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진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오직 은혜 2019. 6. 19. 20:5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삶에 동참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고난과 수모와 죽임을 당한 십자가 예수이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부터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그분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그분은 이 죄악된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지 어린 아기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탄생하셨다. 그리고 우리와 똑 같은 인생을 30년이나 시골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아주 평범한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굳이 로마군에게 붙들려가서 온갖 수모와 매를 맞는 핍박과 수치를 다 당하셔야 하셨으며, 저주의 사형틀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음을 당하셔야 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 전체를 통하여 교회와 성도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배움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굳이 빌라도의 이름을 사도신경에서 거론한 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도말하기 위하여 세상 임금으로부터 당하셔야 할 ‘고난’을 의미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이사야 53장 5절에서 예수님이 당하셔야 할 고난을 미리 예언하여 주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 고백은 십자가 고난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전 생애가 바로 고난의 생애라는 것을 요약하고 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으로부터 영접 받고, 풍요와 재물의 복을 내려주시는 숭배 대상으로 오신 세상 신이 아니셨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핍박당하고 고난과 수모를 받으셨으며, 세상 임금에게 죽임을 당하는 생애였다는 것을 한마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요약하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 는 한 개인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권세와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죄도 찾을 수 없다고 ‘무죄’를 선포한 사람이다. 그것은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도 비록 하나님의 대적자로 메시아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세상에 증거하는 역할로,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눅 23:14-15; 요18:38) 라고 ‘무죄’를 선포한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강도도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눅23: 41) 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판 마귀 가룟 유다도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마 27: 4) 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도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 었도다” (눅23: 47) 라고 증거했다.

그럼에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사도신경에서 구지 빌라도의 이름을 밝힌 것은, 그가 로마 황제의 대리인과 심판관으로 예수님의 유죄와 무죄를 선포하는 권세를 가진 총동으로 등장하였기에 이 세상의 권세자의 대표인으로 쓰임을 받은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와 유죄’ 를 선포한 것은, 바로 그분은 아무 죄가 없으신 공의로 우신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선포함으로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증거를 천하에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략이셨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과 수치와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나를 대신하여 받았음을 깨닫는 계시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의 고백이 ‘나에게, 즉 나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의 고백으로 감지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전체 생애는 죄 없으신 분이 나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 세상 임금 (본디오 빌라도) 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생애셨다. 죄 없으신 분이 이 추한 죄악된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죄인의 육신을 입고 태어난 그날부터 그 자체가 바로 고난과 저주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내려오자마자 아직 태어나시기도 전에 세상은 그를 죽이려고 온 유대인 두 살 이하 영아들을 죽이는 대 학살이 일어났고, 그 학살의 핍박을 피신하려 유리하셔야 하셨고, 태여 날 장소도 없이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나셔야만 하셨다. 이는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며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 36).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30여 년 인생을 한마디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요약함으로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그리하여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으로 세상이 주는 온갖 채찍과 조롱과 수치와 핍박에 아무 대항도 말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극치의 사랑을 몸소 고난과 죽음으로 겪어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자녀와 신부가 된 것은 그냥 말로만이 아니다. 그분은 친히 죄인의 육신을 입고,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죄인으로 정죄 당하시고, 죄인으로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고, 죄인으로 저주의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자신의 의로운 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자신의 생명의 핏줄로 이어 주셔서 자신의 생명 안에 거하게 함으로 하나가 되는 연합을 이루셨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성찬식에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이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 몸소 자신의 몸으로 겪어내어 생명을 주신 그 사랑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그 위대한 십자가의 공로로 죽음에서 새 생명을 얻어 거룩한 자 의로운 자로 구속되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1).

