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으로 읽는 아버지의 마음

구원은 은혜로 임하는 영원한 선물이다

오직 은혜 2019. 9. 2. 02:03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은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 이 세상에서 성취되는 최대의 사건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으로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아무 대가 없이 영생을 입혀주시는 은총이며 사랑의 절정을 나타내시는 언약의 성취이다.

 

‘구원’ 에 대하여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목이 말라죽어가고 있다. 그를 살리는 일은 간단하다. 빨리 물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 물은 주지 않고 대신 목마름을 참으라든지, 물을 마시고 싶은 본능을 제거하라고 한다면, 그 목마른 자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과 같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편화된 설교 내용들이 이와 같은 것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이 필요 한 것과 같이, 죽음의 십자가에 달린 죄인에게는 오직 구원과 생명을 줄 수 있는 절대자가 필요하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생명을 줄 수가 있다. 즉 구원은 오직 영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는 믿음이다. 이는 물을 구하기 위한 행위도 노력도 아니며 물을 마시고 싶은 본능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자에게 무슨 행위가 필요하며 무슨 노력과 조건이 있겠는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살릴 수 있는 분, 즉 그가 원하는 물을 가지고 그에게 오시는 분이어야 한다. 물 없이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그를 구원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죽어있는 자에게는 오직 생명의 소유자이신 예수그리스도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목마르게 찾고 있는 영원한 생명수이시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갈망하는 한 여인을 찾아 사마리아까지 그녀 옆에까지 찾아가 주셨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명수를 주셨다. 물이 없어 죽어가는 자와 같이 죄로 죽어있는 나는 스스로 구원자를 찾아갈 수가 없다. 구원은 그분이 먼저 죽어있는 나를 찾아와 주셔서 자신의 생명으로 나를 살리시는 능력과 기적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구원은 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죄인이 끝난 종지부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영의 구원을 이루어주신 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죄인이란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십자가 저주 아래에서 죄인으로 묶여있어 구원의 진리가 주는 자유를, 성령이 입하는 영생을, 은혜가 주는 평강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인에서 영원히 벗어 날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아래와 같은 고민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데 왜 나의 육은 매일 죄를 짓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가?

매일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내가 어찌 용서받을 수 있으며 구원이 보장될 수가 있겠는가?

 

구원은 육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영에서 일어나는 창세전 예정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며 십자가로 성취하여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구원을 받았다 하여 육이 변화되어 완전히 죄를 떠나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등 밖으로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때로는 마음이 더 완악하여 죄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즉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수록 악한 것이 더 드세게 유혹과 욕망의 늪으로 끌고 감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항상 마귀에게 지는 것 같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며, 항상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매일 자신을 정죄하는 회개에 묶어있게 된다. 의인답게 살지 못하는 육을 한탄하며,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게 되며, 육을 억제하거나 학대하는 등 자해하는 방법으로 죄의 본능을 떨쳐버리려고 무척 애를 쓴다.

 

내 육에는 분명히 무서운 죄의 본능과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즉 나의 타락된 존재를 부인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타고난 운명이어서 해결 방책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을 뜯어고치거나 의로운 행위를 요구하는 구원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모두 배제하여 홀로 독립적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로 창세전부터 정해놓으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성취하시고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죄 없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시고” (롬 8:3), 죄인 된 육은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영원히 멸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죄인으로 태어난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영원히 죽었다. 죽음이란 죄인이 끝난 종지부다. 즉 죄의 형벌에서 영원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죄의 형별을 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죄로 인하여 다시는 저주와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제는 죄에서 영원히 해방 받은 자유인이다. 즉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롬 6:6),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니” (롬 6:9),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7) 함과 같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는 죄에 대하여서는 육이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영으로 산자가 된 것이다 (롬 6:10-14). 즉 구원은 죄인 된 육이 죽는 죄인이 끝난 종지부이며, 영으로 의인으로 태여 나는 기적이다.

