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비유는 보편적으로 ‘착한 행실’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서의 역할’ 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로 세상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는 도덕과 윤리적 역할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해석은 곧바로 율법을 굳게 지켜 행함으로 의인이 되기를 추구하는 바리새인의 행위를 주장하는 겪이 되며, 세상은 그렇게 ‘착한 행실’로 소금과 빛의 역할로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자를 절대로 미워하지도 핍박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의인이라 칭하여 주며, 이름을 높여주고 칭찬하며, 영웅으로 세워주고 영광의 갈채를 보내준다. 그런데 주님은 창세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빛과 소금으로 구별된 자로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며, 그들에게서 나오는 소금과 빛의 ‘착한 행실’로 인하여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반대로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빛과 소금의 ‘착한 행실’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도덕과 윤리적 행실이 아니다.
요 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이 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0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히 11:36-38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착한 행실’로 소금과 빛의 길을 갔지만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조롱하고 죽여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삶은 절대로 이 세상이 규정해놓은 윤리적, 도덕적 역할로 세상이 변질되지 않도록,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그런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염두에 두고 세상이 부패되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과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빛의 역할을 충실히 하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역할을 성취하셨을 것이고, 그렇게 소금과 빛의 역할을 충실히 살아내어 세상으로부터 의인이라 인정받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칭찬하셨을 것이며, 그들을 본받아 율법을 굳게 지키고 행하라고 명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요 17:9),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께서 창세전 택한 자를 이 세상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이 세상에서 뽑아내어 하늘나라로 들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
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 17: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분명 택함을 받은 자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소금과 빛의 역할로 보내진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 (요 17:9) 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진정한 뜻은: “너희는 이 썩어지는 세상과 분리된 썩지 않는 소금이며, 이 어두운 멸망의 세상에서 구원받은 영원한 빛의 자녀라는 선언이다. 즉 너희는 이 썩어져 가는 멸망의 세상으로부터 어둠의 지옥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소금과 빛의 존재라는 선포이다. 그렇다면 ‘소금과 빛’ 라고 선포된 오직 성도에게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성경은 정확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다.
먼저 ‘착함’ 혹은 ‘선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를 알아야 주님이 말씀하시는 빛과 소금의 ‘착한 행실’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고 단정을 내리고 있다. 욥도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 4) 라고 고백하고 있다. 성경은 반복하여 죄인에게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착한 행실’이 나올 수 없다고 강조하고 증거하고 있다. ‘착한 행실’은 오직 선의 근원이신 죄 없으신 우리 주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생명의 ‘의’를 가리킨다. ‘착한 행실’은 세상이 정해놓은 도덕과 윤리적 기준에 의한 죄인의 행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인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원의 의’를 가리키고 있다.
점도 흠도 없으신 오직 의와 선의 근본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착한 행실’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과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며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삶이었고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즉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은 “한 사람의 순종”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즉 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성취하신 구속적 의를 창세전 택한 자들에게만 전가시켜 주셔서 죄인을 의인이라고 칭하여 주시는 십자가 구원의 의를 말씀하고 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오직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착한 행실’로 그분의 의를 전가 받아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며,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착한 행실’로 여겨 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만을 말씀하고 있다. 절대로 인간 죄인에게서 나오는 세속적인 도덕과 윤리적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는 창세전부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고 영화롭게’하기 위한 목적으로 택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율법을 지켜 행하는 행위의 의로움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예수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이미 의로운 자로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본받아 의로운 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앞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착한 행실’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당신의 은혜와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여 주셔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시는 일을 하신다.
