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성도가 이 땅에서 죽게 되면, 그 영혼이 직접 천국으로 들림을 받게 되는지? 아니면 어떤 중간 장소에서 잠깐 머물게 되는지?
이에 관하여서는 많은 견해와 주장이 나오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중간 장소가 있다고 말하고 그 중간 장소가 ‘낙원’이라고 주장하며, 천주교에서는 그 중간 장소를 ‘연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낙원’이란 과연 중간 장소 혹은 성 밖에서 머물게 되는 어떤 임시적인 곳을 가리키는지를 함께 알아보기를 원한다.
“낙원”은 과연 천국 들어가기 전에 잠깐 머무는 중간 장소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낙원” 은 무엇을 뜻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낙원”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걸치게 되는, 천국은 아니지만 천국과 유사한 중간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 즉 천국은 예수 재림 후의 영원한 거처를 말하며, '낙원'은 재림 전에 죽은 영혼들이 예수님의 재림까지 시한적으로 머무는 곳으로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낙원”에 관한 구절이 신약에서 아래와 같이 세 곳에서 나오고 있다.
(1). 눅 23: 39-43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구원이 성취되는 그 위대한 순간에, 십자가를 기준으로 왼편 예수를 믿지 않고 조롱하는 강도와, 오른편 예수를 구원자로 알아보고 자신을 맡기는 강도가 서로 분리되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똑같은 내용으로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에 들어갈 오른편 양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질 왼편 염소를 구별하시며, 오른편 양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라고 창세로부터 성도를 위한 천국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시고, 왼편 염소를 향하여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2)라고 그들을 위한 지옥불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 최후 죽음을 앞둔 순간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가 서로 분리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오른편 양은 아무런 공로 없이 죄 투성인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십자가 현장에서 약속받은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른편 강도는 창세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로 잠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역할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강도와 같은 죄인에게 임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달린 것이다.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하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말씀에서 '낙원'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계시는 하늘나라(계4:1-5), 천국을 가리킨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 섰을 때 자신이 비록 십자가에 죽지만 곧 부활하여 승천하실 것이며 다시 재림하실 것임을 선포하셨다.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그분은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약속하신 곳은 "나와 함께 하는 낙원" 즉 천국이지 중간 대기실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계시는 그분이 어찌 중간 장소라고 말하는 ‘낙원’에 있으며, 또한 어찌 강도만 ‘낙원’에 머무는 일이 있단 말인가. 분명 주님은 “나와 함께”라고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낙원’은 "권능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즉 천국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영으로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분과 영으로 하나가 되었기에 우리 영혼은 그분과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으며, 비록 육신은 죽지만 영은 하늘나라 보좌로 즉 천국으로 내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육신이 떠나는 그 순간에 강도에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즉 천국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지 어떤 중간 장소와 같은 대기실에 머물게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즉 주님이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중간 어떤 대기실에 머물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의적으로 해석한 잘못된 교리이다. 만약 그러한 중간 장소와 같은 대기실이 있었다면 주님은 강도에게 "나와 함께"라는 말씀을 할 수가 없으며, 또한 영광의 보좌에 앉가 계시는 그분이 어찌 성 밖 중간 대기실에 있을수가 있겠는가!
(2). 고후 12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 ‘낙원’으로 이끌려갔다고 말하고, 그 ‘낙원’에서 사람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들을 체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듣은” 그 낙원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가 부재하는 어떤 중간에 영혼이 잠깐 머무는 대기 상태를 말하는 곳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와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는 천국에 이끌려가서 그 영광의 보좌를 직접 보았고 들었기에 너무나 감당이 안 되어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한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3).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는 예수그리스도와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생을 상징한다. 그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있다고 계시록에서는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낙원”은 정확하게 “천국”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와 영생을 상징하는 천국의 생명나무가 어찌 성밖 중간 장소나 대기실이라 불리는 ‘낙원’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성경은 문자 하나, 구절 하나,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으며, 조금만 깊이 묵상해도 이러한 곡해와 오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면으로 지칭하고 표현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양한 명칭으로 "천국", "내 아버지의 집", "주의 나라", “내 나라”, "하늘", “낙원”, “위 (위에 것)”라고 표현하신다.
