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특성: 영으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영적 생명
하나님은 오직 인간만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의 형상’ 이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즉 자신의 속성인 영의 생명으로 창세전 택함을 받은 당신에게 속한 자를 장차 영적 존재로 탄생시켜 주실 것임을 계시하셨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이 영의 진리를 깨닫고 창세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이미 택함을 받은 자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엡 1: 3-14
1: 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1-12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목적과 근거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시 104: 30)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됨으로 비록 타락으로 그 영이 죽은 상태였지만 다시 살아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주셨다. 그리하여 아담의 타락으로 죽어있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체로 다시 살아난 것을 ‘새 피조물’이라고 말하며, 성령으로 거듭 혹은 중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특별한 영의 생명은 오직 아들로 선택된 자에게만 임한다. 즉 영의 속성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선택받은 자는 영으로 하나님을 인지하며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눈과 귀를 열어주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고 반응하며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영의 기능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반응하며, 교제하기를 즐거워한다. 성령님이 먼저 내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내 영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혼과 육을 동원하여 즉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게 한다 (눅 1: 46-47). 내 영이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게 함으로 혼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함으로 육이 그것을 표현하게 된다.
영의 특성
영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영의 실체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즉 영의 특성은 바람과 같다고 하셨다. 바람처럼 형체는 없으나 분명히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의지적인 움직임이 있다. 회오리바람으로 강하게 다가와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따스하게 부드럽게 온유한 느낌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불처럼 뜨겁게 다가오기도 하며, 때로는 얼음장같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바람은 구속이나 얽매임이 없이 자유 자재하며,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불어올지 인간은 짐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바람은 온 우주에 차 있으며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일하고 있다. 영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바람의 특성같이 자신을 인간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보여주시며 그 임재를 느끼게 하신다. 하지만 육으로 터득하는 인간은 영의 일을 알 수가 없기에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그분이 주시는 계시 속에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깨달을 뿐이다. 그분은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임재를 느끼게 하며 거듭남이라는 증거를 낳는다. 그분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내심으로 성령의 계시로 그분을 인지하게 하신다. 그분은 빛과 생명이시며, 긍휼과 사랑, 자비와 용서, 온유와 화평, 공의와 의로움, 선과 영광으로 충만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으로 태어난 자는 그분의 성품을 따라 그분의 십자가 공로와 은혜를 입어 의로운 자녀로 잉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의 생명을 소유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분은 인간에게 자신의 본체인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삼위일체를 통하여 영적 구원을 성취하셨다. 즉, 성부 되신 아버지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셨으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성령을 주셔서 영으로 새롭게 태어남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 63). 성령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심과 동시에 아버지의 자녀임을 보증하여 주신다. 이것이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 주시는 영생의 은총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롬 8:16). 즉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입고 영의 자녀로 태여 남으로 아버지와 하나로 연합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영, 혼, 육의 상호 관계
하나님은 마음 (감성), 지성, 의지를 가지고 계시는 인격체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 정, 의라는 삼위 인격체로 만드시고, 영, 혼, 육으로 구분하셨으며 (살전 5:23), 영의 나라, 자아 세계, 물질세계라는 삼위 영역을 주셨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식하는 영의 나라는 영생을 의미하며; 자신에 대하여 의식하는 자아 세계는 자기 의지를 나타내는 혼의 인격 기관이며; 세상에 대하여 의식하는 물질세계는 심판과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신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영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으로 영으로 태어난 자는 본향인 아버지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이다. 즉 육의 생명은 육의 죽음과 같이 없어지지만, 아버지께 속한 영의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체는 영생이시기에 오직 아버지께로 난자, 성령으로 난자만이 영생을 얻게 되며 이 생명은 하나님의 속성이므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사랑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인간은 영, 혼, 육이 함께하는 삼 위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삼위일체의 인격으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과 같이, 인간도 지, 정, 의, 삼위 성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세상을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주신 육은 자연을 읽히고, 세계를 인식하며, 인간관계를 통하여 민족과 나라를 구성하며, 땀 흘리고 수고하는 대가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셨다. 하지만 영은 하늘나라에 속하여 있기에 오직 아버지와 교제하며, 땀 흘리는 수고와 대가, 고통과 슬픔, 죄와 죽음이 없는 영원이며, 이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자에게만 믿음을 주어 영생을 입혀주시는 특권이다. 오직 성령만이 죽어있는 영을 다시 살릴 수 있다. 그러나 혼은 오직 자아의식을 전달할 뿐 영의 일을 알 수가 없다. 육은 세상에 속해 있음으로 세상에 관한 의식만을 전달한다. 이와 같이 각자 역할은 다르다.
