘없음’ 과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이 ‘있음’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영원하심을 드러내는 질그릇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티끌 됨의 자각이며, 그 자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밀려 내려가게 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없음’의 존재로 규정하셨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선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없음’의 티끌로 만드셨고, 선악과를 먹게 하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놓여있게 하셨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죽은 티끌로 만드시고, 인간 자신의 실체가 바로 티끌의 ‘없음’이며, ‘공허 와 혼돈과 흑암’에 놓여있는 상태임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기 위해 ‘선악과’를 주시고, 사단을 이용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셨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이 땅에서 태어난 티끌의 정체가 바로 ‘죄’이며, 자신의 처음 자리가 바로 ‘어둠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인 이 땅의 존재이며, 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이 살수 있는 ‘있음’이 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을 굳이 불면 없어지는 죽은 티끌로 만드시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바로 ‘없음’이라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고 인식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는 오직 ‘없음’에 부어짐으로 ‘있음’의 존재로 살아나게 됨을 일관성있게 구체적으로 점진적으로 상세하게 반복하여 설명하여 주신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그 첫 번째 계시가 바로 아담의 첫 후손으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이내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게 되고, 이내 자신들의 수치를 들여다보게 됨으로 자신들의 힘으로 그 수치를 가려보려는 헛된 수고와 저주의 고통이 시작된다. 그리고 아직 후손이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두 종류로, 즉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으로 분리부터 하신다. 아직 후손이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 과 이 세상 땅에 속한 ‘마귀의 후손’을 철저히 분리시키시고, 이제부터의 역사는 이 두 부류로 구별되며,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만 ‘없음’의 티끌에서 ‘있음’의 아들로 당신의 나라로 끌어올리시는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포대로, 하와에게서 첫 후손이 태어나는데 바로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 아벨과 이 세상 땅에 속한 마귀의 후손 가인이다. 하와는 첫 아들 가인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의 뜻은 ‘소유, 회득, 있음’이다. 하와는 가인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은 아들로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줄 자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의지와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가인을 사단의 후손으로 정하셨고, 이들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신다.
여자의 후손으로 택함을 받은 ‘아벨’은, 이름 그대로 ‘허무, 공허, 없음’ ‘아무것도 아닌 자’로 태어난다. 하나님의 은총은 ‘없음’으로 내려온 아벨에게 입혀지고, 그가 바로 여자의 후손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첫 후손의 탄생으로부터 인간의 생각과 원함과 노력을 배제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의 독립적인 주권으로 이끌고 가시며, ‘아무것도 아닌 자’, ‘없음’에 은혜를 부어주심을 확실히 밝혀주신 것이다. 즉 아벨은 하나님이 정하여진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께 받쳐진 제물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여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처음부터 하나님 구원사역에 악역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 죄악을 상징하는 마귀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태어났으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인은 이 땅에 속한 마귀의 후손이었기에 그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저주받은 이 땅의 소산, 즉 수고와 땀으로 거둔 육신의 배를 위한 소산물이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준비하여 놓으신 어린 양의 제물만 받으신다. 절대로 가시와 엉겅퀴로 저주받은 이 땅의 것들을, 즉 인간의 수고와 고생으로 드려지는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정하여 주셨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이 가시와 엉겅퀴와 방불한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열납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히 11:4).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벨이 ‘믿어서’ ‘믿음이 있어서’라는 뜻이 아니다. 아벨이 드린 ‘예물’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어린 양의 예물이었기에, ‘여자의 후손’으로 택함을 받은 아벨은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물을 드리도록 정해져 있었다. 때문에 아벨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번제할 어린 양’(창 22:8)을 드렸기 때문에 아벨이 드린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은 오직 어린 양의 제물만 받으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제물’,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그 예물에 의해’ 의인이라 칭하여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아벨과 같이 ‘없음’으로 나오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믿음으로 어린 양의 제물로 말이암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의 복음을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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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천국의 복을 받은 성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없음’에서 ‘있음’이 되어 영생으로 옮겨지는 복음을 창세기 서두에서 이미 계시하여 주셨다. 반면에 ‘있음’의 존재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이 땅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공허에 무엇인가를 채우며, 혼돈된 것을 세우려고 열심히 바벨탑 같은 것들을 쌓아서 자신들의 가치와 업적으로 하늘에 도달하겠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가시와 엉겅퀴로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천국의 복을 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뚫고 들어오셔서 가난한 심령으로 오직 어린 양의 피만을 구하는 애통으로 끌어내리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아벨과 같이 ‘없음’으로 태어나 ‘없음’으로 이 세상 마귀의 후손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로 끌고 가셔서 당신의 영으로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의 존재로 잉태시켜 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있음’의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없음’의 존재로 허무하게 세상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로 죽은 자 같으나, 그 자가 바로 천국의 복을 받아 영생을 사는 영원한 위로를 받는다는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아는 것과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기게 됨으로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완전히 장악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끌려가게 된다. 애통은 자신이 바로 죽은 흙으로 만들어진 ‘없음’의 존재이며,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고 그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심령이 끊어지는 극심한 슬픔의 호소이다. 죄와 사망의 절망에서 터져 나오는 애통은 바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단 한마디이다. 죽음에서 울부짖는 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단 하나이다. 바로 살려주는 생명이다.