롬 8:29-30 / 33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리면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착한 행실’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착한 행실’의 삶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내신 ‘착한 행실’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숭배를 얻어내는 삶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버려지고 조롱과 수치와 매 맞음과 도살장에 끌러 가는 양으로 수난과 죽음을 당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십자가의 삶으로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다 (눅 9:23 / 행 1:8).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행실이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의로운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전 6:14) 라고 담대하게 외치고 있다.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의 삶으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의지하는 성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과 핍박과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성경은 반복하여 말씀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성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은 또한 성도에게는 죽은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과 지옥을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은, 죄악과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 것들로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세상으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숭배를 얻어내는 헛된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 이 세상과 구별된 하늘나라의 원리로 이끌림을 받는 자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향하여서는 죽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는 영원한 구원의 의를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착한 행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성도에게서만 필연적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 영생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구원과 영생의 의를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확실히 밝혀주신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선이 시기 때문이다. 절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도덕과 윤리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다. 인간의 행실은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한 마귀의 탐심이며, 외식하는 회칠한 무덤이며, 썩은 송장에서 나오는 죽은 행실이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책망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거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택함을 받은 자녀이기에 이 세상에서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은 완전히 구별된 하늘의 빛이며 언약의 소금이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성경은 소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먼저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물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대하13:5).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진 구원과 생명의 언약이다. 그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피의 언약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그분의 거룩한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 도말된 것이다 (히 9:13-22). 그 예수님의 보혈의 피의 언약이 변질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이 영원하기에 구약에서 ‘소금의 언약’ 으로 불리고 있다.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게 구별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제사 중에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명하셨다.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2:13).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주실 구원의 언약을 ‘소금의 언약’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예물에 소금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영원히 변치 않는 반드시 성취되는 언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언약은 오직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입혀지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에게만 주어진 그 ‘떡에는 반드시 언약을 상징하는 소금을 넣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레 2:10 / 6:14-18).
소금은 또한 죽어있던 물이 생명의 물로 바뀌는 회복을 상징한다.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왕하 2:19-21). 그렇게 그 소금의 소제를 먹은 자, 소금의 떡을 먹은 자, 소금이 들어간 생수를 마신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되고, 부정함에서 성결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는 소금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라고 성경은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금은 구원의 언약,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떡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렇게 선택된 하나님 백성들은 반드시 소금친 거룩한 제물을 먹음으로 그 제물과 연합되어 영원한 구원이 임하는 ‘영원한 소금의 언약’이 주어짐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민 18:19). 이렇게 소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언약의 상징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사는 마귀의 자식들에게 소금이 부어지게 되면 바로 지옥불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 9:49).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소금이 부어지면 죄에서의 정결로 거룩한 백성으로 구원과 영생이 임하지만,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에게 부어지면 저주의 소금으로 불소금으로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두 번째로, 빛은 소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 1:1-5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만물은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의 구원과 영생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의 묵시가 이 세상에서 역사로 펼쳐지고 전개되고 있다. 만물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영원한 빛이 이 ‘어둠과 공허와 흑암’ (창 1:2)으로 덮여있는 세상에 빛으로 내려오셨음에도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오히려 빛을 배척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진리이신 생명의 빛은 이 세상에 드러나 숭배와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세상 신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의 “어둠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고 이 세상 땅에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분도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이 바로 죄악으로 죽음과 멸망으로 정해진 세상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이라는 진리를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하여 영원한 하늘나라로 들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즉 이 죄악의 세상에서 뽑아내어 당신의 생명을 주어 영원한 당신의 신부로 삼아 당신의 나라로 들어올리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그 영생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비추어주는 빛이 아니라, 은닉성으로 감추어져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만 비추어주는 언약의 빛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빛을 알지도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둠을 더 좋아하여 빛을 배척하고 죽이는 데까지 심판의 근거를 스스로 쌓은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40)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관심은 빛이신 예수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두운 죄악 속에서 오직 육신의 배를 채우며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 데 목숨을 걸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세상은 자신들의 어둠을 감추기 위해 항상 빛을 꺼버리려 하고, 자신들의 썩어짐의 부패가 폭로 당함을 원치 않기에 소금을 짓밟는다. 그렇게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꺼져가는 모습으로 짓밟히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지만, 그렇게 꺾기고 짓밟히는 삶이 바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즉 내 자아가 완전히 죽는 십자가의 삶이며, 그 삶이 바로 참 빛과 참 소금의 ‘착한 행실’이며, 천국으로 이어지는 영생의 삶이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멸시와 천대로 짓 밟혀 자신이 완전히 부인당하는 ‘거지 나사로’ 가 낙원에 이끌러 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천국을 소유한 비유를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예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와 고난을 받는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3-10) 이라고 설교를 마치신 후, 결론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렇게 소금과 빛으로 인도를 받는 자는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구주로 오직 그분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그 삶이 바로 은닉된 하늘나라를 사는 빛과 소금의 ‘착한 행실’이며, 그렇게 빛과 소금이 된 성도는 이 세상 것들을 초개처럼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만을 마음에 담고 그분의 뜻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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