그러므로 십자가로 구속받은 성도는 이제 내가 ‘나’를 주장하는 주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나를 의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진정한 신랑이시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요, 세상과 구별됨으로 당연히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함께 공존할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사는 백성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 같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느니라” (요 15:18‘-19). 때문에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는 기필코 어울릴 수 없는 큰 갭을 가지고 서로 배척하는 충돌이 일어나게 되며, 그것이 성도에게는 고난과 핍박으로 감지된다. 하지만 최후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지옥에서 건지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입성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는 동시에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살던 죄인들은 지옥 불로 영원한 형벌을 당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의 진리로 빛으로 천국으로 오셨음에도 세상은 그를 알지도 또한 영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핍박하고 학대하여 죽여 버렸다. 이와 같이 예수님 삶 그 자체가 바로 세상 권세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삶이었기에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그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예수를 본받은 순종의 아들들로 완성하여 가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순종이라는 것을 요구하시며, 그 순종의 삶을 살도록 고난과 시련을 겪게 하신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주님과 같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반드시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살던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추구하게 하시며, 내려놓음과 자기 부인으로 십자가에서 내 옛 사람은 죽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하여 반드시 당신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으로, 영화로운 자녀로 만들어 내신다. 내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는 그 해산의 고통을 이 세상 임금으로부터 겪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잉태시키는 그 해산의 고통을 이 세상 임금으로부터 겪어내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들여보내실 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마 10:10).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7).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게 되며 그때 취하여야 할 자세와 역할을 명확히 가르쳐 주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실 때 모든 것을 갖추어 전신 갑주의 무장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빼앗고 맨몸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빈손으로 이리 속에 들여보내셨다. 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고 또한 취하지도 말라고 금이나 은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고, 또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원하는 그 어떤 능력도 기적도 행하지 말라고 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특별히 경고하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오직 복음의 말씀만 선포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양이라 칭하고 세상을 이리라고 칭하시며, 양을 이리 속으로 들여보내시면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명하셨다.

왜 주님은 인간을 죄에 빠뜨린 사단의 상징인 뱀의 지혜를 본 받으라고 하셨을까?

사단이 지혜를 발휘하여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을 타락케 하여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그 영이 죽고, 세상을 향하여서는 그 육이 사는 사단의 종이 된 일이다.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주인 되신 하나님께 향한 절대적인 순종의 자리를 이탈하여 주인의 자리를 꿰차 하나님처럼 되려는 망상으로 죄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은 저주와 죽음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뱀이 지혜를 발휘하여 종의 자리를 이탈하여 주인의 자리를 쟁탈하게 만든 죄의 성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뱀처럼 지혜로워라’ 하신 말씀은 뱀의 지혜를 간파하고, 다시는 그 꼬임에 들어 양의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끝까지 양으로 있어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뱀의 유혹을 물리치는 말씀의 지혜로 뱀의 지혜를 능가하여 하나님이 주신 양의 자리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 “뱀처럼 지혜로워라"라는 말씀이다. 양이 세상 이리 속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무장 해제시켜 맨몸으로 무력한 양으로 보내지는 것은, 한마디로 이리 와 같이 싸우지 말고, 오히려 양으로 있어 이리에게 먹혀 죽임을 당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뱀의 지혜를 능가하여 세상 권세자 사단을 이기는 진리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주님이 바로 그렇게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세상 임금에게 내어주어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여 영생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막 13:9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분명 양이 세상 이리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리에게 잡혀 뜯기고 찢겨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도 믿음의 선지자들이 그 길을 갔으며, 신약에서도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 길을 갔고, 스데반과 바울,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세상 이리에게 잡혀 먹히는 양의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임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막 13: 9).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 11: 36-38).

그러므로 양의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세상 이리에게 당하는 순교를 각오하라는 말씀이 바로 다시는 뱀의 지혜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양의 자리를 지킴으로 뱀의 지혜를 능가하라는 말씀이다. 이리들은 분명히 양들을 공격하여 잡아먹게 되어있다. 그때 이리 와 겨누고 싸워서 이기기 위해 범으로 사자로 변하는 그런 힘과 능력을 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고 말씀 하신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양의 자리를 이탈하여 이리로 사자로 변하기를 꿰하고 있다. 그 유혹으로 우리에게서 천국을 빼앗아 간다. 그 마귀의 지혜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 뱀의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뱀이 어떤 지혜로 우리를 꾀였는지를 알아야 그 지혜로 뱀의 유혹을 물리치고 양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십자가 삶으로 세상의 힘의 원리를 무력하게 함으로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여 보여주는 일이다. 십자가의 삶은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음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순종으로 살아내는 자기 부인의 삶을 말한다. 주님은 이 세상 속으로 오실 때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하셨으며, 그분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천대받고 버려지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한 삶이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채찍으로 맞고 춤 뱉음으로 조롱당하고 옷까지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묵묵히 입을 열지 아니 하셨고, 아무런 반응도 대항도 없이 끝까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자리를 지키심으로 세상의 공격과 살해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고 무력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세상 모두가 기대한 것과 어긋난 삶과 죽음이었다. 세상이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력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 18) 라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는 세상이 죽인 그 예수가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구원을 성취함으로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심판하는 자로 하나님 우편에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어린 양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하늘나라의 원리로 세상을 이기심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셨다. 육신은 비록 세상 임금에게 내어주어도 그분의 본체이신 영원한 생명은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양으로 세상을 이기는 하늘나라의 원리이다.