예를 들면, 라헬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는데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함으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 (마 2:18)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식 잃은 어미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는 것은 오직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밖에 없다. 마태가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아이의 피살을 라헬이 죽은 아들을 위해 통곡하는 이야기와 연결시킨 것은, 예수가 바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려 오신 메시아 이심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즉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죄로 죽은 죄인을 다시 살려서 아들로 회복시키려 오신 참 생명이시기에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천국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애통의 삶
죄와 죽음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생명일 뿐이다.
우리 주님은 죄와 죽음으로 애통하는 자를 다시 살려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시기 위해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와 애통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내셨다.
사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 애통을 가져가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이 먼저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시며,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온갖 조롱과 수치와 채찍에 맞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살해를 당하신 것이다.
‘없음’의 존재가 살았다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며 자신들의 가치와 영광을 열심히 쌓고 있었던 가인의 후손들이 생명으로 오신 구원자를 죽여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힘과 열심으로 쌓아놓은 의와 공로와 업적들을 전면 부정하여 마귀의 행사로 매도하시며, ‘독사의 새끼’ ‘마귀의 자식’ ‘회칠한 무덤’ ‘외식하는 자’로 정죄하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눈에 꼽힌 가시처럼, 자신들의 길을 막는 걸림돌로 보였기에 사무치게 미워하고 핍박하여 결국 십자가에 목 박아 죽여 버린 것이다. 예수를 죽여야 하나님처럼의 영광과 가치를 챙겨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있음’의 존재가치를 챙기기 위해 하나님마저 살해하는 독사이며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당하기에 합당한 쓰레기들이다.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실체이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부인하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또한 그렇게 살 수도 없는 마귀의 후손이며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폭로하신 것이다.
하지만 창세전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셔서 멸망의 세상에서 끄집어 내시며, 반드시 본래의 상태인 ‘없음’의 먼지로 자각시키고 인식시키는 작업을 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티끌의 존재로 끌어내리시며, 내 옛사람,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다.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자신이 바로 티끌의 ‘없음’이며, 무가치한 존재이며, 패역한 죄인이며, 영원한 지옥 불에 고통당함이 합당한 자임을 인정하는 진심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위로가 입혀짐을 성경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점진적으로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오른 편, 왼편 강도 (눅 23:33-41)
이사야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 53: 2-4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 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이사야가 묘사한 대로 연약하고 흠모할 풍채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러한 삶을 살아 내셨다.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로마 군들로부터 심문과 매 맞음과 춤 뱉음과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고, 실호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셨다. 그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엄도 풍채도 영광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 능력 없이 당하는 모습을 본 십자가 주변 모든 사람들은, 그 속에는 예수님 왼편에 달린 강도와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포함하여 있었으며, 다 같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욕하였고, 도저히 구원할 메시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벌거벗은 연약한 모습으로,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조롱과 수치와 비방 거리로 취급받는 그 나약한 예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하는 오른편 강도가 있었다. 오직 오른편 강도만 무력하게 보이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로 보여진 것이고 그 ‘없음’으로 보이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일어나는 구원의 능력과 기적이다. 그들에게만 예수가 지신 저주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로 생명의 십자가로 알아보게 된다. 반면 왼편에 매달린 강도와 십자가 밑에 둘러선 무리들에게는 그 구원의 십자가가 무능한 십자가로 보였고,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나약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수치스러운 조롱거리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를 비방하며 욕설을 퍼붓은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마 27:38-44; 눅 23:39). 이들은 또한 그렇게 보잘것없이 연약해 보이는 예수가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요 19:6)라고 고함을 지른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백마를 탄 왕자로 이 세상 힘의 권세자로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성취하여 주는 인간들이 소원하는 강력한 군주의 모습이 아니다. 그분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아무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사 53: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사 53:3),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라고 묘사한 그 모습으로 오셨으며, 그 모습으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셨다. 즉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십판주이신 왕이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로 내려오셔서 세상과 대치되는 삶을 살아 내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권세자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희생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오른편 강도나 왼편 강도나 똑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여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오른편 강도만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눅 23:41). 