 

이와 같이 경건치 않는 죄인이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죄인이었기 때문이며, 육신이 연약하여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이 영성으로 이를 깨닫고 말하기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 얼마나 은혜로운 고백인가. 내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넘쳐서 나의 모든 죄가 가려짐으로 죄인은 오직 은혜로 살리라는 소망과 위로가 넘치는 참된 고백이 나오게 된다. 나 같은 죄인에게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구원인가. 이는 우리 편에서 열심히 도를 닦으며 고행하여 의로운 행위로 얻어지는 대가와 희생을 요구하는 그런 억지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유하다. 내가 이루는 일이 아니기에 미리 준비하거나 걱정하거나 책임을 지거나 행위의 노력으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 부담이 없는 값없이 입하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이 은혜를 깨달은 내가 어찌 죄에 거할 수 있으며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할 수 있으며, 이 진리를 깨달은 내가 어찌 슬피 울며 계속적으로 회개를 부르짖으며 예수의 피를 구하는 반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망령된 짓을 되풀이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루어주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믿음뿐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자는 자유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

 

요약하자면,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고안하신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에서부터 이루어진 영의 사건이다. 그분은 우리 죄의 본성을 바꾸는 일에 우리를 행위와 노력에 얽매이게 하지 않으셨다. 옛 죄인은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단번에 영원히 죽어서 없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영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하셨다.

히 10:10-14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 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는 죄인으로 태어난 육이 죽고,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는 하늘나라의 뜻이 나에게 일어나는 기적적인 사건이다. 내가 나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를 보존하며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고전 15:10)라고 바울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포도나무이신 그분이 나를 강하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가지인 내가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를 붙드는 일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가지라고 하셨고, 나를 떠나서는 너회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구원은 죄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기적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의 육을 입고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데 있다. 이는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계획하신 일이기에 인간의 동참이 없이 전적으로 그분 홀로 성취하신 구원의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 어떤 노력도, 행위도, 의로움도, 조건도, 대가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려 오실 때 마구간을 택하여 태어나셨다. 마구간을 한번 상상해보자. 타락된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죄 냄새와 누추한 모습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분은 우리 죄인 가운데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의 누추함과 더러운 죄 냄새, 환경의 지저분함을 개의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한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기 위해 마구간을 택하여 태어나셨다. 그분이 구유에 눕혀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살과 피로 새로운 피조물인 그분의 신부로 태어난 존재임을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오른쪽 왼쪽에 두 강도가 있었다. 그들은 갖은 악행을 다하여 저주의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악한 강도들이었다 (눅 23: 39-43).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에게 무슨 선이 있으며 의로운 행위가 있으며 자신을 살릴 수가 있겠는가. 십자가 처형이 자신들이 행한 악에 대한 보응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강도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의를 예수님에게 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의와 긍휼을 구하는 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라고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입혀 주셨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선물 받은 구원이다.

 

우리가 바로 이 강도와 똑같은 죄인이었다. 죄인은 자신의 죄의 대가로 반드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해야 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처럼 나에게 무슨 의가 나올 수 있으며 어찌 나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분은 패역한 죄인인 나를 살리기 위해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셨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지배자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나 같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다.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우리 상상을 초월하여 또한 하나님 자신을 초월하여 다가오시는 기적적인 사랑이시다!

그분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조건과 대가가 없는 무한한 사랑이시기에 우리 죄인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능력이시다. 십자가에 달린 살인강도와 같은 모습,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음란한 창녀와 같은 모습, 민족의 피를 빨아 이익을 챙기는 세리 마태와 같은 모습,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베드로와 같은 모습,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난폭한 바울과 같은 모습, 거짓을 꾸미고 사기로 자기 유익을 챙기는 비겁한 야곱과 같은 모습, 간음 죄뿐 아니라 살인죄까지 범한 다윗과 같은 모습...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신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치 않는 패역한 죄인들이다. 죄인에게서 무슨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믿음이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불러내시어 자신의 빛과 생명 안에 끌어당겨주심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아무 공로 없이 그분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로운 자녀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은혜는 오직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거저 받아주시는 죄 사함의 용서이다. 죄인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랑의 기적으로 베푸시는 구원의 능력이시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은혜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갈 1:1)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구원은 나의 노력과 의지, 패역한 죄인의 모습과 상관없이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이끌어 주심에 호응하는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자신의 육을 뜯어고치거나 육의 본능을 제거하는 그 어떤 기능도 능력도 부여받지 않았다. 인간은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 (사 64:6) 함과 같이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육의 본능으로 죄만을 생산해내는 패역한 자들이다.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열린 무덤과 같이 악취만 뿜어내는 송장과 같은 존재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롬 3: 10-18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인간은 오직 육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살기에 자아의 욕망, 야심, 목적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마저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패역함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셨다.

