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직 은혜 2019. 6. 19. 20:53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의 고백은 사도신경의 최고봉이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구원하시는 구원 성취의 절정이며 핵심이다. 죄 없고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천하에 나타내어 그분에게는 영광이 되고, 만 백성에게는 더디어 구원이 성취되는 기적적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을 대표하는 독생자 예수에게 전가 시키시고, 그를 저주와 죽음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신명기에서 죄를 범한 자는 나무에 매 달라고 하였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 22-23) 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정함으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함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우리가 바로 그 형벌을 받아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즉 죄에 대한 심판을 자신의 독생자 예수에게 내리시는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확증하셨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사랑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 자신의 실존이며 죽음의 결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도 그와 함께 내 옛 사람 죄인이 십자가에 영원히 못 박혀 죽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자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화로운 아들들로 완성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 29-30). 그분의 형상을 본 받는다는 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낸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ㅁㅁ주님이 이 세상에 나타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형상은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과 자신에게 향한 철저한 부인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죄인들로부터 채찍에 맞는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당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다. 그분은 세상의 불의에 대항하지도 않으시고, 죄인들의 폭력과 조롱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묵묵히 도살장에 끌러 가는 양으로 자신을 이 세상과 죄인들에게 완전히 내어주신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주님은 완전한 패배자로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하늘나라의 원리로 이 세상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이 세상의 심판주로 만물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고 계신다 (요 5:22-23).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동일하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성도에게도 세상에 대하여 죽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낼 것을 요구하신다. 성도는 이 세상이 주는 힘, 가치, 명예, 물질 등으로 자신의 유명과 행복을 좇는 자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옛 사람이 추구하여 왔던 이 세상의 가치와 힘과 지식들을 ‘배설물’ 이라고 부르고, 자기 욕심과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죽은 자들’ 이라고 부르고, 그런 자들을 사단의 노예로 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엡 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체이며,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한 죽은 자들이 끊임없이 배설물의 악들을 토해내는 사망의 지옥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 이었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불의 한 자들을 사망, 즉 죄로 죽어 있는 존재들이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다. 즉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자기 욕심과 자기 소원으로 사는 자를 죄의 종이라 하며 죄를 쌓아서 멸망을 향해 달리고 있기에 ‘본질상 죽은 자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죄와 죽음의 세상에서 건지심을 받은 성도가 있다. 우리의 본체는 창세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엡 2:10) 즉 선택받은 자들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는 더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마음의 원하는 것을” (엡 2:3) 할 수가 없는 자로 정착되어 간다. 이제 더는 나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힘과 성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부인되고, 버려지고, 세상을 향하여 죽어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로 하늘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다. 즉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함과 같다.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라는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나를 못 박은 이 세상은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미 죽은 세상이기에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썩어짐의 세상에서 배출되어 나오는 모든 것을 ‘배설물’ 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고, 자신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은 삶이기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 라고 정확하게 자신을 정립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자신이 죽는 고통과 고난이 연속되기에 바울과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며,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으로 정착되어 간다.

하나님은 제한된 시간과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 공간에 마귀의 세력을 허락하심으로 마귀의 속성을 따라 육체를 따라오는 모든 탐심, 쾌락, 명예, 재물 등 나에게 힘과 복이 되는 가치로 추구하여 왔던 것들은 곧바로 죽음과 지옥으로 직행하는 속임수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 세상 광야의 인생을 통하여 배우게 하시고 체험케 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탕자의 비유로 이 세상은 어떠한 곳이며, 아버지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설명하여 주셨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이 추구하는 쾌락과 행복을 찾아 세상을 쫓아갈 것을 허락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 속에 들어가 몸으로 다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세상이 주는 쾌락과 육신의 만족은 곧바로 자신을 저주와 죽음으로 밀어 넣는 돼지 굴과 같은 지옥이라는 것을 처절히 깨닫게 되며,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바로 돼지와 함께 쥐엄 열매를 다투어 먹는 멸망의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패역함을 허락하심으로 아버지를 떠나 육신의 행복을 좇는 그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추악한가를 몸으로 겪게 하셨다. 결국 자기 힘과 가치로 여겼던 세상 재물을 다 탕진하고 돼지우리 속에서 쥐엄 열매를 다투는 완전한 거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만족이며 행복이라는 은혜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둘째 아들과 같은 우리에게 그 귀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이 지옥과 방불한 세상에 놔두시고, 이 세상이 주는 독을 체험하게 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이 바로 돼지우리의 삶이며, 파산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돼지와 쥐엄열매를 다투는 탕자의 비유로 이 세상을 돼지 굴로 이 세상 사람들을 돼지로 묘사한 것이다. 그 상세한 그림이 바로 귀신들린 광인이 자해하는 모습과 그 광인에게서 나온 군대 귀신들이 2천 마리의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 떼가 저주의 물속에서 몰살당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돼지우리와 같은 지옥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실 메시아가 바로 그들 눈앞에 서서 계심에도 메시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구원자 예수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그 무리들이 바로 귀신 들린 돼지와 방불한 존재이며 그들의 결국은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는 죽음의 심판이라는 것을 그림같이 똑똑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의 신앙고백은, 세상을 쫓아가던 내 옛 사람이 반드시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깨닫는 고백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5). 