그는 하나님 앞에 끔찍한 죄를 짓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받아야 할 심판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처형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자각이며,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아무 죄 없이 그렇게 벌거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의 무죄함을 변호한 것이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눅 23:41).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조롱하고 비방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을 때, 오른편 강도만 애통하는 심령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실 때 함께 숨을 거둔 가련한 인생 하나가 당신 곁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의탁했고, 그 애통함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라고 놀라운 구원의 위로를 입혀주신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성도를 죄인으로 분석하여 애통으로 끌어내리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깨닫게 하는 진리의 말씀, 성경 말씀을 매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 성도는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되며,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이 지신 십자가 구원을 깨닫게 되고 믿음으로 소유하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하러 오신 말씀이시다. 요한이 말씀한 봐와 같이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말씀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잉태시켜 그분의 자녀 됨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요 1:1-4, 14). 즉 성경은 예수에 대한 증거의 책이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끄집어 내자마자 세상 육신을 위해 먹던 양식을 끊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 광야에서 오직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신령한 만나만 먹이셨다. 그리고 율법의 말씀을 주셔서 그들의 정체성을 폭로하시고 죄인으로 분석하여 결국은 세상 애굽인으로 살던 옛 죄인은 광야에서 죽은 시체로 ‘없음’의 티끌로 되돌림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만 먹고 태어난 새 사람만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 시험을 주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는 진리를 알게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먼저 우리를 죄인으로 티끌의 존재로 분석하시고 폭로하셔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은 검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해부한다. 그 말씀의 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히 4:12) 투명한 해부를 겪게 하신다. 이때껏 자신의 수치와 죄를 덮어 감추기 위해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이 벗겨지고 부서지고 깨짐으로 무가치한 존재로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죄인으로 티끌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사망에 놓여있음을 알아보게 되는 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이 상한 심령의 애통이다. 그가 필사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뿐이다. 그 애통은 우리의 깊은 심령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애통이기에 우리 전 인생과 동반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 그 애통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쏘다지는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는 매일의 삶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모태 중에 태어난 죄인’이라는 다윗의 애통으로 자신의 실존을 돌아보게 되며, ‘나는 여전히 온통 나의 유익만을 챙기는 뼛속까지 매 순간의 생각마저 오로지 나를 위한 패역한 죄인이며, 도저히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더러운 걸레와 같은 존재이구나‘라는 자신의 실체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됨으로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공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5-24)라고 울부짖는 처절한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 애통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구원이 임하게 되는 은혜의 위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진리의 말씀이 자신을 점점 파고들어와 믿음의 경지에 올랐을 때 그의 자아인식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로 분석하는 처절한 고백이었고, 자신의 지체 속에 있는 악한 죄가 작동함으로 자기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시오’(롬 7:15-24)라는 구원을 애통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애통의 마음으로 내려갈 때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위로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 1-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와 같이 진리의 말씀은 성도를 일차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는 해부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말씀이 내 마음에 떨어지면 그 말씀이 성도에게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함과 같이 말씀이 검으로 내 마음에 파고 들어와 내 자신이 얼마나 패역한 죄인인가를 해부하고 벌거벗은 것같이 폭로하여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임을 인식시키고 인정하게 하며, 항복하는 자로 끌고 내려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라고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나는 진리의 말씀에 의해 내 마음속 깊이 숨겨있었던 가식과 위선과 거짓과 교만들이 백일에 드러나는 폭로와 벌거벗겨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됨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의 애통으로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자각이다. 나는 그 본성이 악을 행하는 자이기에 얼마나 패역하며, 온통 죄만 생각하는 완전한 죄인이며, 선한 일로 자신을 의로운 자로 위장하여 사람들 앞에 의인으로 서고 싶어 하는 더 교활하게 외식하는 바리새인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 패역한 죄인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리오’라는 자신에 대한 부인과 절망이 애통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이는 오직 천국의 복을 받은 자녀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땅에 속한 자들은 자신을 부인하는 가난한 심령과 애통으로 절대로 내려갈 수도 또한 그 하늘나라 원리의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도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으로 생명이 끊어져나가는 극심한 슬픔과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되며, 자신이 바로 벌레보다 못한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애통으로 구한 것이다.