사도 요한의 증거: 계 20: 4-5
사도 요한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성밖 중간 장소와 같은 ‘낙원’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천국 보좌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계 20:4-5).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있겠는가!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 믿는 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난, 즉 성령으로 잉태한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기에 그날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하나님과 하나로 이미 영원을 살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서 “생명으로 옮겼다"라는 생명은 바로 영원을 사는 천국이 내 안에 임한 상태를 뜻하며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좀 더 확실하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13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천국의 아들로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육신이 죽으면 다시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로 천국으로 직접 들림을 받는다. 어떤 중간 장소에 머물게 된다는 말은 성경의 말씀을 왜곡한 완전히 잘못된 교리이다. 만약 성도가 죽은 후에 그 영혼들이 여전히 천국 밖에 어떤 중간 상태, 혹은 대기 상태로 있다고 말한다면, 그 영혼은 불완전한 아직 미완성의 상태이며 그리스도와 분리가 된 상태이며 최후의 심판의 때를 기다리는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에 있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도전하는 잘못된 교리이다. 한마디로 답한다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 머무는 중간단계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이 이를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천주교가 주장하는 ‘연옥’이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단계(연옥)가 있다는 교리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단계인 ‘연옥’이 있다고 주장한 교단은 천주교이며, 그들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성경 말씀을 왜곡한 완전히 잘못된 교리이다. 연옥 혹은 마지막 정화라고 불리는 사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찍 고대로부터 생겨난 이교이며 수 세기에 걸쳐 가톨릭 신학자들이 연옥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결국 여러 번의 공의회를 거쳐,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등에서 공식으로 규정하여 천주교 교리로 만든 것이다.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연옥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세상에서 지은 경죄나 용서받은 사죄(死罪)에 대한 잠벌을 미처 보속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지옥에 가지 않고 연옥(연단을 받는 옥)에 가서 일정 기간 동안 단련을 받는다. 그리고 연옥에서의 단련 기간을 채우고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위키백과 연옥)라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봉헌하면 그 영혼이 연옥에서 정화하여 승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교리를 이용하여 ‘면죄부’까지 만들어 판매하며 백성들을 미혹시켜 돈을 끌어모으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천주교는 그들 연옥 교리를 특히 벧전 3:19 (그 외 마태복음 3:11, 고전 3:15, 유다서 22-23등)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그 어떤 구절, 문자에서도 연옥 사상이나 연옥 교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완전히 잘못된 교리이다.
베드로전서 3:18-20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특히 19절: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씀을 천주교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지옥에 내려가서 그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 네로 황제의 극심한 박해로 온갖 시련과 고난과 죽음에 직면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격려와 위로를 담은 편지이다. 베드로는 노아 홍수의 방주를 예를 들어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자가 겨우 8명인 것과 같이 마지막 끝까지 핍박을 견디어 내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노아 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곧 지옥에 갇히게 되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그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명망에 이르게 되었으며, 온 인류에서 겨우 8식구만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벧전 3:20). 여기서 "그들은"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심판을 미루시며 예수님이 영으로 그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들려주었지만 끝까지 순종치 아니한 패역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이미 심판으로 끝난 지옥에 떨어진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는 노아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동일하게 죄악이 관영된 마지막 때와 같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베드로는 노아 방주의 때를 상기시키면서 지금 너희는 노아 홍수 때와 달리,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보았고, 불의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지셨음을 보았고, 우리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음을 보았고, 그 십자가 복음을 받았고,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방주 안에 있으니 너희는 이미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며, 그럼으로 그 어떤 것도 너희가 얻은 구원과 생명을 빼앗을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4:12-13)라고 반복하여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육신으로 오신 신약에서 시작된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빛으로 임재하신 천지창조부터 시작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전부터 우리를 위한 구원의 뜻을 하늘나라에서 이루시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영의 계시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라고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그로부터 시작됨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줄곧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창세부터 아버지와 하나로 계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창조하셨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모든 일에 함께 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즉 모든 일에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구약 시작부터 줄곧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셨으며, 끊임없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음을 베드로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라고 아직 육신을 입기 전이기에 영으로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신약의 시작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예배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외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와 동일한 외침임을 읽을 수 있다. 