 

예수그리스도를 내 신랑으로 맞이하고 오직 그분의 생명력으로 사는 연합은 먼저 나 옛 사람의 십자가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 옛사람 죄인의 몸이 영원히 죽어야 만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영생하는 생명이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옛 죄인이 십자가에 못을 박아 내 ‘자아’가 죽는 죽음이다. 완전히 철저히 죽어야 만이 죄와 상관없는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의인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 새 생명의 잉태는 내 옛 사람 죄인이 반드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을 세상 임금으로부터 겪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으로 그 옛 사람의 철저한 죽음에서 진정한 자신을 예수 안에서 되찾게 된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며 귀한 죽음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이와 같이 예수와 함께 내 옛사람 죄인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내 새 사람은 그분의 의로운 생명으로, 즉 그분의 신부로 부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바로 이제 그분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주님이 이끌고 가시는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을 제시한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물질과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거슬러서 고난의 길로 우리 육신이 원치 않는 삶으로 인도하시며,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한 것 같이 우리의 삶을 거꾸로 돌려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이끌고 가시겠다는 주님의 견고한 주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때문에 세상을 거슬러 사는 그 삶은 예수님이 앞서 가신 골고다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기 부인의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르라’ 라고 성도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는 그 안에 예수의 영인 성령이 계시므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되며, 죄를 멀리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금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기에 바울이 말한 봐와 같이 성도는 죄 가운데 더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이끌고 가시는 길이 바로 복된 길이며 선이며 진리이며 영생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와 타협이 없이 그분이 정해 놓은 복된 길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며, 절대로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추구하는 삶, 즉 멸망의 길로 가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겠다’ 고 주님의 의지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 3:10).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이해한 성도는 그 복음이 깨달아질수록 절대로 자기 옛사람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함부로 살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주’가 되신 그분은 우리 안에 영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끊임없이 말씀으로 깨우쳐 주셔서 ‘그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시며’, 그분의 마음에 합한 거룩한 백성으로 하늘나라 입성의 목적지까지 이끌려 가신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함과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 백성에 합당한 지식을 배우고 훈련받고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 절대적 의존자로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나라이기에 이 세상에서 먼저 육신의 욕심과 탐욕으로 사는 내 ‘옛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그 훈련과 연단의 과정이 나에게는 고통과 고난으로 시험과 시련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들이닥치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로 성장하고 발전하여 완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주와 죄 안에 갇혀 시간을 쌓아서 늙고 썩어져 가는 죽음의 멸망과 지옥으로 종말을 고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진토”, “거름 더미” (삼상 2:8) 라고 부르고, 우리가 바로 그런 ‘거름 더미’, ‘쓰레기’에서 구원을 받았기에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입혀진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행하였느냐’ 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 즉 나는 얼마나 악하고 불가능한 존재이며, 스스로 죄와 죽음의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티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 근거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를 안 짓는 의인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더 변화되고 성화되어 가는 것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 집요하고 끈질긴 악질적인 죄성을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나는 예수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며,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름 더미’의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깨닫고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 열심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주님은 두 부류에 속한 예를 말씀하여 주셨다.

누가복음 11장에서,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는 율법으로 경건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 아주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신의 공로를 감히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다. 남에게 거짓을 행하지 않고, 불법을 행하지도 않고, 바람피우지도 않았고, 십일조를 철저히 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고 당당히 하나님께 도전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1: 11-12). 이 바리새인의 의로운 삶이 또한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극구 주장하는 설교 내용이며 교인들이 극구 지향하는 거룩한 성화의 삶이다. 그런데 그렇게 도덕과 윤리를 갖추어 율법으로 의롭다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또한 오늘날 율법의 거룩함을 주장하는 교회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눅 11:39).

