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비유의 진의

혼인잔치 와 은혜의 초청: 가난한자 병신들과 소경들

오직 은혜 2019. 6. 21. 19:03
마태복음 22: 1-14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니라

하니라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눅 14: 16-24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14: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비유의 앞부분 21장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부터 시작하여 성전을 뒤엎으시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일,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와 패역한 포도원 농부 등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셨다. 이 비유들을 모두가 여전히 율법 지킴과 제사와 선행과 같은 종교 놀이로 세상에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탐심을 교묘하게 감추고 자신들의 자랑과 의를 챙기며, 사람들의 인기와 칭찬을 얻어내려는 율법주의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에 관한 폭로이다. 그리고 연이어서 이 혼인잔치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백마를 타신 것이 아니라, 아주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겸손의 상징인 어린 나기 새끼를 타셨다. 이는 그분이 이 세상 왕의 권세로 세상 사람들의 칭송과 숭배의 대상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은닉되어 아주 비천한 자리로 자신을 죄인에게 내어주시는 구원자로 당신의 백성을 섬기려 오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곧바로 성전을 뒤엎으시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사건이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셨다. 수천 년 동안 갈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그들과 함께 계심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또한 그에게 구원과 생명을 구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한 율법 지킴과 제사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여전히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제사 행위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러한 모습에 주님은 분노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질책하시고 성전을 엎어버린 것이다 (마 21:13, 요 2:16). 그리고 그렇게 율법 행위로 자신들이 원하는 들 열매를 맺으려고 열심을 내는 그들의 외식에 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를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로 저주하신 것이다.

율법에 매여 있는 그들은 스스로 허다한 행위들을 열매로 내어 놓고 자신들의 의를 높이고 영광을 갈취하는데 써먹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무화과나무의 때도 아니었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 무화과나무에 예수님이 굳이 찾아가서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게 저주를 내린 것이다. 여기서 무화과 잎이 무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맺으려는 열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자의로 만들어낸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들 열매임을 아시기에 미리 열매 맺지 못하게 저주를 내린 것이다. 그들의 풍성한 열심과 공로를 부정하여 아예 열매를 맺지 못하게 저주해 버렸다는 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자들에게 향한 심판의 메시지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가 바로 두 아들과 악한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다. 아버지로부터 명령받은 두 아들 중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렇게 하겠나이다’라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겠노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둘째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다. 그럼에도 둘째는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으로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를 열심히 섬기겠다고 자칭하는 맏아들은 이내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여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맏아들이 바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칭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율법적 의를 지키기 위해 선지자들을 때려죽이고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여 버리는 악한 자들임을 폭로하기 위해 이어서 패역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마 21: 33-41).

이와 같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 율법을 상징하는 옛 성전의 뒤엎음,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말씀을 거역하는 맏아들,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 등 모두가 율법에 묶여 복음을 대적하는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폭로하기 위해 주신 비유들이다. 마태복음 21장에서 그렇게 목숨 걸고 율법을 지키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패역한 백성으로 가게 됨을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폭로하심으로 그들이 고수하는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인간의 행위, 업적과 공로를 배제한 혼인잔치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지만 초청한 사람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에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일상을 챙기는 변명으로 거절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거저 초청을 받은 은혜로운 혼인잔치를 이들은 스스로 거절하고,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는 이 세상일에 목숨을 걸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구원과 생명을 얻는 혼인잔치를 스스로 거절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알고 믿는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지 않았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바로 주인이 자신의 밭에 진주라는 보화가 숨겨져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여 그 진가를 알아보는 다른 이에게 빼앗기는 비유와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렇게 왕이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혼인잔치를 거부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고, 왕의 은혜를 입어야만 살 수 있는 아무런 자격도 한일도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지 와 방불한 자들을 강권적으로 끌고 와서 잔치 자리에 앉혀주신 것이다.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4:21-24).

이 세상의 힘과 권세와 자신의 의를 쫓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영원한 생명의 초청에 귀를 기울일 수도, 그 은혜의 선물을 알아볼 수도, 또한 받을 자격조차 없는 패역한 자들이기에 스스로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을 거절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연약하고 무력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버림을 받은 ‘가난한 자 병신들과 소경들을’ 지명하여 강권적으로 은혜를 입혀 혼인잔치에 앉혀주시는 것이다 (눅 14:21/ 마 22:10). 그렇게 구원은 불가항력적으로 강권으로 끌려오는 자리임을 말씀하시고 있다. 불가항력적으로 끌려오는 자는 아무것도 한 것도, 값을 것도 없는, 그 어떠한 자격도 조건도 보지 않고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상관없이 끌고 오는 손길에 순종으로 응하는 자, 그자가 바로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로 택함을 받은 이 세상에 숨겨져 있는 자임을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는 이 세상 것을 다 잃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들이기에, 왕이 친히 그들을 위한 예복과 음식과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세상에서 살던 그 모습 그대로 다만 강권적으로 이끄시는 손길에 순종한 것뿐이다. 즉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그 부르시는 음성을 알아듣고 응하는 순종의 마음을 하나님이 미리 주셨음을 힌트하고 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2:14). 주님은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를 구별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청함을 받았다고 하여 하나님이 택한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 혼인잔치는 열심히 일해서 예복을 갖추어 입어서 들어가는 세속적인 잔치가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강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됨을 말씀하고 있다. 즉 왕의 편애를 받기로 정해진 자들이 세상 각각 사방에서 부르시는 음성을 알아듣고 이끌어주시는 손을 잡고 혼인잔치에 모여들어 자리를 가득 채우더라는 말씀이다. 신랑이 먼저 찾아와 주셔서 선택받은 자들의 손을 이끌어 혼인잔치에 앉혀주시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재림 때에 똑같이 밭을 갈 거나 맷돌을 돌리는 그 일상에서 하나는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고, 하나는 멸망에 남겨두신다고 (마 24:40-42)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데리고 온 자들은 왕이 그들을 위해 준비한 예복을 입고 즐겁게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왕이 주신 예복이 아닌 자신이 준비한 옷을 입고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행위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누더기 옷을 입은 자,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 의를 세우는 바리새인들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결국은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눅 22:13) 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결론으로 말씀하셨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눅 22:14). 청함을 받았다고 하여, 즉 교회에 참석한다고 하여 다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창세전 영생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로 택함을 받은 자는 청함을 받은 모두가 아니라 아주 적은 이들만 택함을 받아 신부로 태어나는 영광의 혼인잔치에 앉혀주신다는 은혜의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

오늘날 구원을 받았다고 자칭하는 현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열심으로 만들어낸 이 세상 누더기 옷을 입고 은혜의 구원을 자신의 의와 공로로 가늠하고 있는 자가 교회 안에 대다수가 아닌가? 구원의 확신은 나의 주관적 판단으로 또는 사람들의 객관적 인정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구원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가는 곳은 바로 영원한 지옥불이다. 그들이 바로 잔칫집에 들어와 왕이 선물로 주시는 예복을 거절하고 자기가 만든 옷을 고집하는 외식하는 자요 회칠한 무덤이요 마귀의 자식이며 지옥이 바로 그들에게 해당되는 자리이다. 그들의 결국은 영원한 지옥이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3).

그러므로 왕이 주는 예복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무상으로 주어지는 구원과 영생의 옷이며, 그 옷은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입혀주시는 은혜의 옷이다. 절대로 자의로 만들어 내서 입는 옷이 아니라는 것을 이 비유에서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