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으로 읽는 아버지의 마음

회개: 회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의인의 회개란?

오직 은혜 2019. 9. 19. 04:53
 

아버지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

 

우리는 육신의 본능을 따라 끝없이 죄를 짓는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인생은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수시로 실수하고 유혹에 빠지며, 시험과 두려움,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고통으로 죄에 빠져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끝없는 실수와 반복되는 죄로 인하여 죄책감에 억눌려 있으며,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눈물로 통회하며, 구원이 최소 될 가봐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실수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인으로 다시 돌아가 예수님의 피의 제물을 구하는, 즉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일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가장 악한 죄이며, 사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를 내 세우는 망령된 자이기에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라고 심각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넘어지지만 그분은 항상 우리를 일으켜주시는 두 손을 내밀고 계신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우리는 죄를 지면 무서워서 도망가지만, 그분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며 잘못을 깨우쳐 주시며 죄에서 돌이키게 하신다. 우리는 항상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만 그분은 항상 회개의 영을 주셔서 잘못을 깨닫고 다시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아무리 무례하고 불평하며 반항하고 대적해도, 그분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며, 긍휼과 자비와 인내로 우리를 결코 죄에서 돌아서게 만드신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 13:8).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분과 우리는 피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한번 구원받은 자는 창세전 택한 자녀이기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으라고 탕자의 비유를 주셨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하여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한마디 징계도, 미워하지도,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돌아온 탕자가 너무나 고맙고, 너무나 기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또 주고 싶은 한없는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고 입 맞추어 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떠한 죄를 졌다 하더라도, 그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아버지 품에 안기기만 하면 나는 죄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은혜로 깨끗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여 돌아오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니라”(사 1:18).

우리는 고달픈 인생 삶에서 절망과 좌절과 실패로,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 소망마저 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소망과 안위와 평강을 주시는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아버지 품 안에서 겪고 있는 일이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 해도, 험난한 광야 길을 걷는다 해도, 캄캄한 어둠 속에 빠져있다 해도, 심지어 죽음의 절망 속에서도 그분은 끝까지 나를 붙으시고 모든 악에서 구원하여 주신다 (시 139편).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2-9). 참으로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마음으로 헤아리는 신실한 신앙고백이다.

이와 같이 그 어떤 험난한 폭풍 속에서도 그분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성령을 내 마음에 두시어 주시로 나의 잘못과 실수를 깨닫게 하시며, 회개로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시며, 친히 우리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간구하여 주신다 (눅 22:32).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함과 같다. 이와 같이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수시로 나를 감찰하시고 일깨워주시며, 이해와 깨달음을 주셔서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의의 길로 이끌고 가신다. 그 험난한 길을 같이 가주시기에 시험과 고통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입혀 주시며, 위로하고 격려하여 주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하신다.

 

구원과 믿음은 합작품이 아니다

구원이 마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의 행위를 드리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주고받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인간의 행위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합작품이 아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였기 때문에, 구제와 선행을 했기 때문에,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냈기 때문에, 많은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였기 때문에... 등과 같이 내가 무엇인가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롬 3:24, 28). 즉 그분 홀로 성취하신 구원이 나에게 은혜로 임할 때 내 마음에서 그분을 믿도록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육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믿음은 나의 의지적 행위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근원마저도 하나님께 있다.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롬 3:26).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 24) 들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고전 2:5)고 바울은 믿음의 핵심을 정확히 말씀하고 있다.

 

만약 내가 믿었기에 구원이 나에게 임한다면, 구원은 조건적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게 되며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 선물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받기 위해 일한 것이 없이 무상으로 얻어진 기쁜 일이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려주신 혼인잔치상과 같은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반복하여 알려주시고 있다. 만약 ‘내가 믿었기에’라고 말하면, 그 믿음은 나의 공로가 되고 행위에 따르는 의가 된다. 그렇다면 구원은 내 주관적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내 믿음의 행위로 얻어지는 합작품이 된다. 하나님이 이룬 의로운 구원에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위와 공로가 포함되면 죄가 섞여있기에 의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이 이미 성취하여주신 구원을 두 손을 뻗어서 받는 은혜다. 육으로 노력하여 얻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믿기도 전에 구원은 이미 성취된 열매로 익어있었기 때문에 일한 것이 없이 은혜로 받는 선물이다 (롬 4:5).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우리가 판단하여 결정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주동도 아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우리가 예정을 입었고, 그분의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았고, 생명을 받아 자녀로 신부로 새롭게 잉태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든 역사를 ‘믿음’이라 말씀하시고 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5).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객관적인 것이며 수동적인 것이며 입혀지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믿음을 알고 있다. 그들의 믿음과 구원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불러내시고, 보여주시고, 설득하시고, 손을 이끌어 주셨기에 입혀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빗어내신 믿음의 작품이다.