이와 같이 양으로 십자가의 삶을 충실히 살아 냄으로 세상 힘과 권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무기력한 것임을 증거하며, 그들의 결국은 멸망과 지옥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하늘나라 삶의 원리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성도의 발꿈치를 물어뜯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들의 머리를 부심으로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부활한 자로, 천국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잠시 사는 것뿐이다. 성도는 세상과 맞서서 세상을 경쟁상대로 같이 싸워서 터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그들이 공격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살해를 묵묵히 당함으로 주님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아무런 반항과 아무런 대항이 없이 당하는 것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이 십자가의 원리로 나오기에 세상은 성도를 감당치 못한다고 바울이 말한 것이다.

고전 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갈 6:14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늘날 교회는 양에게 세상에서 머리가 되는 비전을 망상하게 하고 긍정의 힘을 쌓아서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양으로 있지 말고 이리로 사자로 범으로 영웅이 되라고 선동하고 방법과 수단을 다 써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소원성취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양은 영웅으로 변하는 비전을 망상하다가 벼락 끝에 죽음의 직전임에도 깨닫지 못하고 뛰어내려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양의 자리를 이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이다. 양은 오직 목자의 보살핌과 인도하시는 길로 따라 가야만 살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그러므로 다윗은 선한 목자의 인도하심을 영의 계시로 미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시 23: 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주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연단의 ‘막대기’ 가 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양으로 기르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 하시며 결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다윗은 우리에게 미리 격려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양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목자가 인도하시는 대로, 목자가 주시는 대로 순종하기를 기뻐하며, 목자만 의지하고 따르는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복을 쫓고 내 소원과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잠시 사는 자들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바로 여태껏 내게 힘이 되고 가치가 되고 자랑이 되고 소유가 되어 나를 행복케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쌓아올렸던 이 세상의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잘려나가는 세상에 대하여 내 ‘자아’가 죽어져 가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말한다. 그 십자가의 삶은 광야의 생활로 이어지고, 그 광야의 생애에서 세상을 향해 손을 뻗치고 달려갔던 팔 다리가 짤려나가는 고통을 겪게 되며, 세상을 향해 점차적으로 기각되고 부인되고 죽어짐으로 완전히 하나님 주권으로 끌러 가 오직 십자가 지팡이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정착하게 된다.

신 8: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너를 낮추시며너를 주리게 하시며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 집어넣으셔서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낮추시기 위해 시험하시고 주리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로 이끌어 가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며, 하늘에서 내리는 신령한 양식을 먹이시며, 예수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을 마시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신다. 결국 성도는 이 세상과 점점 멀어지고 부인되어갈 때,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향한 소망이 점점 커지고, 그 나라가 점점 더 가까워짐으로 내 안에서 겨자씨로 시작한 천국이 누룩으로 부풀어 오르게 되며, 큰 나무로 자라서 많은 새들이 와서 쉼을 얻게 되는 천국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정착되어 간다.

우리는 광야의 고난과 시험을 통과함으로 억지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여 왔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나의 마음속, 뼛속까지 파고 들어오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되며, 진정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자진하여 추구하게 되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게 되며, 그 순종에서 평강과 자유를 망각하게 되며, 영생을 누리는 한없는 복을 깨닫고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찬양하기를,

시 119:103-105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성도는 목마른 사슴과 같이 그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에 스스로 순종하기를 갈망하게 되며, 아버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수 없는 자로 아버지의 사랑에 말려들어가 그분과 하나를 이루는 연합의 극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진정 목숨을 다하여 아버지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천국’이라는 ‘장소’ 가 목표지점이 아니라,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그 ‘대상’이 있는 ‘관계’로 그분의 나라를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는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과 요구 없이 그분 스스로 원하셔서 목숨을 내어 놓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분도 우리에게 조건 없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주시는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사랑에 말려 들어가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그 순결한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하시며 결코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 그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힘든 상황과 시험 속에서도 아버지에게 향한 그 변치 않는 믿음과 사랑을 원하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에게 향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이다.

롬 8: 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분명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종일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하는 양’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를 강하게 붙으시고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세상이 감당치 못한 자로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내 힘과 내 의지가 아니요, 바로 우리에게 향한 주님의 그 피 끊는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덮어 주시고 굳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라고 진실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