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의 진의

요한복음 [72]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못한 이유 /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 (요 19:31-42)

오직 은혜 2021. 8. 17. 13:07

요 19:31-42

31 이 날은 예비 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 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 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 피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날은 유대인의 예비인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의 뼈가 꺾어질 수 없는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한다(19:31). 왜냐하면 다음날이 유월절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거룩한 날에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빌라도에게 주님의 뼈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구함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시신을 자신들의 안식일을 더럽히는 요소로 취급한 것이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19:31).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성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섭리를 꺾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두 강도의 다리는 꺾었지만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못하였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19:36). 이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하나님의 섭리로서 예수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그분은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받쳐짐으로 그 누구도 그분의 뼈를 꺾을 수가 없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온전한 희생 제물로 당신의 백성들이 장차 이 세상 죄악과 죽음에서 구원받게 되는 십자가 구원을 출애굽에서 그림과 같이 선명하게 보여주시고 체험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문에 피가 발라져 있는 이스라엘 집은 뛰어넘어서 장자를 지켜주시고 애급의 장자는 몽땅 죽이셨다. "내가 애급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이스라엘의 장자는 이와 같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임하는 그 유월절 어린 양은 반드시 점도 흠도 없어야 하며, 뼈를 꺾지 말고 머리와 내장까지 통째로 하나도 버림 없이 전부 다 구워서 먹으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제물은 점도 흠도 없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받쳐져야 하므로 그 뼈는 꺾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율법으로 명하신 것이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찌니라” (출 12:46-47).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민 9: 12).”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시34:20). 하나님께 드려지는 유월절 어린 양은 점도 흠도 없는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라고 율법으로 명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유월절 어린 양이시기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으며, 당신의 백성들이 그 어린 양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시편 34:19-20에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것은 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즉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분은 하나님께 받쳐지는 온전한 제물이시며 유일한 의인이셨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셨음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라고 진술하고 있다. 즉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죄의 대가로 하나님 앞에 뼈가 꺾어져야 하며,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살아남을 자가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리를 꺾음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죄인은 하나님 앞에 죽었음을 확증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뼈만은 꺾지 않았으며,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 오신 유일한 의인이시며,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뼈가 꺾어짐으로 죽음으로 확증된 자들이다. 그중 택함을 받은 자들만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살아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점도 흠도 없는 의인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한 희생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으며,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7-18)라고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구원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아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점도 흠도 없으신 완전한 의인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그분의 다리가 꺾어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부정함으로 전부 뼈가 꺾어졌지만,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자신의 죄 때문에 아니라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뼈는 절대로 꺾어질 수가 없음을 확증한 것이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과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오게 한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설명하고 있다. 아무런 죄기 없으신 예수님이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는 그 거룩하고 의로운 죽음에서 그분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 이심을 증거하여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 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19:35)라고 말한 것이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진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철저히 도말하는 죽음이었으며, 우리를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잉태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죽음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해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람은 칼이나 창에 찔리면 몸에서 피만 나오는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동시에 쏟아 나왔다고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자신의 증거가 참이라고 말하고 이 사실을 요일 5:6에서 거듭 강조하여 증언하고 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 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요한의 증거대로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권세와 권능을 가지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물과 피로”로 오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다 이루었다”라는 선포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흐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 지고 우리의 목마름이 영원히 해소된 것이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5)라고 물이 죄와 허물을 씻어서 정결케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6-27). 그러므로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물은, 죄를 없애기 위해 죄인으로 태어난 옛사람이 물세례를 받아 영원히 죽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음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 즉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신랑과 혼인하여 영원히 한 몸이 되는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예수님의 피