그러나 인간이 논하는 믿음의 동기와 행위는 오직 자아를 건설하고 확장하기 위한 죄인의 탐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신을 의롭게 하는 그 어떤 요소도 기능도 없으며, 더더욱 구원에 이르는 신비적 효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없는 의지적 믿음으로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오직 그분이 값없이 입혀주시는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엡 1:7), 거룩하고 흠 없는 의인으로 용납되며 (옙 1:4.6),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이라 인치심을 받았으며 (엡1:13; 롬 1:14),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엡1:3). 즉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로운 구원이 효능과 능력이 있어 믿음을 가능케 하셨으며, 의롭게 하셨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 끌려가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히12: 2 에서 믿음의 주체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즉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고, 가능케 되며, 생명이 잉태되는 완성으로 종착된다는 말씀이다. 거기에 우리의 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로 구원받은 우리는 오직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라고 확실히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행하는 열심과 충성은 믿음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은 오직 구원과 영생을 입혀주시는 믿음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엡4:5) 뿐이다. 오직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믿음 외에는 다른 믿음이 없다는 말씀이다. 즉 인간에게서 나오는 주관적 의지적 믿음은 구원과 생명을 동반하지 않는 죄인에게서 나오는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고도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고 본색이 없는 믿음으로 간주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빌 3:6) 라고 자고하였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예수 생명을 배제한 믿음이었기에 구원이 없는 죽은 믿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엡 5:12).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얼마나 확신한 구원의 고백인가!

그러므로 구원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와 선과 영광 외에는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끼어 들어갈 수가 없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빌 2:13) 라는 말씀과 같이, 그분이 내안에서 자신의 뜻과 소원에 따라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시며, 내 안에서 선한 일들을 그분이 이루어 가신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옙 2:8).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영화로운 자녀 완성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오직 나를 이끌고 가시는 그분의 믿음을 바로 보고 의지하며, 내 안에서 그분의 선과 의를 이루시는 범사에 순종과 감사로 화답하는 것뿐이다.

회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의미

오늘 교회마다 회개를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 즉 회개가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또는 회개로 죄가 사하여 의로워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회개로 죄가 깨끗해 지거나 우리를 의롭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양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찔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회개는 구원과 생명을 동반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못한 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멸망일 뿐 살길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 사는 동안 매일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말로도 행위로도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육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회개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임하게 되는 죄에 대한 깨달음과 용서, 즉 죄를 완전히 도말하여 없애주시는 영원한 사하심과 영원한 생명이 임하는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인간의 주도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셔서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구원자 이심을 알게 되는 것과 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존재인가?” “누가 나를 이 죄와 사망의 지옥에서 건져줄 수 있는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는 믿음을 그분이 이미 택한 자녀의 마음에 겨자씨로 심어 주시고 가꾸셔서 싹이 나게 하시고 장성하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신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 즉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엡 2:1)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는 그 돌이킴은 모든 자에게 일어나게 되는 회개가 아니다.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깨닫게 되는, 즉 그분이 먼저 이 죄악된 세상에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불러내어 주시고, 나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나에게 죄에 대한 깨달음과 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즉 옛 죄인이 죽고 새 생명이 잉태되는 획기적인 전환을 말한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그러므로 회개의 주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측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도가 아니라, 그렇게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 사망의 몸으로 던져진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눅15: 3-10)에서 주님은 마지막 결론을 한 죄인의 회개로 (눅 15:7,10)로 말씀하시고 있다. 먼저 잃은 양의 비유에서 100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었을 때 그 한 마라를 되찾기 위해 99 마리를 버려두는 비유인데 이 세상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에서도 똑같은 문맥으로 열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하나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마지막 세 번째 비유에서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비유의 마지막 결론은 ‘회개’이다.

