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눅 24: 1-7).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영원히 죽으셨다. 그의 완전한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신경에서 부디 “장사” 라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천여 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가장 많은 의심과 공격이 바로 ‘죽음과 부활’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신이기에 죽을 수 없음으로 잠시 기절한 것이다’, 혹은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이다’ 라는 주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왜곡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 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 19: 33-35). 이와 같이 예수님의 참 죽음을 제자들이 강조하는 것과 사도신경에서 부디 ‘장사한지 사흘 만에’ 라는 말로 주님의 완전한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 죽음이 깊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 믿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첫째,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셔야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죽어서 없어졌음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셔야 그 십자가에서 나도 그와 함께 죽고 장사 지냈기에 내 옛사람 죄인이 영원히 죽었음을 믿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위대한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증인이 없이 확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을 그 죄와 저주와 형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되고, 우리를 새 생명으로 잉태 시키는 부활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고백에 ‘장사한지 사흘’이 되었다는 구절로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을 강조하고, 요한도 극구 주님의 완전한 죽음을 우리로 믿게 하려고 증인을 세워 예수님의 ‘장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요 19: 33-35). 그분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셔야 만이 우리가 져야 할 죄와 저주와 형벌이 영원히 죽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하여 주님의 완전한 죽음을 강조하고 이를 확인하는 증거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일과, 니고데모가 장사를 치러드리고, 요셉이 자신의 무덤을 제공하는 일과, 무덤을 방문한 마리아를 증인으로 쓰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증인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치려 드린 니고데모는 주님이 말씀하여 주신 성령의 거듭남을 깨닫고 믿게 된 사람이었다. 주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너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부활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 뜻은 현재 니고데모는 비록 육신으로는 살아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이기에 너는 반드시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만이 다시 살리는 성령의 잉태, 즉 나와 함께 부활하여야 영원히 산 자가 된다는 진리를 미리 계시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어둠 속에 죽어 있는 자와 방불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밤에 주님을 찾아온 어둠에 속해 있었던 니고데모가 이제는 밤에서 나와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성령의 거듭남을 깨닫고, 한 나라 왕의 장사를 지내는 침향과 몰약의 분량으로 주님을 장사하여 드린 것이다. 그는 자신도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을 인제야 알았다는 깨달음으로 세마포로 주님의 시체를 싸서 친히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장사를 지내 드린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들과 같이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어서 장사 지냈음을 믿는 부할 신앙을 소망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내 옛 사람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던 존재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예비하여 놓은 그 자리에 ‘나’ 라는 신을 세우기 위해 이 세상 멸망의 가증한 것들인 물질과 명예, 탐심과 야망 등으로 채운 것이다. 내 마음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한 성전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로 채워져 있어야 하며,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6-17) 라고 성도의 지향성을 말씀하고 있다. 분명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 마음에 세상의 가증한 것들로 더럽히면 그를 멸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합당한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지어져 가게 된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이 세상의 오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여 잘라내는 세상을 향해 죽어서 장사 지내야 하는 공사를 하고 계신다. 그 공사가 바로 내 옛사람이 철저히 부인되는 십자가 죽음이다. 바울이 외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과 같이 우리는 매일 내 옛 사람이 죽는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 죽음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의인으로 탄생하기 위한 죽음이며 하나님 나라 입성에 합당한 죽음이다. 죄를 짓든 옛 육신이 완전히 죽어서 장사를 지냈기에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기에 다시는 죄를 짓을 수도 다시는 죄인이 될 수도 없다고 확신을 주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3: 9). 즉 죄를 짓든 육신이 죽었기에 죽은 자가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새롭게 태어난 생명은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태어난 영생에 이르는 생명이기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라고 확신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자신의 거룩한 자녀로 지어져 가는 선한 일로 완성하신다. 우리는 다만 순종으로 그분의 이끄심에 견디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뿐이다. 성도의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이 바로 성화이며 신앙생활의 시작이자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자리까지 우리는 가야 하기에 바울의 고백과 같이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매일 죽는 죽음을 체험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향하여서는 새 생명이 날로 날로 새롭게 살아나는 천국이 내 안에서 날로 확장되어 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 나라는 이미 나에게 임하였고 또 임하여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 18).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하늘의 영생으로 탄생되는 복된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 116:15).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 13). 그러므로 나를 위해 살던 내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영원히 죽어서 장사 지냈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으로 탄생된 신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성도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 택한 자기 백성을 먼저 이 죄악된 세상 속에 집어 넣으시고, 이 역사가 내뿜는 오물과 타락과 추악함을 끝없이 폭로하심으로 이 세상이 얼마나 추악하고 얼마나 저주스러운 지옥인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체험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증한 오물들로 차 있는 추악한 내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서 장사를 지내게 하시고,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으로 의인으로 부활하게 하신다. 그때 비로소 성도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깨닫는 지식이 더욱더 고상하게 됨으로 이 세상의 것들이 이제는 나에게 배설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성도로 이끌어 가게 된다. 이는 내 의지가 아니요, 성령으로 띠를 띠우고 끌고 가신다는 주님의 열심과 의지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은혜이며 모든 삶이 복된 삶으로 정착된다. 이것이 은혜이며 복음이다. 복음은 창세전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성취된 일이며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에게 무상으로 입혀지는 선물이다. 