마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죄인으로 타고난 본능으로 행하는 것은 오직 죄일 뿐 무슨 의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인간이 선이라고 행하는 그 선에는 이미 죄가 섞여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회개하여 죄를 씻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 흠이 없다고 자고 할 수 있겠는가? 선행을 하였다 하여 하나님 앞에 선한 자라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의롭게 산다고 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흙으로 만드심으로 인간의 육은 먼지, 티끌과 같은 허무한 없음의 존재임을 나타내셨다. 그 본성은 밑바닥이며, 더럽고 부패하고 강퍅하며, 자아에 굶주려 있다. 타락한 인간은 오히려 그분의 뜻을 거슬러 반항하며, 그분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적하며, 그분의 말씀을 도덕질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여 영광을 갈취하며, 자신의 탐심과 정욕으로 지은 죄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린다. 세상 법으로도 하나님의 법으로도 우리는 철저한 죄인이기에 저주의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을 찾아와 주셨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셨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키시고, 의인이라 칭하여 주시고, 하나로 연합을 이루신다.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며 사랑과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의 사랑 앞에 자신을 그 모습 그대로 맡기는 것뿐이다.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사랑의 능력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사랑의 은혜로 아들로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고, 사랑의 청혼으로 신부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사랑에 할 말이 없다. 인간이 어찌 그분의 이 놀라운 기적적 사랑을 측량할 수 있으며 헤아릴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내 안에 계시는 그분이 역사하시는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선한 뜻이다. 그분께서는 사랑을 토대로 나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어 주시며, 그분의 자녀답게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임을 입었기에 그분이 제공하시는 사랑과 생명으로 포도나무에 붙어서 사는 것이 기적이다. 이 위대한 사랑에 인간이 어찌 굴복치 않으리오. 어찌 그분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으랴! 어찌 그분은 사랑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으랴!

구원은 한번 받은 것으로 영원하다

1.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구원은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엡 1: 4),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이기에 (엡 3:11), 그분의 성품과 선한 뜻을 따라 영원한 것이다. 즉 그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 1:17) 태초로부터 계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이는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딛 1:2) 영생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함과 같이 구원은 아버지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죄와 죽음에서 살리기로 예정하신 선한 뜻이며 십자가로 성취하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영원한 자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는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성취하여 주셨다. 즉 그분은 태초로부터 계시는 창조주이시며 영생이시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분의 속성을 따라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구원이다 (히 5:9).

 

만약 내가 수시로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됨으로, 또한 행위가 의롭지 못함으로, 또한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믿음이 약함으로... 이와 같은 행위에 따라 구원이 얻어지거나 취소되거나 유지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과 위반되는 일이며, 그분을 영생이라고 부를 수가 없으며,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와 선물이라고도 말할 수가 없게 된다. 행위에 따라 줬다가 도로 빼앗아 가는 구원이라면, 이 세상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는 행위의 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허사가 되고 만다.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위가 의로워서 구원을 약속받은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연약한 티끌로 지음을 받았기에 유혹에 빠졌으며, 죄와 죽음에 처한 죄인이었기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구원을 선물로 약속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의인을 위해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 즉 처음부터 우리에게 행위에 따르는 구원을 요구하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로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정하신 선한 뜻이다. 그래서 한번 받은 구원은 그분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영원한 것이다. 증언하시기를,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인간은 죄를 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을 뿐이다.