사도바울의 애통
사도바울은 진리의 말씀이 그의 심령에 점점 깊이 파고 들어와 그를 해부하고 분석한 결과 ‘의인의 성화’가 아니라, 반대로 ‘죄인 중의 괴수’로 폭로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지체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대적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애통한 것이다. 내 속사람,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지만 내 육신은 이 세상의 것을 원하는 그 욕망이 끝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기에 바울은 자신의 육적 욕망을 ‘사망의 몸’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죽은 시체에서 나오는 행위가 얼마나 악한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롬 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죄의 법을 섬기는 더럽고 추악한 사망의 근거들을 쌓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롬 2:5). 바울은 인간의 실존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알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기에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 고 선언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철저히 해부하는 자각으로 내려갈 때 그가 본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는 “배설물”로 인식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너무나 철두철미한 인식을 가지게 됨으로 말년에 자신에게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되는 상한 심령과 애통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실존이 완전히 폭로되자 자신의 죄 된 육신을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애통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4-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이것이 절망의 애통에서 터져 나온 마지막 자아인식이다. 자신은 본래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 즉 마귀와 방불한 자이며,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는 찢어진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극지의 애통함에 이르게 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해부하는 그 투명한 애통함으로 바울이 집요하게 붙든 것은 십자가이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알고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분이 못 박힌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다윗의 애통
다윗은 자신이 모태 중에 죄인으로 출생하여 (시 51:5) 죄만을 생산해내는 자신의 실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인식한 것이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3-4). 다윗은 자신의 죄가 머리털처럼 많아서 쉴 수가 없이 너무나 악하여 자신을 저주와 파멸로 끌고 감을 깨닫고 (시 40:12), 그 죄로 인하여 밤을 이루지 못하는 극심한 통곡으로 하나님께 애통한 것이다.
시 32: 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바로 죄의 조성자이며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그 본질적 죄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 피로만이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히 도말되는 복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신이 바로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뉘우치는 그 상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로 내려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은총을 구하게 된 것이다. 다윗은 이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라고 애통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구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항상 애통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위로를 구하였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고(시 6:6), 또 그의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될 만큼 눈물 많은 인생을 살았다 (시 42:3)고 고백할 정도로 애통하는 삶을 산 자이며, 그 애통이 그에게 십자가 어린 양의 피로 자신의 죄가 도말되는 복음을 미리 불수 있는 은혜의 위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복음을 찬양하기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다윗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진정으로 애통하고 통회하는 자에게 죄가 도말되는 위로를 주신다.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요일 1:9).
예레미아의 애통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는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할 심판으로 가장 어렵고 어둡고 힘든 시기에 선택받아 나라와 민족의 죄로 인하여 산산이 찢어진 마음으로 평생 눈물로 하나님께 애통한 선지자였다.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거역하는 패역한 백성들이 바벨론의 약탈로 성전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참살당하는 참혹한 황폐를 눈앞에 두고 눈물로 찢어지는 애통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렘 8:18).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패역한 자기 백성들 앞에서 멸망과 징계를 선언하는 예례미아의 마음은 산산으로 조각났고, 어쩌면 예레미야의 애통의 눈물이 바로 하나님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유다의 참혹한 멸망과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하는 예레미야는 가족들로부터도 배척받고, 그의 예언은 조롱거리가 되고, 그가 쓴 글은 불에 소각되고, 매를 맞고 진창 구덩이에 던져지고, 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는 위협에 고독과 절망을 견디어 내야 했다 (렘 15:17, 19; 20:203; 32:2). 그의 생애는 절망적이었고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 눈물바다였다. 하지만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사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레미야의 통곡의 눈물과 슬픔과 근심은 더디어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에게서(눅 19:41) 성취되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크게 우셨다(눅 19:41)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려 오셨음에도 여전히 마음이 강퍅하여 구원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그들의 악행을 미리 내려다보셨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사악한 죄로 완전히 파멸로 나아가게 됨을 인하여 예레미야가 애통하였던 그 마음으로 애통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 라고 이스라엘의 죄로 애통하셨다.