인간의 그 어떤 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복음은 선물로 하나님이 친히 택한 자기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필연적으로 그 선물을 받는 자들의 능력과 노력과 자격이 박탈되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사실 우리의 싸움은 나 밖에 있는 어떤 악한 존재와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과 하나님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는 가의 싸움이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이며, 내가 왕이 되어 내가 원하는 욕망으로 살고 싶어 하며 그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급에서 자기 백성을 끌어 내오자마자 첫 번째로 주신 계명이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였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계명으로 주신 것은, 첫 인간 아담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삼으려고 시도하다가 저주와 죽음에 빠진 것을 기억하여 너회 자신을 신으로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을 신으로 삼아 사는 것이 바로 저주이며 죽음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 16:25).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안에는 두 나라 두 영이 서로 배척하는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성도는 ‘오호라 나는 공고하도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옛 사람 ‘자아’가 죽어져 가는 그 고통의 삶을 성도는 매일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분명 타고난 마귀의 속성과 습성과 악한 성품이 있으며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귀와 싸운다고 하는데 그 마귀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기 의를 쌓아 자신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을 마귀, 독사의 자식이라고 불렸다. 바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자아’를 가리켜 ‘마귀’ ‘독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 마음을 잡고 있는 그 마귀의 습성, 경향, 탐욕, 집착 등은 나를 죽음과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힘을 입어 매일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싸움을 거쳐 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 반죽처럼 날로 확장되어 내 마음에 채워져 감을 경험하게 된다. 분명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한번 지고 한번 죽는 것인데 왜 주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을까?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외치고 있다. 날마다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세상의 것들이 성령의 검으로 잘려나가는 세상을 향해 죽어가는 자기 부인을 매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친히 우리 안에 검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신으로 삼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 자신을 채우시는 싸움을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이 이 나라에 오신 것은 결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없이는 우리는 단 한순간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이기에 한순간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매일 체험하고 고백하는 삶이 바로 매일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의 삶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분명 우리 안에서 나를 멸망으로 밀어 넣는 이 세상의 것들을 계속 잘라내시는 일들을 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 잘라내고 있는 배설물들을 도로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천하를 달라고 기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여 이름과 명예를 떨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사업이 번창하여 돈을 많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식이 제일 좋은 대학 제일 좋은 직장 벼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병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온통 예수를 에너지 힘으로 삼아 업적과 공로를 이루어 나를 세상에서 형통하게 해달라는 망령된 기도의 방법과 요술들을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다.
분명 육체를 따라 살던 내 옛 사람이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 지내는” 철저한 죽음을 성경은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에 대해 죽은 옛 사람을 도로 살리는 망령된 짓을 하고 있다. 하늘나라 영생의 양식을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떡으로 먹고, 나의 가치와 의와 힘을 과시하는 기적의 에너지로 사용하게끔 가짜 복음으로 끌 고가는 적그리스도와 가짜 선지자들이 교회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절대로 자기를 용사로 영웅으로 자신의 이름을 과시하는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훈련시켜 우리를 정금같이 연단하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데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교재들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총칭하여 ‘악’이라고 말씀하시고 죄인들을 ‘악하다’ 고 말씀 하신다. 영생의 복을 주시기 위하여 잠시 악을 도구로 교재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악을 통하여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 생명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 ‘악’을 달라고 하면, 그는 하나님을 악의 제공자인 세상 임금으로 보는 망령된 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한 자의 대표인 바리새인을 향하여 너회는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자식,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요 8:44).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 권세자 마귀가 공급하여 주는 탐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아비는 마귀이다. 처음부터 이 세상의 것을 쫓는 자에게는 멸망과 지옥의 심판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요한이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우리는 처음부터 세상을 사랑하는 자로 태어났기에 이 세상의 것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우리 인생의 목적과 목표로 살아온 자들이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육신이 원하는 것을 쫓아가고 있다. 창세기 3장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세상의 주관자 마귀는 우리의 발 꿈치를 끝없이 물고 흙인 인간을 먹음으로 자기 나라를 확장해 가고 있다. 우리를 끊임없이 물어뜯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세상 이리들을 쫓아내야 하는데 오히려 끌어안고 이리들이 주는 독을 받아먹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물어뜯고 있는 이 세상 이리로부터 떼어내는 일들을 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리를 끌어안고 있는 아들을 먼저 두들겨 패서 손을 놓게 하여 아들을 먼저 그 이리에서 끄집어 낸 후에야, 이리를 때려죽일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끌어안고 함께 살고 있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손을 떼게 하여 끄집어내기 위해 매를 드시는 인생 막대기와 영원한 복된 나라로 인도하시는 지팡이를 동시에 사용하시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멸망의 심판으로 끝나게 하신다. 그 그림이 바로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이스라엘이 부유한 애급에 정착하여 세상과 함께 살고 있을 때, 먼저 그들을 세상 애급에서 끄집어 내오는 일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애급이란 세상에 완전히 찌들어져서 세상인으로 살던 그들에게 율법을 내려 주셔서 그들의 마음에 꽉 차있는 세상 오물들을 심판하여 죽이는 공사를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하신 것이다. 그 40년이란 광야에서 하나님은 친히 하늘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 그들의 영혼을 날로 새롭게 하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지키시면서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게 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는 존재이며, 그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배우고 체험하면서 뼈저리게 깨닫게 하시고, 애급인으로 살았던 그 옛 사람은 결국 광야에서 죽은 시체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탄생된 새 사람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입성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 2-3).