2.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종의 모습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롬 8:16)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일은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가 예정을 입어”(엡 1:11)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엡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로 빼앗아 가실까 봐 불안해하고, 구원이 취소될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에 간혹 빠지거나 교회 행사에 빠지게 되면, 혹은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못하거나 헌금을 적게 내면, 말씀대로 의롭게 살지 못하면, 잘못과 실수를 하게 되면... 등등으로 벌이 내려질 가봐 혹은 어떤 뜻밖의 불행이 닥칠 가봐 혹은 하나님이 나를 버릴 가봐 불안에 떨고 있으며, 또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다. 교회 행사에 열심히 봉사하지 못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판단을 받는다. 헌금을 많이 내지 못하면 물질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십일조를 내지 못하면 하나님의 것을 훔쳤기에 진노가 임한다고 위협한다. 그래서 우리 뒤에는 항상 나의 실수를 징계하시는 심판주가 서 있기 때문에 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려고 무엇인가를 분주히 하는 일에 열심을 부리게 된다. 항상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드리지 못하는 죄책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책감, 의롭게 살지 못하고 매일 실수하는 죄책감, 선행과 봉사를 하지 못하는 죄책감, 헌금을 많이 내지 못하는 죄책감...

 

이렇게 우리는 행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구원이 취소되고 벌과 불행이 닥칠 가봐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의무적으로 가식적으로 섬기게 된다. 억지로 해야 하는 책임과 강요 때문에 의무와 책임을 추구하는 종과 머슴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종으로 묶여있는 자가 어찌 자유하며, 억지로 하는 의무에 어찌 기쁨과 감사가 있으며, 가식으로 섬기는 자에게 어찌 사랑과 평강이 있으며, 심판주를 섬기는 자에게 어찌 구원이 임하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 종교적인 전통과 규례와 형식과 틀을 짜놓고 우리 수준으로 무한한 하나님 아버지를 왜곡하고 제한한다.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신 은혜 안에 있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종으로 꽁꽁 묶어놓고 자유를 구하며, 율법 준수로 자해하면서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모순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나아가서 죄에 빠질 수밖에 또한 실수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육을 한탄하고 미워하며, ‘죄인’이라 정죄하며, 철저한 회개와 행위의 열심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죄 때문에 열심과 노력의 부족으로 구원이 취소된 것 같이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한다. 

 

마치 욕조에 가득 차 있던 은혜가 나의 죄로 인하여 다 새어 나가 없어진 것을 열심과 행위, 철저한 회개로 다시 채워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법이라는 사슬에 묶여있는 종에게 어찌 자유와 평강과 기쁨이 있겠는가? 성경을 백번 통독해도 영으로 깨닫지 못하면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주님이 주신 깊은 영적 의미를 내 것으로 소유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영으로 이 말씀을 깨닫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리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고 아버지의 신실한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바울이 이를 증거하여 말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33). 또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이보다 더 확실한 사랑과 구원의 증거가 또 어디 있으랴. 그리하여 바울이 외쳐 이르기를,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이 약속을 붙들고 아들의 신분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마음으로 깨닫고 영원한 구원을 소유한 기쁨으로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예를 들어, 왕자가 죄인인 당신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신부의 단장으로 당신 앞에 영광스러운 잔칫상을 차려줬다고 하자. 그리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기뻐하며 마음껏 먹고 즐기며 영광을 왕에게 돌리는 일이다. 만약 그 영광스러운 잔칫상 앞에서 당신이 그 썩어빠진 죄의 냄새를 풍기며 통곡하거나, ‘나는 죄인이다’고 자격이 없다 하여 다시 더러운 죄수의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한다면, 당신은 왕의 성의를 무시하고 왕이 차려준 그 아름다운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 격이 된다.

은혜란 왕이 입혀준 영화로운 신부 단장으로 왕이 차려준 영광스러운 잔칫상을 마음껏 즐기고 기뻐하며 왕의 품에 안겨 영광을 왕께 올리는 찬양뿐이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잔칫상에 초대받은 은혜를 나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영광스러운 잔칫상에 초대받지 못한 이웃들을 불러오는 기쁜 일에 사명감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복음 전파에 자유하며 날마다 평강과 기쁨으로 채워지는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이어진다. 즉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이자 명령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대상으로 내가 받은 은혜의 복음을 끝없이 전하는 일이다 (마 28: 19,20).