성경에서 제일 처음으로 등장한 피에 관한 사건은 바로 아벨이 흘린 피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없음’의 존재(죽음)로 규정하셨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선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없음’의 티끌로 만드시고, 인간의 존재 가치가 바로 ‘없음’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라고 첫 인간 아담에게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는 오직 ‘없음’에 부어짐으로 ‘있음’의 존재로 살아나게 됨을 일관성 있게 점진적으로 반복하여 설명하여 주신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그 첫 번째 계시가 바로 아담의 첫 후손으로 태어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여 피를 흘리게 한 사건이다. 여자의 후손으로 택함을 받은 ‘아벨’은, 이름 그대로 ‘허무, 공허, 없음’ ‘아무것도 아닌 자’로 태어나서 이 세상 마귀의 후손을 상징하는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여 피를 흘렸으며, 그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하나님은 첫 아담의 후손인 아벨이 하나님께 첫 제물로 받쳐짐으로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짐을 아벨의 피로 계시하여 주셨다. 즉 아벨은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여 세상 악인과 율법의 모형인 가인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아벨의 희생으로부터 인간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림으로 세상 가인에게 참수 당하였으며, 실상은 아벨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받쳐진 것이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희생 제물로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핍박과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이 세상 죄인들에게 살해당하게 됨을 미리 보여주신 계시이다.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고 조롱과 매 맞음과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분은 몸소 자신의 삶으로 천국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우리 안에 임하게 되며, 어떠한 삶으로 이끌려가게 되는가를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그분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여 주셨다(눅 9:23; 행 1:8). 그분은 오직 당신의 자녀에게만 뚫고 들어오셔서 가난한 심령으로 오직 어린 양의 피만을 구하는 애통으로 끌어내리신다. 결코 우리를 아벨과 같이 ‘없음’으로 이 세상 마귀의 후손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로,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생명을 입어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의 존재로 잉태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있음’의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없음’의 존재로 허무하게 세상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로 죽은 자 같으나, 그 자가 바로 천국의 복을 받아 영생을 살게 됨을 아벨의 순교로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첫 후손의 탄생에서 이미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게 됨을 계시하셨고, 십자가에서 성취하여 주셨으며, 이제 당신의 백성들이 성령으로 아버지의 자녀로 잉태됨을 나타내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내리게 하신 것이다.

 

레위기 17:11에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과 생명이 임한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직선적으로 제시하여 주신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53).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몸 안에 있는 모든 피를 다 흘리셨다 (19: 34-37).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요일 5:6)라고 예수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찬식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라고 예수님 자신의 피가 곧 영원한 죄 사함과 생명임을 제시하여 주셨다.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53-54)라고 피를 마셔야 영생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함께 흘러나온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신부에 합당한 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내가 목마르다”라는 외침과 함께 우리의 목마름을 전부 삼켜버리시기 위해, 즉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영원히 속량하여 주시기 위해 신 포도주를 마시고 “다 이루었다"라는 선포로 숨을 거두셨다. 신 포도주는 묵은 포도주, 즉 율법을 상징한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 7:4),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이루시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완성과 폐함’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 나온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덴동산 생수의 강

첫째 강의 이름: ‘비손’ 그 뜻은 ‘풍성하다’

둘째 강의 이름: ‘기혼’ 그 뜻은 ‘터져 나가다’

셋째 강의 이름: ‘힛데겔’ 그 뜻은 ‘화살처럼 빠르다’

넷째 강의 이름: ‘유브라데’ 그 뜻은 ‘달콤하다’

경에서 물이 처음으로 생수의 강으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을 옮겨놓으신 후 에덴에 사면팔방으로 뻗어져 흘러나가는 생수의 강을 주셨다. 즉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생명의 강이 어떻게 사면팔방으로 세상 끝까지 임하게 되는가를 네 줄기 강의 이름으로 설명하여 주셨다. 그 이름의 뜻이 바로 ‘풍성하다’; ‘터져 나가다’; ‘화살처럼 빠르다’; ‘달콤하다’이다. 바로 풍성한 생수가 온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터져 나가 이를 마시는 자는 그 입에서 달콤함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장차 생명을 소생케 하는 생수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터져 나와 온 세상 사방으로 흘러나가 풍성한 새 생명을 입혀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증언하기를,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즉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사면팔방으로 흘러나가는 은혜의 강, 에스겔서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 수(겔 47:1‐1 2) 모두가 생명을 소성케 하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임을 제시하고 있다.

