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의 지혜
누가복음 16:1-9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 한 청지기는 주인의 허락 없이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자로 ‘불의 한 자’이며, 법대로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주인은 청지기의 불의 한 행위를 ‘지혜롭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예수그리스도,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잠 8:11-17) (잠 3:14-18). 그럼에도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지혜’가 불의 한 청지기의 행함에 칭찬으로 쓰였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그 불의 한 청지기의 행함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5장의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지금 이 비유의 청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세리와 죄인들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신의 백성을 찾는 아버지의 열심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 즉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여 주시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주신 비유가 바로 불의 한 청지기의 이야기다.
이 비유에서 청지기는 지금 누군가로부터 그의 불의를 고발당하고 있었다. 불의 한 청지기는 자신의 잘못과 자신이 받게 되는 처벌을 알면서도 돌이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지혜를 동원하여 주인의 재산으로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여주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청지기가 저지른 일은 주인에게는 소유가 줄어들고 없어지는 손실이지만, 빚에 시달려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긍휼이었고 그 빚에서 벗어나 살 소망을 안겨주는 의로운 행위였다. 만약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빚진 자들의 빚을 받아내어 주인의 재산을 늘려서 다시 주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는 빚진 자들의 목을 조이는 악한 일을 하게 됨으로 빚진 자들에게는 ‘악한 청지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청지기는 자신에게 향한 모든 처벌을 주인에게 맡기고, 빚으로 시달리는 자들을 빚에서 풀어주는 일을 택함으로 빚에 시달리는 자들로부터는 ‘의로운 청지기’가 되고, 주인에게는 ‘불의 한 청지기’가 된 것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고, 그 불의로 빚에서 시달리는 자들을 빚에서 해방 시켜주는 ‘의’를 택한 것이며, 주인은 자신의 불의 한 재물로 모든 빚진 자에게 ‘의’를 행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해준 것이다. 불의 한 청지기는 주인의 ‘불의 한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갈취한 것이 아니라,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여 그들에게 다시 살아갈 소망을 안겨준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주인의 재물을 “불의 한 재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말씀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재물은 하늘나라와 상관없는 또한 하늘나라에 쌓을 수도 없는 이 땅의 재물이기에 반드시 털어서 없어져야 함을 힌트 하시고 있다. 그래서 불의 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불의에 ‘지혜’를 붙여주신 것이다. 불의 한 청지기가 주인의 불의 한 재물을 허비했다는 것은 자신의 청지기 직분을 내려놓게 됨으로 다시는 이 세상 불의 한 재물을 끌어모으는 청지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이제 더는 이 세상 불의 한 재물을 끌어모으고 다스리는 힘과 권력을 발휘하는 불의 한 청지기로 빚진 자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됨으로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된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집자가 복음을 읽을 수 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세기관들에게 율법을 어긴 불의 한 자로 고소당하신 분이셨다. 그들은 주님을 율법을 어긴 불의 한 자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하여 주시기 위해 불의 한 자로 정죄 받고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 못을 박는 죽음을 택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 그 ‘불의’의 핏 값으로 즉 그분이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십자가에서 받아내심으로 영원한 죄에서 해방 받아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요 15:12-16). 세상은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불의 한 자’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하지만 율법이 정죄하는 그 ‘불의’로 하나님의 ‘구원의 의’ 를 이루셨다. 즉 율법이 정죄하는 ‘불의’로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참 ‘의’로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 가 성취된 것이다.
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 말씀에서 청지기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자기를 잠시나마 맞아줄 것만을 기대했지만, 주님은 ‘영주할 처소’ 즉 영원한 집으로 영접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여 주시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이 세상 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다 잃은 자로 자신들의 목숨마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순교로 내놓게 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그들을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심을 약속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청지기가 자신의 청지기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주인의 처벌에 맡겼다는 것은, 곧바로 세상을 향하여 자신이 완전히 부인됨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완전히 주인에게 내어놓는 그 자가 영원한 처소로 영접된다는 말씀이다. 즉 우리가 자신의 존재가치와 이름을 높이기 위해 쌓아놓은 이 세상에 속한 불의 한 재물을 다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영원한 친구로 삶아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지향할 때 그분이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여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는 말씀은, 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그런 문자적 해석이 아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맘몬’, ‘불의의 재물’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 세상 불의 한 재물로는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한마디로 버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다음 구절이 “그 재물이 없어질 때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에 속한 불의 한 재물을 가지고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으로 반드시 이 세상의 것이 몽땅 털린 심령이 가난한 자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마 5:3)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불의 한 청지기가 주인의 불의 한 재물을 다 허비하였다는 것은 주인의 뜻대로 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은 자신의 재물을 다 허비한 불의 한 청지기이지만, 그 재물은 불의로 끌어모은 이 세상에 속한 재물이며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재물이기에 그 불의 한 재물로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하여 준 그의 영리한 선택에 ‘지혜’를 붙여주신 것이다. 그 뜻은 주인은 이 세상 불의로 재물을 끌어모으는데 목적이 있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불의 한 재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그 불의 한 청지기가 불의 한 재물로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여 준 것이 바로 주인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주인의 마음에 원하는 일을 해 냈기에 그에게 ‘지혜롭다고 칭찬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심과 노력으로, 행위의 의로 움으로, 명예와 자랑으로, 공로와 업적과 같은 이 세상의 ‘불의 한 재물’을 쌓아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불의 한 재물은 반드시 털려야 하고 없어져야 하며, 그렇게 세상의 것이 다 털린 ‘거지’와 같은 자가 예수그리스도를 친구 삼아 영원한 집으로 영접 받게 된다는 복음을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재물이 없어질 때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그 청지기가 한 일이 옳은 행실임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그렇게 영생의 주를 친구로 삼게 되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의 것들이 다 털리게 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인도를 받아 하늘나라의 존재가 됨을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마지막에 주님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완전한 거지 나사로가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영생의 복을 받은 자로 묘사한 것이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불의 한 재물로 ‘부자’가 되어 명성을 날리며 호화로운 삶을 산 부자가 지옥 불에 떨어진 대조적인 비유를 들어 (눅 16:19-31)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가 담고 있는 은유적 표현을 더 확실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의 긴 다섯 개의 비유로 주님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열심을 배제하여 오직 하나님의 열심으로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구원과 영생이 임하게 되는 복음을 점진적으로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은혜로 시작되고 은혜로 완성되는 그분의 열심이며, 그러한 긍휼과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스스로 불의 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우리를 그 불의한 자리에서 구원하여 ‘의인’으로 만들어 주실 것임을 제시하셨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불의 한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의인이라 칭하여 주시는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죄인에게 구원과 영생이 임하는 능력과 사랑의 십자가이다. 그 복음의 현실 앞에서 성도는 자신의 티끌이라는 처음 자리를 인정하고,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과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인도를 받게 됨을 복된 삶으로 감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0-21)라는 사도바울의 진실 된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