창녀 마리아의 애통
창녀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며 눈물을 흘린 여인이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7-39). 마리아의 슬픔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슬픔보다는, 자신의 극심한 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애통의 슬픔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더러운 창녀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정죄 받은 자신에게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머리털을 가지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예수님 발밑으로 내려가는 심령의 가난함에서 나오는 애통의 슬픔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발을 닦아주면서 애통하는 마리아의 가난한 심령을 꿰뚫어 보시고 마리아가 가장 소망하는 죄에서의 자유, 무죄를 선언하여 주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48-50).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죄에서의 자유이며, 죽음에서 구원받는 생명이다. 하나님의 위로와 궁훌과 자비는 그렇게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실체를 자각하고 자신을 비우고 부인하는 낮은 자리, 예수님 발밑으로 내려가 그분의 장악과 통치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자에게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의 위로이다.
성도의 애통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신앙 여정은 자신의 가능성과 긍정의 힘을 극대로 발휘하여 의로운 행위들을 열심히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 칭찬과 의로운 자로 돋보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반대로 나라는 존재가치가 철저히 부서지고 깨지고 ‘없음’의 자리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를 찾아와 주시며, 세상에서 끄집어내어 사망의 광야로 끌고 가시며, 결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생명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로 만들어 내신다. 그 죽음의 광야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들여다보게 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게 하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존재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와 하나의 연합을 이루시는 목적을 이루신다.
성도의 애통함은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로 자신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시는 십자가의 보혈을 구하는 필사적인 애통이다. 즉 나의 죄인 됨을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끝없이 나를 감싸고 있음에도 끝없이 나오는 죄악이 머리털같이 쉴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상태를 투명하게 꿰뚫어 보게 되는 낙심한 마음과 상하고 찢기는 마음에서 울부짖게 되는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애통함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 한 세리의 애통한 마음에 대하여 주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셨다. 반대로 의인이라 자칭하는 바리새인은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면서 ‘하나님 나는 저 세리같이 안 살아서 감사합니다’ 라고 자신은 세리와 창녀처럼 토색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일주일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잘 냈다고 자신의 공로를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 죄만 지은 것 외에 드릴 것이 없는 가난한 자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만을 구하는 애통밖에 아무것도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실존을 인정하고 상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그 세리를 주님은 ‘의롭다’고 위로해 주셨다.
눅 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사 43:7).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행위와 열심과 공로와 업적들로 인하여, 인간이 만들어 드리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시고 (롬 11:32; 3:19),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열심과 의의 행함으로 자신의 영광을 천하에 드러내고 나타내시는 자신의 의로운 뜻을 성취하시는 일로 영광을 받으신다. 때문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이 땅의 티끌로 만드시고, 그 존재가치가 바로 이 땅의 먼지 같은 ‘없음’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그 ‘없음’에 하나님의 긍휼과 생명을 입혀주셔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선악과를 주셨고, 그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실체를 확실히 알아라고 마귀를 이용하여 죄에 빠지게 하시고, 모든 인간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롬 11:32)고 성경은 반복하여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즉 하나님만이 선이고 의이며, 생명과 진리와 영광 그 자체 이심을 나타내는 목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처음 자리 확인과 죄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며,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그분의 열심과 행하시는 일들을 지켜보고 깨닫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과 만물에 전능하심을 알아가며, 오직 그분의 은해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는 믿음뿐이다.