먼저, 잃어버려진 양의 비유에서, 100 마리 중 99 마리는 주인을 잘 따라 길을 잃지 않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주인이 진정 원하시는 양은 99 마리 의인이 아니라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었다. 그 한 마리가 본래 주인에게 속해 있었던 양이었기에 주인은 오직 자신에게 속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잃어버려진 양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회개하고 스스로 목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잃어버려진 그 상태로 있는 것이 바로 양의 역할이다. 길을 잃은 양은 목자가 먼저 찾아와 주셨기에 다시 주인의 품에 돌아온 것인데 주님은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에서도 드라크마가 스스로 자신이 잃어버려졌음을 깨닫는 회개로 주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잃어 버려졌음을 알 수도 회개할 수도 찾아다닐 수도 없는 생명이 없는 물체이다. 그 드라크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물체이지만 다만 화폐라는 값어치가 있는 것뿐이며, 주인에 의해 찾아진 것이며, 주인이 찾아낸 것을 주님은 ‘회개’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양이나 드라크마는 잃어버려진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체이며, 모두가 주인의 열심에 의해 찾아짐으로 주인의 품에 안겨진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첫 비유에서는 양으로, 두 번째는 드라크마로, 마지막은 방탕한 아들로 배열하시고, 수자도 백으로, 열 개로, 둘로, 이렇게 점층적 개념과 숫자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그 은혜를 입게 되는 선택과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비유를 회개와 연결하신다. 아흔아홉의 의인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원하시고 기뻐하신다 (눅 15:7, 10)는 결론으로 목자가 원하는 양은 100 마리 전부가 아니라 그중 한 마리가 택함을 받은 양이었으며, 잠시 길을 잃고 있었지만 반드시 목자에 의해 되찾게 되며, 하늘나라로 복귀되는 예정과 편애를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주님은 동일하게 ‘잃어버림’이라는 핵심적 문구를 쓰심으로 이들은 처음 소유된 소속지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5) 함과 같이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였으며, 다만 창세전 정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목적으로 잠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속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고, 잃어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자 같이 보이고, 방탕한 자로 죄와 죽음에 버려진 자와 같이 보이지만, 결코 버려진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와 죽음에 처해 있는 우리를 결코 찾아내셔서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여 주시며, 아들로 아버지께로 돌려보내 주신다는 약속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 6:39).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회개’ 란, 잃어버려진 양이나 드라크마나 잃은 아들 측에서 발휘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잃어버려진 그 자체이며 상태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회개’ 란, 인간의 주도하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죄에 대한 뉘우침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창세전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은혜를 입혀 주시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통회의 마음을 주시며, 구원의 의를 갈망하게 하시며, 생명의 진리를 구하게 하시며, 소유하는 데까지 일방적으로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성령님의 주도하에서 일어나는 ‘회개’가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고후 7:10) 이며, “생명을 얻는 회개” (행 11:18)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올바른 행실에 관한 그릇됨의 뉘우침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올바른 행실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 17).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주도권이 바로 주님에게 있다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 의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이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필요 없기에 그들에게는 '회개' 의 영을 주지않기로 정하셨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은혜를 입혀주시고 영의 눈과 귀를 먼저 열어주셨기 때문에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아보는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는 ‘회개’가 일어나게 된다. 그 ‘회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회개이기에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며, 회개에 합당한 구원과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즉 ‘회개’는 오직 창세전 선택받은 당신의 아들에게만 은혜로 선물하여 주시는 특권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란, 첫째, 성령님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자신을 부인하는 뉘우침이다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에게 임하여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음을 깨닫고 죄인으로부터 의인의 길로 들어서는 방향전환이다. 즉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에게 전가됨으로 그분이 내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그분의 피의 공로로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 졌음을 믿고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믿음이다. 셋째, 회개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과 성령의 법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즉 하나님께서는 회개라는 방법을 주셔서 우리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를 자백함으로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하신다 (요일 1:9)고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음을 선포하여 주시며 동시에 새로운 영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신다. 빛과 생명 되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는 거듭남으로 그분의 신부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6-17)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은 인간의 주관적 의지에서 노력하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의로운 일, 즉 그분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선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회개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시며,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 그분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회개를 입증할 수 있는 일정한 행위나 의식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금식하거나.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재우에 앉아 죄를 뇌우치거나,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는 등 회중 앞에서 진행되는 의식이었다. 전통적으로 진행되는 제사의식은 이미 회개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여주셨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즉 회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도말되었음을 믿는 그 믿음은 회개를 포함하고 있다. 회개의 전제조건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이다. 다윗의 예를 보자.

복음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다윗

다윗은 밧세바의 사건에서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하여 회개로 통곡하거나 금식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나단이 율법을 가지고 다윗의 죄를 정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윗에게 성령의 법, 곧 죄가 사하여지는 복음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다윗은 비록 자신이 빗어낸 죄는 인정하였지만, 통곡의 금식과 회개 대신 오히려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기에”(시 51:16), 제사 없이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덮음으로 자신의 죄가 도말 되여 깨끗하여 졌음을(시 51: 1-2) 믿고 기뻐하며 찬미하였다.