성도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통하여 낮아지고 주리게 되는 자기 부인의 삶으로 이끌려 가게 되며,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으면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어떠한 일들을 이루셨으며, 나는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우며, 무엇으로 지어져가는 가를 깨닫게 하시며, 내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며, 그분과 하나로 연합되는 선하신 뜻을 더디어 깨닫고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는 모든 일에 순종으로 화답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전 인생을 이 세상 광야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함으로 내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새롭게 탄생시켜 오직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는 신부로 창조하여 가신다.
예를 들면, 욥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의인으로 하나님을 섬긴 자였다. 그는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 의로워 지기를 추구하였고, 또한 세상의 부유도 누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재물을 함께 거머쥔 복 받은 자로 명성을 날렸다. 욥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욥 1:1-5) 로 동방에서 이름 날린 자였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진정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쌓기 위한 것이 였음이 하나님 앞에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세상에 향한 집착들, 즉 자신의 명예와 자랑과 의의 방패로 삼아왔던 허위적인 종교행위를 드러내어 폭로 시키는 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일부터 착수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마귀를 개입시켜 욥의 자식, 아내, 친구, 그리고 자신을 부유케 유명인으로 만든 그 많은 재물들을 순식간에 다 빼앗아 가시고, 더디어 욥 자신마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욥기 2:7-8) 의 정도로 극심한 절망과 죽음 속에 집어넣으신 것이다.
욥은 자신을 의롭게 부유케 만든 자신의 모든 소유와 존재 가치가 송두리째 뽑히게 되자 이내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던 그 율법주의 허위적인 ‘의’가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결국 자신을 낳게 한 하나님을 원망하여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는 데까지 가기 시작하였다. 욥의 마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에 있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의롭게 부유하게 만든 율법 행위에 집착했던 것임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율법에 얽매여 율법의 종으로 사는 욥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사단을 개입시켜 욥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시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가 평생 섬겨왔던 그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그를 종으로 부려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사단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욥에게 사단을 붙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의롭다고 자칭하는 욥의 오만한 마음을 꺾으시고,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의로울 수가 없으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역할로 주어졌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욥은 더디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 14: 4) 라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단을 개입시켜 세상의 소유와 자신의 의에 마음을 두고 있는 욥의 가치관을 부수시는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욥은 모든 것을 다 잃고 종기로 극심한 고통 속에 처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의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때 하나님을 진정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뛰게 되자 옛 사람 욥이 죽고, 그 자리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시게 된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 6). 욥이 하나님을 진정 볼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의 죽음이었다. 즉 그가 가진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잃었을 때 나오는 세상에 대한 자기 부인이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완전 거지이지만, 그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요 낙원에 이끌려간 하늘의 복을 받은 자이다. 주님은 마음에 하나님을 담은 자가 청결한 자이며, 그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말씀하셨다 (마 5: 8). 이와 같이 성도는 진정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과 욕심을 스스로 버리게 되며, 오직 내 마음이 소망하는 하늘나라만 바라보게 되며, 신랑 되신 예수만 의지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 지옥 같은 삶을 체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대하여 온전히 죽기를 원하는 믿음이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나를 ‘장사’ 지내는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다. 매일 죽음에서 부디 끼는 절망이다. 그런데 그 죽음의 절망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내면의 평온과 기쁨과 감사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천국의 삶을 사는 자로 그분이 나를 이끌고 가고 있기 때문에 내 안에서 예수의 보화가 터져 나오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십자가 삶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그때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함과 같이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자로 새로운 창조를 입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역사를 던져주신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역을 알아라는 것이며,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주신 것은 은혜와 구원과 영생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선악과를 주신 것은 생명나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함이며, 어둠을 주신 것은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깨 닫으라고 던져준 것에 묶어있으면 그것이 죄이며 영원한 저주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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