죽은 시체로 잠깐 머물러 사는 인생이 하나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감히 하나님 앞에서 너스레를 떨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의인으로 자칭하는 자이며,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것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오만한 마음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썩은 송장과 방불한 죄인의 몸뚱이를 받을 수가 있으며, 또한 썩어짐의 송장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어찌 ‘의’로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참으로 무지한 악당들이다. 하나님은 죄인의 더러운 육을 받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내 놓으셨다. 그런데 죄인의 썩은 송장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산자처럼 열심을 부리고 쓰레기 같은 행위들을 스스로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 내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향한 최악의 모독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독사들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죽어있던 존재이다. 잠깐 숨을 붙여주셔서 살아있는 자같이 움직인다고 하여 어찌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업적들을 논하며 가치를 챙길 수가 있겠는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신의 존재로 귀한 존재로 규정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썩은 시체이며 없애버려야 하는 쓰레기와 방불한 존재들이다. 오직 창세전 구원하기로 택함을 받은 자만 그리스도 안에서 귀한 자녀로 이 멸망의 세상에서 건져내 주시기로 정해 놓으셨다. 그 외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언제든지 쓸어 없앨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역사 내내 보여주시고 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창 7:5-7) 라고 선언하시고, 오직 택함을 받은 노아 8식구만 구원하시고 온 인류는 홍수로 철저히 쓸어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아말렉 족속에 대하여서도 그 어떤 자비도 긍휼도 베풀지 말고 무조건 몽땅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급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삼상 15:2-3). 하나님은 또한 가나안 7족속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도 남김이 없이 몽땅 죽이라고 반복하여 명령하셨다 (여호수아 11:14; 6:21) (신 7:20; 20: 15-17). 이것이 죄와 이 세상 육신에 속한 마귀 후손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반응과 철저한 심판이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쓰레기 같은 존재이며 이 세상과 함께 반드시 멸망으로 심판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멸하시며,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후손은 반드시 심판으로 멸망하신다는 무서운 경고이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마귀의 후손을 대표하는 진멸의 대상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몽땅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가 얼마나 무서운 멸망의 심판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마치 죄악으로 물든 모든 가나안의 원주민을 죽여야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 (가나안) 안에 뿌리박고 있는 그 끈질고 독사 같은 죄악들을 반드시 죽여야 만이 그분이 천국으로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원받은 성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옛사람의 성품들이 남아 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거짓과 위선 등등 수많은 세상 것들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죄들을 여전히 우리 안에 남기게 하신 이유는, 그렇게 끈질기게 뿌리박고 있는 내 속 마음의 탐심과 야망들을 경험하면서,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의와 가치를 챙기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외식적인 악행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도저히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패역한 죄인이 맞구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붙들라는 데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처음 자리의 확인과 인식과 깨달음이며,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하나님의 구원만을 필사적으로 구하는 애통함으로, 생명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로 끌어내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가난과 고난과 애통과 핍박과 같은 시험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겪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는 구실을 달아 틈만 있으면 자신의 자랑과 의를 챙겨가지려는 마귀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런 자격조차 없는 티끌이며 죽음에 처해있는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과 시험들은 천국의 복을 내려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영생을 입혀주시기 위하여, 모두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한 특권이며 복된 선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를 “복받은 자여”라고 천국의 팔복을 입은 자로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절대로 나의 의지와 열심에서 격발되어 나올 수 있는 육신의 것들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는 다만 고난과 시험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을 감사하며 순종으로 따라가기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때껏 이 세상에서 소위 되고 굶주리고 헐벗고 애통하는 자를 가난한 자로 인정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물질적으로 구제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며, 가난과 고통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며 직무로 간주하여 왔다. 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문제가 해결되고 소원이 성취되고 승승장구하는 형통하는 삶으로 다른 종교보다 월등하게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 자녀 됨의 위로와 영광으로 추구하고 그것이 신앙의 목적지마냥 열심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 완전히 반대로 천국의 복을 산상수훈으로 선포하셨고, 또한 여러 비유로 하늘나라의 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말씀하여 주시는데 그중 대표적인 비유가 바로 거지 나사로의 비유이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 시궁창으로 내려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 앞에서 부자와 완전히 대립되는 비천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부잣집 대문 앞에서 부자가 버리는 음식 찌꺼기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자로, 온몸이 곪아 터져서 고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며, 너무나 심하여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개들이 그 고름을 핥아먹는데도 쫓아내지 못할 정도로 죽은 자와 방불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지옥 같은 삶을 산 그 거지 나사로를 어찌 복받은 자라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주님은 그 거지 나사로가 천국의 복을 받아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더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고 완전 파산으로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에게 천국의 복이 임하는 역설적인 비유이다. 그렇게 물질과 자기 존재의 파산으로 인하여 나오게 되는 영적 애통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내려가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복을 받게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말씀이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임을 깨닫는 철저한 자아인식으로 자신의 실체를 확실히 아는 자에게 나오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애통함이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에 처해있는 죄인에게 임하게 되는 가장 큰 위로와 복은 바로 죄에서의 해방과 죽음에서의 생명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늘나라에서 사는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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