그리면 베드로가 말하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비록 육신을 입고 보이게 나타나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셨지만 동일하게 영으로 죄와 죽음에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 “회개하라 심판이 가까이 왔다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죽음에서 살리라”라는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은 믿지 않은 죄로 이미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 죽은 귀신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육신은 살아있지만 그 영이 죽어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속한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부르셨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마8:22).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서 제외된 자들을 ‘옥에 갇힌 자’라고 부르고 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사61:1). 사도 바울도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의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엡2:1)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죽음’이라는 심판을 받았고, 죄와 죽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지옥에서 죽음을 정해놓고 육신만 살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귀신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은 살아있지만 영혼이 여전히 죽음의 옥에 갇혀있는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영혼은 사단에게 묶여있기에 “옥”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세상은 사단 마귀가 권세를 잡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가두어 놓은 곧 진멸하게 되는 거대한 지옥이다. 즉 이 세상은 죄악으로 모든 고통과 슬픔과 고생과 눈물로 찌든 저주와 죽음이 가득 찬 거대한 지옥이며, 현재 그 지옥의 삶을 점점 강도가 높게 체험하고 있으며 곧 멸망으로 치닫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눅 16:26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서로 교통할 수가 없으며, 지옥에 떨어진 죽은 자들과 산 자들 간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고 하셨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즉 육신이 죽으면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되며, 죽은 자가 땅에 있는 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또한 산자가 죽은 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 명백하게 말씀해 주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육신이 죽은 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으니 다시는 죄인이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말씀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며 그 후에는 영원한 심판이라고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3:18). 이미 심판으로 끝난 지옥에 떨어진 귀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또한 지옥에 떨어진 귀신을 다시 천국에 들여보낸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성경은 증거해 주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때라 움직이시는 피동적인 하나님, 실수하시는 하나님, 당신이 정한 일에 후회하시는 하나님, 수시로 번복하시는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신 분이시며, 인생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시간, 모든 영역 가운데 한결같이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1:17), 영원토록 진실하심을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인생 전체라는 충분한 시간을 주셔서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 그럼에도 인간은 양심에 화인 맞아 하나님을 보여주고 복음을 들려주어도 듣지 않으며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끌어 않고 지옥을 선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는 그 어떤 허물도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나라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만 충만한 나라이기에 회개치 않는 자가 빛 속에 들어가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악한 죄가 드러나는 흉측함으로 빛을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 자원하여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거절한 자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미 육신이 죽어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스스로 택한 선택이며,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는 것으로 이미 정해진 일이다. 예를 들면, 영체로 지음 받은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단 한 번의 범죄로 천국에서 이 땅에 내어 쫓겨난 것이며 그들에게는 회개라는 기회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회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천국에 간 나사로를 이 땅에 보내어 자신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개함으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였지만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육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죄를 졌다 하여도 회개하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로 잉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혀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천국
우리 마음에 가장 많이 와 닫는 ”천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악들과 고통과 수고와 눈물과 죽음이 없는 영원을 사는 가장 행복하며 가장 아름다운 이상적인 나라이며, 모든 성도들이 소망하는 나라이다. 사도 요한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4). 그곳은 밤도 없고 태양과 달의 빛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한 곳이며(계21:11 / 22:5), 그 나라는 너무나 웅장하여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고(고전2:9)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남겨지는 제자들을 위로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라고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주셨다. 즉 천국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즉 현재 내 안에 임한 천국과 장차 들어가게 되는 이중성을 모두 제시하신다.