인간은 영과 육의 두 가지 지배를 받으며, 혼은 육 과 영 가운데를 평행한다. 혼은 육과 영의 가운데서 때로는 육에, 때로는 영에 혼합하는 중간 역할을 하면서 한 인간의 개성, 인격, 성품, 의지를 표현한다. 혼의 성품에는 영적인 요소와 육적인 요소가 함께 공존하기에 영이 강할 때는 영의 인도와 지배를 받고, 육이 강할 때는 육의 지배를 받는다. 혼이 육의 지배를 받을 때 내 '자아'를 주장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게 한다. 즉 혼은 육적인 정욕과 욕망을 따라 탐욕하고 유혹하고 분리시키며, 시기, 질투, 살인, 파멸 등 육의 악한 행실로 영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을 시점으로 하여 영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혼은 육을 도와 하나님의 영에 대적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사단의 종이 되어 육의 정욕을 따라 죄악된 삶을 사는 육적 존재가 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육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 (고전 2:14), 혹은 “육신” (롬 8:6) 이라고 부른다. 육신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갈 5: 16-21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반대로 혼이 영을 위해 봉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식하고 갈망하며, 찬양하고 기뻐하며, 순종하며, 성령이 하시는 일을 도와 성령의 열매를 맺어 온유, 사랑, 인내, 양성, 충성, 용서, 감사와 기쁨 등 영의 성품을 나타낸다 (갈 5: 22-26). 즉 내 혼이 영의 지배를 받을 때 나는 영으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그분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게 되며, 내 육신의 자아를 내려놓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지향하게 되며, 오직 순종으로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뜻만을 추구하게 된다.
갈 5:22-2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와 같이 영과 육은 혼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상호 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 반대로 역사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 17);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사도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이 두 소욕은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대적하게 된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2-24) 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제아무리 성장하였다고 해서 육체의 소욕이 소멸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어느 정도 육체의 소욕을 절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육신의 노력과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제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육의 소욕은 더 강하에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은 끊임없는 갈등으로 공고함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육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자기 의를 세우는 일에 너무나 익숙하게 습관화 되어왔다.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일로 자신도 모르게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갇힌바 되어 (갈 3:23) 율법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갈 3:10) 라고 바울은 뼈저리게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육신 속에서 선한 것이 없이 열린 무덤과 같이 패역하였기 때문이다”(롬 7:18 –21).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7:18; 8:7)고 이미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거듭났을 때 성령님이 내 육과 혼을 주관하시며,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내 육을 그분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그분이 만들어 가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너회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 19-20) 라고 그리스도인의 지향성을 밝혀주고 있다. 즉 우리의 영이 충만함을 받을 때 영의 주관으로 표출되는 혼적인 감동과 육의 일련의 표현은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신령한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며,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게 하셨다.
이와 같이 인간은 영, 혼, 육이 함께하는 삼위 성을 가지고 지, 정, 의. 삼위 인격체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으심을 받았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지성으로 그분에 대한 지식을 배워 그분을 알아가며 말씀을 깨닫게 하며, 감성으로 마음을 통하여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심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의지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한 인격체로 인간의 육을 입고 ‘인자’ 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의 영으로 새 생명을 잉태하여 주심으로 영원히 그분에게 속한 하나의 연합체를 이루어 주셨다.
오직 영만이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지배하는 종의 형태로 만드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혼적 기능을 주셔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도록 하셨다. 아울러 하나님이 주신 자연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여 모든 것을 자기 임의대로 먹고 향유할 수 있는 주권을 주셨다 (창 2:16).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분은 인간을 다스리고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영원한 생명 되신 하나님을 택하기보다는 육의 본능에 따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질의 향유, 죄를 택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달콤한 음식을 먹거나 멋있는 옷을 입고 사람들의 대우를 받을 때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 호화로운 옷도 진수성찬도 한 시간도 못되어 금방 싫증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물질로는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육을 위한 모든 물질은 순간적이며 허무하며 반짝 있다가 금방 없어지거나 썩어간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벧전 1:24),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인생은 먼지와 같다’ 고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함과 무익함을 자신의 인생 경험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면 영은 태초로부터 영원하시기에 영이 주는 생명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오직 평안과 기쁨과 영원한 행복이다.