노아 홍수의 물 심판

노아의 시대에 와서 그 물이 어떠한 물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창 6:5), 물로 죄악 된 인류를 진멸하시기로 정하신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창 6:7). 하지만 그 온 인류 중 오직 노아에게만 은혜를 입혀 노아에게 속한 8식구만 예비한 방주에 들여보내셔서 물 심판에서 구원하신다. 여기서 물은 모든 죄악된 것들을 철저히 소멸하시는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물로 모든 죄악을 쓸어버리고, 오직 은혜를 입은 노아만 구원하시고 새 땅을 펼쳐주시고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타락한 인간들이 내어놓은 그 죄의 삯으로 자신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됨을 보여준 심판이며, 인간의 죄악된 행실로 땅도 함께 물로 심판을 받게 됨을 보여주셨다. 이와 같이 물은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원한 생수로 영생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이 세상과 죄인들에게는 저주와 죽음으로 멸망시키시는 심판임을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6-7)라고 베드로는 가장 큰 두 심판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두 심판이 바로 전 인류에게 행하여지는 노아 홍수의 ‘물 심판'과 최후의 '불의 심판'이라고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홍해의 물세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세상 죄악을 상징하는 애급에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구원하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당신의 백성은 마른 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애급 군대는 홍해를 닫음으로 물로 몰살시키고,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과 단절시킨 것이다. 이스라엘을 굳이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것은 과거 세상 애굽인으로 살던 옛사람의 수치가 물로 완전히 청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기"(겔 36:25) 때문이다. 옛 이스라엘이 물에 빠져 죽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으로 솟아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고전 10:1-2).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의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구별된 백성이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에게 속한 새 이스라엘로 태어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보시킨 것이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

구약과 신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의 물세례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까지 약 4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즉 물이 없는 기갈을 겪게 하셨다. 그러한 기갈에서 세례 요한의 나타남과 물세례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의 외침은 사막의 생수와 같이 유대인들의 갈급한 마음을 적셔준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은 것이다(마 3:5-6).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라"(겔 36:25). 물세례의 회개는,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씻어내고, 성전 제사와 율법의 종에서 풀려나는 해방과 자유의 상징이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생명이 임하는 성령의 법으로 옮겨지는 은혜의 상징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성령의 새 시대가 임하는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광야의 선지자로 회개를 외침과 동시에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진행함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서 벗어나 광야로 이끌어내어 메시아를 영접하도록 ‘광야의 소리’ 역할을 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물세례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진행하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자신보다 더 크시며 진정 영생이 임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며,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것임을 선포하였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주님은 초막절에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다가 성전 제단에 뿌리고 있는 성전 앞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라고 자신이 바로 그 초막절의 완성자이시며, 이제 십자가 구원 성취로 그분이 직접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남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원히 그분과 하나로 살 것임을 제시하셨다. 즉 예수님은 성전을 자신의 몸으로 비유하시고 그 성전에서 강처럼 흘러나가는 생수를 성령님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에스겔이 성령의 감동으로 강물을 보는데 그 강물은 성전의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와 그 강물이 지나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만물이 소성하며 번성함을 기록하고 있다(겔 47:1‐12).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 47:9).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는 한 여인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야곱의 ‘우물가’로 찾아가 주셔서 영생의 생수를 선물로 주셨다.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찾아와 하나가 되는 사랑이 싹트고 생명이 잉태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구약에서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얻은 곳이 바로 우물가이며 (창 24:13-15), 야곱도 우물가에서 아내 라헬을 만났고 (창 29:10-12),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다(출 2:15-17). 이와 같이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찾아주시는 사랑이 싹트는 곳이며, 갈증을 해소하는 물이 영원한 생명수로 바뀌는 장소이다. 이는 장차 신랑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심으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이 잉태됨을 제시하셨다. 그 구약의 계시대로 신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앞에 등장한 여인들보다 비교할 수없이 하늘 위에서 오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신랑을 영접하여 새 신부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 샘물이 바로 자신임을 제시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로, 생명의 원천으로 말씀하신다. 만물을 소생케 하고 기갈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공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이다.

오순절 성령 임함과 복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 나온 물이 강물이 되어 온 세상 사면팔방에 폭포처럼 흘러나가는 복음의 새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7:38-39)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물이 곧 성령의 물결로 우리 안에 흘러들어와 배에서 생수의 강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나가게 됨을 미리 계시하여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임함이다. 하나님은 이제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 구원과 함께 추수를 시작하실 것임을 계시하여 오순절을 성령강림의 날로 정해 놓으시고, 성령을 불로 내려주심으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3,000여 명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은혜와 성령의 사역이 도래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행 2: 41).