3. 한번 구원받은 자는 아버지께서 영원히 책임져주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죄를 질 때마다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야 우리 죄가 씻어지는 그런 헛된 죽음이 아니다. 즉 우리가 죄를 질 때마다 제물을 드려야 하는 구약의 율법 시대는 끝났다. 그분은 단 한 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도말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히 10: 8-14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임한 구원은 한번 받은 것으로 영원한 것이다. 그 구원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주님이 잃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 그러므로 아버지의 부르심에 선택된 자는 그 부르심에 호응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 (요 10:14)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위해 아홉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려 두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시다.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는 그분이 친히 찾아가 주셔서 자신의 품 안에 넣어서 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입혀주신다. 구원은 인간이 구원자를 찾아가는 열심과 행위의 대가로 공로에 의해 얻어지거나 보존되는 인간이 붙드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내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천지가 아직 창조되기 전에, 하늘나라에서 정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뜻이며 섭리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시니라”(히 13:8).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며, 이는 영원부터 하늘나라에서 예정하신 일이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생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으로 택하여 부르시고, 그분을 따르는 믿음을 주셨으며, 자신의 피로 우리를 잉태시킨 귀한 생명이기에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29)라고 영원한 약속을 주셨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이스라엘의 4000여 년 역사를 보라. 끝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며 범죄로 실패와 절망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메시아의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그분이 한번 택한 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오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 마음이 강퍅하고 고집으로 못난 자도 끝까지 인내하시고 시련을 허락하시며, 결국 그분 앞에 돌아오게 하신다. 하지만 자신의 못난 성품과 고집 때문에 뿌리부터 착수해야 하는 크나큰 공사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은혜 속에 들어온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한 구원의 시련이며 특권이다.

예를 들면, 야곱은 우리 인간의 모형이기 때문에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기적이고, 거짓되고, 비겁하며, 깨닫는데 미련한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보다 더 고집스럽게 매를 주시면서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대가를 지불한 지독한 사랑이기에, 그분은 한번 부른 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야곱의 인생에서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우리 생애의 모형이다. 야곱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기적이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과 사기로 유익을 챙기는 비겁한 자였다. 즉 야곱은 처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기의 각본에 따라 하나님을 끌고 가려고 하는 고집불통인 우리의 신앙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거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다. 반면 매사에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메시아를 계시하려고 야곱을 찾아가서 몇 번 시도하셨다. 하지만 야곱은 온통 이기적인 생각으로 물질 복만 계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4-15)라고 변함없이 야곱이 깨닫던 못 깨닫던 그 약속대로 야곱을 끌고 가셨다.

그리고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야곱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즉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늘나라의 구원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장차 그리스도께서 사다리가 되어 인간을 찾아와 주실 온 인류의 구원에 관한 영적 축복을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깨닫는데 미련한 야곱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온 인류의 영적 구원을 자신에게만 국한된 물질 축복으로만 계산하고 오직 복을 받아 내는 욕심으로 자신을 찾아와 주신 하나님을 무조건 붙잡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창 32: 26)라고 하나님과 끈질긴 씨름을 벌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이 세상 복을 받아내는 데에 집착하여 자기 욕심을 따라 감히 하나님과 씨름까지 벌이는 무식하고 한심한 자였다. 마침내 하나님은 말로 깨닫지 못하는 야곱에게 그의 미련한 성품대로 역사하사 미련한 방법으로 환도뼈를 쳐서 하나님께 항복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즉 조상이 누구인지 기억나게 함으로 네 조상을 이끄시는 분이 바로 나 하나님이라는 것을 연상시켜 주심으로 이제부터 너의 주인은 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시킨 것이다. 이렇게 끈질기게 깨닫지 못하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참아주시고 항복시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아버지와 너무 대치되는 삶이었다. 요셉은 온유한 성품에 형제에게 당하고 보이발의 아내에게 당하여 잘못 없이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사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창 39:3). 요셉의 고난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창대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시련이었지만, 야곱은 처음부터 자신의 못난 성품과 기질 때문에 겪는 고생이었다. 이와 같이 그분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인내하시며 결코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 끝없이 배신하고 대적하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참아주시고, 약속을 성취하여 주신 것과 같이 그분은 자신이 택한 자는 끝까지 인내하시고 매를 들어가면서도 선한 뜻을 이루신다. 그분은 우리를 끝까지 붙으시고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결국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입혀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