우리의 육은 비록 이 세상의 죄와 죽음, 수고와 고통,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만, 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참된 자유와 평강과 기쁨과 하늘나라의 소망을 체험하게 하신다. 말씀하시기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3:18 ; 4:6) 함과 같다. 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망과 믿음으로 입혀주신다. 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여 빛과 생명 안에 거하게 한다. 반면, 육은 유발되는 쾌락, 욕망, 탐욕을 따라 죄를 쫓는 자가 됨으로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8) 라고 육의 허무함과 영의 영원함을 계시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과 생명과 평안과 행복이다. 진정한 행복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바라볼 때 소유되는 영원한 생명의 진리이며 오직 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육으로는 이 오묘한 영의 일을 알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의 영적 구원에 도달할 수도 없다.
영으로는 죄를 짓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하심과 같이 우리는 의로 우시며 선하시며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로서 난 자들이다’. 즉 죄와 상관없이 그분의 의로운 영으로 태어난 의인이다. 그래서 영으로는 죄를 짓을 수가 없다
(롬 6:1-7) 고 말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육으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롬 6:11), 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 (롬 6:11)가 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영은 죄가 있을 수도 죄를 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즉 죄와 함께 죽은 자는 다시는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는 영으로 죄를 짓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3).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생명으로 우리를 잉태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본체인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근본적으로 죄의 유전을 받지 않았기에 그분의 생명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으로 태어난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죄와 무관하며, 그분의 의의 생명으로 의인으로 태어났기에 영으로는 죄를 짓을 수도 죄인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 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 9).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하나님의 영으로 새 피조물이 된 자는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므로 영으로 죄를 짓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며, 다시는 죄인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즉 우리의 영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분의 속성을 따라 의로운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으로 태어난 당당한 의인이며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 33-35).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영을 훼방하면 사함 받을 길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속죄하는 권세와 (요 20:23) 중생 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요 3:5).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그분의 영으로 새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으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까지 구제불능하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3: 29) 고 말씀하셨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이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6:17) 함과 같이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영의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사 54:5) 함과 같다.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 속성은 사랑이다. 오직 그분의 희생적 사랑으로만이 하나로 묶어질 수 있다. 그분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죽어있든 영을 다시 살려준 목적은 사랑의 절정인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창 2: 23) 로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여 영원히 하나로 연합하는 화평을 이루시는 데 있다. 하나님은 하나로 연합되는 영의 신비와 새 생명이 잉태되는 영의 속성을 나타내시기 위해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들은 한 쌍씩 만드셨다. 그리고 연합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 생명을 잉태하게 하심으로 온 땅에 충만하며 번창하게 하셨다. 그리고 유독 인간만은 동시에 한 쌍으로 만드시지 아니하시고 먼저 남자인 아담을 만드시고 그 후에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 여자는 남자에게 속해있다는 가정윤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다. 여기에 신비스러운 연합의 진리가 계시되어 있다.
첫째, 아담은 예수의 모형이며, 하와는 우리 성도의 모형이다. 하와가 있기 전에 아담이 먼저 있었던 것처럼 인간 창조 전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먼저 계셨다. 아담 안에 하와가 있었기에 아담의 분신으로 하와를 만 드심으로 둘은 본래 하나였음을 나타내셨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다 (엡 1:4). 즉 우리 영이 아직 육을 입기 전에 ‘그리스도 안’ 에서 하나로 있었으며,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이 세상에 보내진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 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엡 2:10) 라고 말씀하셨으며,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회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 17: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본래부터 그리스도 생명 안에 있었으며, 아버지의 구원 성취를 위하여 이 세상에 잠시 육을 입고 보내진 자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목적으로 잠시 육신으로 사는 자들이며, 우리의 영의 고향은 처음부터 창세전 ‘그리스도 안’ 에 있는 하늘나라이다.