반대로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는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얼굴을 들고 하늘을 향해 자랑스럽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 때문에 감히 눈을 들어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여 모퉁이에서 기도했다. 그가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크게 슬퍼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추악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는가를 깨닫는 자신을 부인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세리는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바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고 오로지 바라는 것은 긍휼과 용서였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1: 13) 라고 애통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밖에 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놓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1:14).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무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하나님에게 향한 감격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며, 나는 이제 예수와 떨어질 수 없는 예수에게 붙어 있어야 만이 살 수 있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데 열심을 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열심과 행위와 노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여 주셨다 (요 6:29). 즉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신 예수그리스도는 어떻게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셨으며, 나는 본래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나는 왜 오직 예수만 의존하여야 살 수 있는가를 깨닫고,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가지는 뿌리가 살아 있을 때만이 생명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는 죽은 가지로 불에 던져지는 ‘없음’ 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기가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의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은 진정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롭게 태어난 나의 새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자이기에 그분이 이끄시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사람으로 탄생하였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완성되는 운명을 가진 자들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성도는 이제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삶을 포기하게 되며,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부인하게 되며,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인생 전체를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나를 이끌고 가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에게 오직 한 가지 ‘순종’ 만을 요구하신 것이다. 성도는 무엇인가를 하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하여 구원과 생명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복’ 된 영생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흙으로 육신을 입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증명되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7-8). 

 

그러므로 처음부터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열심히 ‘지켜 행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왜 육체를 입은 인간은 ‘지킬 수가 없는가?’ 하는 인간의 패역함과 불가능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롬 5:20) 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인데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으로 오히려 죄를 더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너회들의 죄 된 상태가 바로 열린 무덤처럼 죄가 목구 멈까지 차고 넘친 상태이며, 그 열린 무덤에서 쏘다져 나오는 것은 오직 추악하고 썩어빠진 시체 냄새가 나는 죄 뿐이라는 것을 폭로하신 것이다. 즉 모태에서부터 전신에 차 있는 그 죄의 실체를 바라보라는 기능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그 선한 율법으로 범죄를 더하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인간의 가능성을 격발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더라는 것이다. 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제사에 열심을 부리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율법에서 요구하는 항목들을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율법 행위에 대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요 8:41)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율법 행위가 바로 그들의 아비 마귀의 행위이며, 그 마귀의 행위가 바로 죄의 본성인 ‘욕심’이라고 지적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즉 그들이 행하는 율법 행위가 바로 ‘마귀의 욕심을 행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질책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 ‘마귀의 새끼’ 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담은 선하고 거룩한 법이기에 오직 점도 흠도 없는 하나님 자신, 즉 의인되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성취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죄인의 행위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켜 의인이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도전장을 내놓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마귀의 악한 본성, 즉 인간은 얼마나 집요하고 더럽고 추악한가를 깨닫게 하며,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들의 죄 된 행위로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선한 자로 의로운 자로 자칭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공로를 나열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다른 이와 비교하여 우월감을 챙기는데 이용하여 더 추악한, 외식하는 회칠한 무덤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십자가로 패하신 율법을 다시 굳게 세우는 ‘마귀의 자식들을’ 열심히 길러내고 있다. 분명 주님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향하여 ‘마귀의 새끼’ 라고 저주하셨다. 그럼에도 주일성수해라, 십일조 헤라, 건축헌금, 선교, 구제, 충성, 봉사 등 행위의 열심히 교인들을 율법의 행위에 묶어놓고 채찍질하며, 비교와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서 상금과 축복이 주어진다고 거짓 진리를 웨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양을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 가치로 생산하는 삯꾼이요 절도요 강도들이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2). 삯꾼은 바로 양을 자신들의 욕구를 챙기는 이용 가치로 써먹고 사망의 늪으로 끌고 가는 거짓 선지자들로서, 율법의 교훈을 거짓 진리로 미혹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인간의 추악함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폭로하기 위하여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롬5:20)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깨닫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율법으로는 성도의 육적 자아가 완전히 죽고, 성령의 법으로는 영생을 입은 하나님의 참 아들로 탄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