성도가 육신이 죽은 후 들어가게 되는 영원한 천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전적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나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주 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천국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신분을 정해주셨다. 동시에 우리 아버지의 나라는 아버지의 영광이 충만한 거룩한 나라이며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나라’임을 제시하셨다. ‘나라’는 주권과 국민과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고 영원을 사는 영토(하늘나라)로 구성된 완전한 나라이며 영원한 나라이다. 여기서 ‘영토’는 우리가 인식하는 물리적 지리적 영토로 수시로 변하는 종말을 안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은 그런 한시적인 영토가 아니다. 우리가 가는 우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미 완성된 영원한 나라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으로 기쁨이 넘치는 이 세상 죄와 사망이 없는 완전한 나라이며, 우리를 위하여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낳아주신 “우리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의 품에 안기기를 오매불망 간절히 소망하는 곳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늘에서 이룬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제 아버지의 나라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서 펼쳐짐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로 편입되는 복음 전파를 뜻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요1:13)고 말씀하신다. 즉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육신이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으로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 “위로부터 난 자들”이며, 때문에 그 나라는 아버지께로 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 나라는 이 세상 영토와 같이 침략하고 약탈하고 정복하여 얻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창세전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를 위해 완성하신 죄와 사망이 없는 완전한 나라이며, 그 나라가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하게 됨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운명진 자들이며 반드시 아버지의 나라로 가는 자로 정하여진 자들임을 인 쳐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즉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분이 이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자녀로 낳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전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하늘나라에서 이미 완성된 완전한 나라이며, 그 나라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임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임하고 있으며,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이루어짐을 모두 담고 있다. 즉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 모두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already, not yet” 의 교리로 이해하고 있다.
구약(이 세상 영토)은 하늘나라 천국을 설명하여 보여주시기 위한 모형이다
“천국은” 태초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늘나라이다.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상세히 설명하여 알려주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오직 아담만을 위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 옮기셨다. 에덴동산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가 입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공로 없이 그분이 옮겨 주심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하늘나라의 모혀이다. 하늘나라의 실상을 설명하고 계시하기 위해 잠깐 주신 그림자와 같은 모형이었기에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심어놓으시고 사단 뱀의 유혹을 허락하시는 인간 타락의 사건이 바로 에덴동산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천국은 피조된 이 세상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우주공간에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있게 하셨으며,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 천국을 설명하여 보여주시는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 시작이 바로 에덴동산이며, 하나님은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선악과나무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나무를 동시에 주시고 상대적 관계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임하게 되며, 어떠한 원리로 완성의 지점인 요한계시록까지 가게 되는가를 점진적으로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풀어주신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늘나라를 설명하여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리하여 천국의 모형으로 주신 에덴동산은 사라지고, 하나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왕국을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백성과 영토를 상징하는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역사 내내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지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한 백성으로 악화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좀 더 가깝게 그들의 마음속에 항상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예루살렘에 짓게 하셨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하여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통해서만 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성전에서 살게 됨을 알려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 패역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결국 예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함과 같이 불에 타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전과 율법은 장차 천국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고 그 나라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제시하셨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도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도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장차 참 제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의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죄인은 오직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제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을 살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영토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 동안 약속하시고 언약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며 그분이 바로 천국의 문이시며 천국 자체임을 신약에서 밝히 드러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리켜 “천국”이라 부르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라고 외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에덴동산이나 가나안과 같은 어떤 물질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여온 하늘나라이시며, 그 하늘의 천국이신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오셨으며, 이 땅에서 십자가로 하늘나라를 이루셨으며, 현재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예수님은 또한 천국을 장소적으로 “위”,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구체적인 위치에 대하여서는 상세한 설명은 주지 않으셨다.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요3:31).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8:23). 왜냐하면 그분은 영이시기에 어느 한곳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라 만물에 계시며, 어느 시간에 제한된 분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함께하시는 영원이시며, 어느 한 영역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함께 계시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또한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각자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택함을 받은 당신의 자녀를 위해 믿지 않는 저들의 생사도 주관하신다.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말씀대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천국을 소유한 하늘나라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즉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시와 공간을 초월하여 곧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누리는 처소를 우리 안에서 짓고 계신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즉 그분은 우리 마음에 임재 하셔서 우리 안에서 천국을 짓고 계시며 곧 완성하실 것이며, 때문에 주님은 천국이 이미 너희 마음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즉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함께 거하는 그 상태가 바로 영생을 사는 천국임을 제시하신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성도는 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천국의 아들들이기에 육신이 죽으면 당연히 아버지와 신랑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천국은 어떻게 내 안에 임하게 되는가?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7가지로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씨 뿌리는 자의 지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 값진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이다. 그중 몇 가지만 설명하려고 한다.