오순절 이후, 십자가에서 흘린 물이 성령의 생수로 우리 마음속에 흘러넘침으로 강물이 되어 사방에 흘러나가는 복음 전파가 현실이 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요3:38). 그동안 육신의 배에서 더럽고 추악한 탐욕과 욕망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 성령이 임함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해갈시키는 생명을 잉태하는 샘물의 통로가 될 것임을 미리 말씀으로 제시하여 주셨다. 즉 그 생수의 강은 예수님 옆구리에서 쏟아 나와 세상 곳곳에 있는 당신의 자녀의 배에 흘러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제 성령으로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채워진 배는 생물의 통로가 되어 죽어가고 황폐해진 사막에 흘러들어가 성령의 사역으로 죽은 자가 다시 생명으로 살아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계시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12제자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물결은 오순절을 타고 즉시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흘려나간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렇게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생명의 씨를 태동시키고 있다. 십자가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이 우리 안에 부어져서 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우리의 배에서 흘러나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됨으로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표현으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내가 바로 예수를 찌른 죄인이다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고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며, 이는 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는 일이라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요한이 이와 같이 예수님의 참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그분의 죽음은 참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셔야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죽어서 없어졌음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증인이 없이 확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을 그 죄와 저주와 형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되고, 우리를 새 생명으로 잉태 시키는 부활도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에 ‘장사한지 사흘’이 되었다는 구절로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을 강조하고, 요한도 극구 주님의 완전한 죽음을 우리로 믿게 하려고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일과 요셉과 니고데모다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드리는 일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며,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여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19:37)라고 기록한 것이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말하고 있다. 그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짐을 보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될 때 심히 애통하게 되며, 그 애통이 마치 독자를 잃은 것 같은 애통으로 통곡하게 될 것임을 스가랴에서 미리 제시하였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와 물이 바로 나를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해 흘리신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내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회개하게 될 것이며, 그 회개하는 심령이 마치 독자를 잃은 자처럼, 장자를 잃은 자처럼 통곡으로 애통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그 애통하는 자의 심령에 부어지게 될 것임을 스가랴를 통하여 제시하여 주셨다. 즉 내가 바로 예수를 찌른 죄인이며, 그 예수가 나를 위해 피와 물을 쏟으셨음을 깨닫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의미한다.

사도행전 2:37-41에서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라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를 독촉하였을 때 그들은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하였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리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6-37). 베드로의 이 외침을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은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정 메시아 이심을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통곡하며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애통이 임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임하여 3천여 명이 성령을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스가랴의 이 예언이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군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렸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자임을 깨닫고 자신의 죄인 됨을 직시하고 애통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가랴의 내용을 그대로 십자가에 재현한 것이다. “내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찌른 죄인이구나!” 즉 나의 죄로 인하여 무죄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음을 깨닫는 그 애통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라는 계시이며,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과 자비와 용서는 그렇게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찔러 죽인 포악하고 패역한 죄인임을 깨닫는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게 됨을 제시한다. 회개가 터져 나오는 그 애통함이 마치 자신의 독자를 잃은 자처럼 자신도 그 독자와 함께 죽었음을 인식하게 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받지 못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애통이 터져 나올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과 위로가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헬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는데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함으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마 2:18)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식을 잃은 어미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는 것은 오직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으로 죽은 자녀들을 자신의 독생자 예수 안에 넣어서 다시 부활시켜 새 생명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살려내심으로 아버지에게 위로와 영광이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예수를 찌른 자임을 인식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은총이 내려지는 십자가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