 

다윗은 영의 계시로, 나단이 주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완전히 사하여졌음을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말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 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 4). 다윗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의롭다하고 순전하다’고 하시는 화평을 이루는 복된 복음을 의지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여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 받은 자유와 평강과 기쁨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는 엄청난 죄를 짓은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그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의를 주께 구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고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죄 중에 잉태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택하여 평화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복음을 깨달은 은혜를 누리는 의인의 회개이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의를 그분에게 구하는 복음을 의지하여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이 성취되기도 전에 자신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지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영의 계시로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복된 깨달음이다.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은혜를 드높이 찬미하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넘치는 찬양이었다. 그의 고백과 같이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 다윗은 찬양의 삶 자체를 드린 자이다.

 

의인의 회개

율법은 한마디로 저주와 죽음의 법칙이다. 오직 평화의 복음 안에서만이 자유와 화평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다윗은 복음 안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유와 기쁨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하여 졌음을 찬미하였다. 의인의 회개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없어졌음을 깨닫는 자유이며 진리를 깨닫는 기쁨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는 일이다. 요한은 예수 생명 과 빛 안에 있는 자는 이미 깨끗한 의인이기에 ‘회개’ 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예수 생명 안에 거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도 죄의 문제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철저히 해결하셨기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하여진 복된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전제하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인의 회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여전히 철저한 육적 회개로 의로워지고 회개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길때 베드로가 온몸을 씻는 목욕을 간청하였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고 말씀하셨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분의 성품을 따라 깨끗한 자요 의롭다 함을 받은 자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를 때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첫마디에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셨다. 간음한 여자에게 "회개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마태를 부를 때 세금을 떼먹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울을 부를 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그가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가를 깨우쳐주셨지 회개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분을 따른다는 그 행위에는 이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회개가 포함되어 있기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의를 그리스도에게 구하는 믿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감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깨우침을 주셨다. 그분이 나의 삶을 주장하기에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성령을 주심으로 주도권은 언제까지나 그분이 쥐고 있다. 그리하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요 15:16) 라고 말씀하심으로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의 영을 열어주시며,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하게 하시는 특권이며 선물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내가 실수하였다 하여 잘못하였다 하여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심판하거나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하나님을 두렵게 하는 마음은 사단이 다시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미끼다. 아버지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셨다. 그의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2)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회 죄와 저회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6)라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죄를 범하면 그 죄를 뉘우치고 빨리 그 죄에서 벗어나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 사랑과 의를 구하는 것이 의인의 회개이다. 의인의 회개는 죄에서 이미 구원받은 자유인의 회개이므로 이미 내 죄를 사하여 주신 전제하에서 내 죄를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다윗의 고백과 같이 용서받은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감사가 주어지며 찬양으로 화답하게 된다. 의인의 회개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인에 합당한 믿음과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께서 맺게하여 주신다.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 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 사른다” (히 13:11)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담당한 그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랐으므로 죄를 짊어진 육체가 불어 태워져서 재가 됨으로 죄가 그 육체와 함께 완전히 죽었음을 말한다.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반드시 영문 밖에서 해결하고 끝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2)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한 의인으로 아버지의 임재 속에 거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셨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에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는 예배 식에서 회개를 강조하며,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에게 죄를 드러내야 철저한 회개가 되어 대중 앞에서 죄가 용서된 것으로 생각한다. 죄를 사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인간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 하여 그 담대함으로 죄가 없어지거나 의로워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 즉 죄는 성문 밖에서 영문 밖에서 개개인이 은밀한 가운데서 하나님께만 고백함으로 그분만이 우리 죄를 사할 수 있으며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는 예배 전에 교회 밖에서 은밀한 가운데서 오직 아버지께 고하여 성령님의 깨우침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분의 의와 인도를 구하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행위이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과 같이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하여져서 ‘의롭다’하시고 ‘순전하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의인의 신분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의인이 드리는 경배와 찬양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예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끊임없이 죄를 미끼로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함으로 죄인과 회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요일 1:7) 하였은즉 다시는 죄의 문제로 인하여 마음에 갈등과 괴로움으로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일은 그쳐야 한다. 오직 은혜 속에서 자신의 죄가 이미 사하여졌음을 감사하며 죄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 생명과 빛 안에 거하는 의인의 회개로 자유하며 기뻐하며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