마13: 44-50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 밭에 감춰진 보화에서, 밭의 주인은 자신의 밭에 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고,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밭과 상관없는 ‘어떤 사람’이다. 그는 보화를 발견하고 주인 모르게 그 보화만 슬쩍 가져가도 무방하지만, 굳이 자신의 소유를 몽땅 팔아서 그 밭을 사서 보화를 소유한 것이다. 천국은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고 소유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보여주시고 소유하게 하신다는 천국의 은닉성을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밭에 있는 보화’, 즉 예수그리스도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부시고 자신들의 율법 행위의 가치를 부정하며 자신들의 공력을 부숴버리는 ‘거치는 돌’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택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 보화의 진가를 알아보는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자신을 위해 쌓아놓은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버리게 되는, 즉 ‘나’라는 존재가치가 완전히 부인되는 무소유의 자리에 내려감으로 천국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비유이다.
(2). 주님은 자신을 진주를 구하는 장사로 표현하고 있다. 윗부분에서 주님은 자신을 보화로 비유하셨지만, 이 부분에서는 진주를 성도로 묘사하고 자신을 그 진주를 사는 장사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이라는 밭에 숨겨져 있지만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찾아내시며 자신의 전부인 목숨을 내놓고 값을 지불하여 그 진주를 사들이는 십자가 구원을 계시하고 있다. 주님은 성도를 ‘값진 진주 하나’로 지칭하시고, 자신의 귀한 생명을 지불하여야 만이 당신의 소유가 되는 생명으로 바꾸신 가장 소중한 보석으로 비유하신다. 성도를 귀중한 진주로 표현하신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값진 진주’가 아니며, 진주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희귀한 값진 보석으로 이 세상 밭에 숨겨져 있는 아주 적은 수자임을 계시하신다. 그렇게 창세전 택함을 받은 그 귀한 진주와 같은 신부를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것과 같이, 성도도 역시 자신을 찾아와 주셔서 목숨을 내놓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신랑을 알아보고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이 두 비유가 같이 붙어있다.
(3). 천국을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말씀은 이 세상 전체가 심판자이신 예수님의 그물에 걸려있는 상태이며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나쁜 물고기와 좋은 물고기는 정해져 있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좋은 물고기로, 또는 나쁜 물고기의 역할로 있다가 때가 되면 그물 주인이 와서 좋은 물고기만 선택하여 당신의 천국에 들여보내시지만 나머지 나쁜 물고기는 내어 버리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내용으로 주님은 추수할 때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30)라고 말씀하신다. 역시 하나님의 선택과 편애이다. 좋은 물고기와 알곡은 자신의 노력과 행위와 상관없이 어떻게 좋은 물고기로 알곡으로 선택 받았는지를 나쁜 물고기와 가라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편애하시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며, 인간이 얼마나 악하며 이 세상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지옥인지를 나쁜 물고기와 가라지를 보면서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심판으로 정해진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9-50). 즉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 지킴의 행위로 의인이라 자칭하는 그들이 바로 악인이며 그들의 결국은 영원한 지옥불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나의 열심과 율법 지킴의 행위로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며, 또한 그 나라는 내가 추구하는 모든 소원이 다 성취되는 보석으로 치장된 어떤 장소 안에 갇혀있는 지상낙원(地上乐园)도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해체되고 세상을 향하여 내 ‘자아’ 즉 나를 위한 탐심이 죽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성도는 그 속에서 자신에게 침노해 들어오신 하나님 나라, 즉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분의 참 신부로 잉태되는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된다. 새롭게 태어난 내 영은 그분의 통치를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며, 그분의 뜻대로 이끌려가기를 소망하게 되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모든 일에 기쁨으로 화답하게 된다. 그 과정이 바로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그 옛사람이 부인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그 죽음을 통과하여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새롭게 잉태되어 천국의 아들들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의 삶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에서(마 5:3-12) 천국을 소유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라고 선포하신다. '천국의 복’은, 말씀 그대로 이 세상에 속한 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이며 그 복은 이 세상과 반대되는 삶의 원리로 임하게 됨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쳐 주셨다. 천국을 소유한 복 있는 자는, 이 세상 것이 털리는 가난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으로 옛사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하여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게 되는 완성으로 진리가 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시하신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이 세상과 구별된 천국의 아들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십자가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배척과 핍박과 죽임을 당하게 됨으로 마지막 선포가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이다. 