“내가 바로 예수를 찌른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는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구하는 그 애통함은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 사망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심령이 끊어지는 애통함이며, 그 애통은 독자를 잃은, 장자를 잃은 절망에서 터져 나오는 필사적인 애통이다. 죽음에서 울부짖는 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단 하나이다. 바로 살려주는 생명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구원을 호소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여 천국에 이끌려가게 됨으로 복이 있다고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를 찌른 죄인”으로 폭로하시고,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다”를 깨닫는 자각과 자기 부인의 고백으로 애통하게 하신다. 내 의지로 깨닫고 애통하는 나의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성령님이 친히 뚫고 들어오셔서 영의 눈을 뜨게 함으로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서만 나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그 가난한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애통함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죄의 법을 섬기는 더럽고 추악한 사망의 근거들을 쌓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롬 2:5). 바울은 인간의 실존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알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기에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너무나 철두철미한 인식을 가지게 됨으로 말년에 자신에게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되는 가난한 심령과 애통으로 십자가 복음만을 고집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죄 된 육신을 어찌할 수 없음으로 절망의 애통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4-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이것이 바울에게서 터져 나온 마지막 자아인식이다.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해부하는 그 투명한 애통함으로 바울이 집요하게 붙든 것은 오직 십자가이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알고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분이 못 박힌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삶 속에서도 자신이 바로 예수를 찌른 자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인식함으로 말년에 스스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나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을 박았으며 나의 죄가 그분을 찌른 것임을 인정하는 그 애통함이다. 그 애통함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과 은혜를 입게 됨으로 감사와 기쁨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과연 본받을 사람인가?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철저하게 버림을 받아 홀로 외로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3년 넘게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육신적 가족도, 그의 마지막 임종과 장례를 치러드리지 못하였다. 시체를 안식일이 되기 전에 빨리 치워달라고 요청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부정을 타는 요소로 취급하는 최악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리마대 부자 요셉과 니고데모 두 사람이 나서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드린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공회원이었고,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부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 됨을 숨기고, 유대인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떳떳하지 못한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고 말하고,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물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19:38-39).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고 제자까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이심을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자임을 인정하였기에 밤에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며, 자신의 말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는 거짓 증거를 조작하여 예수님을 정치적 폭군으로 신성모독 죄로 ‘죄인’으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린 집단이며, 그 참람한 공회 음모에 함께 동참하여 예수님에게 만장일치로 사형 언도를 내리는 일에 가담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바리새인으로서 부와 명예, 지위와 겸손한 성품까지 갖추어 세상 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완벽한 지도자로 사람들의 존경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취득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잃을까 유대인들을 두려워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숨긴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 명예와 부를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정하였으며,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수치를 당하는 보잘것없는 연약한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며, 비록 말씀과 능력은 놀랍지만 비천하고 시골에서 나온 나사렛 예수가 진정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인지 확실한 믿음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님의 제자 됨을 숨겼더라”, 니고데모는 “밤에 가만히 찾아온 그 사람”이라고 굳이 그들의 약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명예와 부를 지키기 위해 공회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어린양 희생 제물로 온전히 하나님께 받쳐지는 그 처참한 모습을 본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찔림을 받아 극적인 회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더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의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마지막 장례를 치러드리는 훌륭한 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당히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며 자신의 무덤으로 준비한 사용되지 않은 무덤을 제공한 것이다(마 27:60), 니고데모도 더는 유대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서서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한 나라 왕의 장례를 치르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 드림으로 그동안 고백하지 못했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자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다.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과 부를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 됨을 숨겨왔던 그들이 이제 더는 숨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임을 당당히 드러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행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칭찬하기보다는 그들의 허물을 드러내어 인간의 연약함과 비루함을 폭로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입혀짐으로 어둠에 숨어 있었던 그들이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 진리와 빛에 속한 자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참 제자가 됨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에서는 부족함이 없이 열성이었기에 공회의 일원으로 선출된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만큼은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숨겨 왔으며, 사람들의 눈을 속여 자신들의 신분을 지킨 바리새인에 손색이 없는 자들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마지막 회개와 각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 두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바리새인들의 대표로 세운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악들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면 다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실 것임을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인내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두 사람을 마지막 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하여 여전히 자신들의 명예, 인기, 지위, 평판을 더 중요시 여기고 하나님 믿기를 자신들의 위상을 올리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여기는 종교인의 삶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하여 드러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필수적으로 목숨을 내놓고 믿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누리고 가진 것을 잃지 않는 상태에서 명예와 신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예수를 버리고 부정할 수 있는 전형적인 종교인의 외식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마지막 깨닫는 기회를 주심으로 담대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잃을 수도, 유대인들로부터 배척과 출교를 당할 수도 있음에도, 용기를 주어 예수님의 마지막 장례를 치르도록 세워주신 것이다.

이는 이사야에서 이미 예언된 일이다.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9)라고 굳이 악인과 함께, 부자와 함께 되었다고 제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쓰시기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그 예언대로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묘실을 제공하는 자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자로 서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새 창조를 위한 부활이었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새 창조의 능력이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임하여 오직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하던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새롭게 거듭나는 하나님이 은총이 입혀진 것이다. 니고데모는 성령님의 거듭남에 대하여 무지한 고로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을 받은 자였다. 하지만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고민하던 그가 더디어 거듭남을 깨달았다는 증거로 어둠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예수님의 장례를 치려 드림으로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됨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즉 이 두 사람은 율법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지니고 종교인의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 그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와 명성과 지위를 포기하고, 유대인들의 감시와 두려움을 뿌리치고, 담대하게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장례를 치러드림으로 참다운 제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탄생하였다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고 그분과 함께 자신들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즉 예수에게 속한 참 제자로 거듭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