둘째,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될 때 자식이라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됨으로 ‘온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창 1: 27-28)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을 이룰 때 많은 영적 자녀가 잉태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정됨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을 중심으로 아내와 자식이라는 삼 위성의 가정을 이루게 하심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인 동시에 예수님의 신부로 잉태되는 영적 가정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잉태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 된 신부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 56) 라고 말씀하신 봐와 같이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연합체를 말씀하신다. 창세기에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청 2:4)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와 하나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신부인 나를 찾아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구원과 생명을 입혀주셨다.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교제를 계시하기 위하여 솔로몬을 통하여 “아가서”를 주셨다. 아가서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인 나와의 사랑의 교제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 하였구나”
(아 2: 16).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로 연합될 수 있는 신비
우리 영이 아직 육을 입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연합체로 있었기에 (엡 1:4),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1). 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은 육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과 같이, 그분 안에 있었던 우리 영도 이 세상에 잠시 흙으로 육을 입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타락으로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찾아와 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구원의 대상으로 잠시 이 세상에 보내진 자들이다. 사도바울이 영성으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 10).
(2). 예수님은 30년 동안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평범한 삶을 사시다가 아버지의 부르심을 따라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우리를 위해 마귀의 시험을 당하셨으나 승리하셨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다가 아버지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의 영으로 새롭게 태여 나는 중생을 겪는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한 세례였고, 우리가 받는 세례는 그분이 주시는 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한 중생이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날 때 겪어야 하는 마귀 사단의 시험을 이기게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단을 발밑에 두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붙드시고 말씀으로 양육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비록 사단이 주는 고통, 절망, 시험, 유혹이 끊임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겨 놓으신 영적 싸움을 함으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 33).
(3). 우리는 본래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에게 속한 자였기에, 그분을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함과 같이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했다. 그분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이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죽음은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한 죄인의 죽음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 함이라” (롬 6:6-7). 즉 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음으로 반드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영원히 철저히 죽어야 만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의인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4). 그분이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실 때 죄로 죽었던 우리도 그분의 영으로 죄 없는 의인으로 그분과 함께 부활한 자가 되었다. 이 연합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분과 하나로 되어있기에 그분이 죽으면 우리도 그와 함께 죽고, 그분이 부활하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부활한 자가 되어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5).
(5). 우리는 인제 절대로 죄인이 아니다. 그분이 의인이기에 그분 안에서 의인으로 부활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늘 보좌에 앉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 6).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보좌에 앉아 면류관을 쓰고 주와 함께 주님이 주는 특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 28). 즉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행사하게 된다.
(6).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이시다.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가지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저절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는 사람의 의지로도, 혈통으로도 육정으로도 아니요, 오직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공로를 입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를 따라서 영으로 “하나님께로 난자”, 즉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된 것이다 (요 1:13).
(7)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사랑하는 신부다. 비록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의인이시고 우리는 죄인이지만, 의인되신 신랑의 품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서 의로운 신부가 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강조하여 매번 편지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기쁨이 있기를 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도 항상 하나의 연합을 강조하시면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분과 떨어질 수 없는, 오직 그분 안에 있어야 만이 생명을 유지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 5-6).
이 엄청난 연합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사모하고 섬겨드리고 임재를 구하는 단계를 초월하여 성숙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보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고 내 기도와 행위의 노력과 열심히 무엇인가 공로와 업적들을 쌓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이 느껴지고 상금과 보상이 주어지는 그런 육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이 먼저 나를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나의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강하게 붙잡아 주시고 품어주시며, 나에게 끝없는 평강과 사랑을 부어주심을 의식적으로 느끼면서 죽음으로도 끊을 수없는 사랑의 관계를 마음으로 체험하게 되며 바울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부터 하나로 묶어진 연합체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이제 더는 내 주관대로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품 안에서 나를 향한 세심한 섭리와 한없이 입혀주시는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게 됨으로 오직 찬송과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오게 됨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그분의 열심과 선한 일들을 지켜보며, 영의 차원에서 아버지의 뜻을 읽게 됨으로 오직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주소서’ 라는 참된 믿음과 순종의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범사에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며,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당하기를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골 1:24) 고 고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