즉 천국은 바로 천국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믿음이며, 그분이 내 안에 계시면 천국이 내 안에 이미 임한 것이며, 그 천국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온유한 자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로, 긍휼을 받아 화평을 누리는 자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자로 나타난다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18: 1-14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아들로 사는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떨어진 부자 이야기로 어떻게 사는 것이 천국의 삶인가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버림을 받아 하루하루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 자를 ‘거지’라 부르고, 반대로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이라 착각하여 매일 호화롭게 행복한 삶을 산 자를 ‘부자’라고 부르며 그 부자가 지옥 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하신다. 이 땅에서 마음에 천국을 지니고 산 나사로는 그야말로 거지로 부잣집 대문 앞에서 부자와 완전히 대립되는 세상에서 버려진 가장 비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잠 잘 곳도 없이 부잣집 대문 앞에서 부자가 버리는 음식 찌꺼기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자로, 온몸이 곪아 터지는 종기로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지옥 같은 삶을 산 그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영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를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무소유의 거지로 묘사하심으로, 천국은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으로 내려간 자에게 임하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등장한 나사로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산 자로 천국의 삶을 이 세상에서 먼저 살아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씀이다.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도 또한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한 가지 다른 것은 그가 처음부터 천국의 아들로 택함을 받은 자로 이 세상속에 숨겨져 살았고, 그 마음에 예수라는 보화가 숨겨져 있었기에 하루하루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면서 살다가 때가 차매 천국으로 들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이 세상의 것을 소유로 가질 수 없는 거지와 방불한 빈털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며, 그 털린 마음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화만 담고 그분의 은혜와 보살핌으로 그분이 주시는 역할에 순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천국의 삶임을 거지 나사로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에서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은 단 이 비유 한 번뿐이다. 주님이 굳이 거지에게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것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나사로의 삶은 이 땅에서 세상 것 하나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빈털터리로, 온몸에 종기로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는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을 받은 인생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치가 송두리째 뽑혀지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사는 자에게 천국이 임함을 비유로 설명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국의 아들이 된 성도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으로 나타나는지를 거지 나사로를 투입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여 그분의 신부로 또한 아버지의 아들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그분의 품 안에서 아기로부터 시작하여 육신의 성장과 함께 우리의 영도 주님의 양육과 가르침과 인도와 교훈을 받아 시련과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는 유년, 소년, 청년, 중년, 노년을 겪게 된다. 하지만 나 혼자 가는 험한 인생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천국을 향한 길이다. 육신이 늙어가면서 죽는 것과 같이 나라는 자아가 점차적으로 기각되고, 깨지고, 부서지고, 완전히 부인되는 십자가 죽음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천국의 아들로 만들어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천국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표현한다. 즉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십자가 구원 성취로 내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셨으며, 현재 내 안에서 천국을 이루시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주님의 재림이다. 예수님 재림의 날에는, 주님 재림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의 육체가 먼저 부활하고 또 그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이 그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함께 신부 단장으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가장 찬란한 순간이 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는 모든 감추어져 있었던 것들이 백일하에 만 천하에 드러나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와 죽음의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면서 이제 다시는 죄와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학수고대하게 된다. 그 긴 역사 동안 이 땅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뜻, 즉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다. 태초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새로운 단장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순간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거기에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 이러라"(계 21:4). 신랑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성도에게 확신의 계시를 주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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