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구절은 간략하지만 아주 깊은 영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성도에게는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과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 이시다. 주님은 심판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2)라고 말씀하셨다. 즉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며, 만물을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말씀이다.
십자가 구원 성취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이 세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에 갇혀있는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함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마 1:21)이다. 즉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들만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며(요 17:6-8),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뜻이며, 그 이루어진 뜻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메시아이시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의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때문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게 되어있으며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13)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 48). 때문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마 11:27),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이ㅇ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옙 1:4) 성도들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자신의 몸으로 온갖 고통과 수모와 핍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시는 피의 대가를 지불하셔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권능으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새 생명으로 잉태시켜 하나로 함몰되는 연합을 이루셨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기”(요일 4:13) 위함이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된 것과 같이 그분 또한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 20) 함과 같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셔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영원한 ‘주’가 되셨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동시에 그분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에게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 주가 되어 만물을 통치하시며 반드시 모든 악을 제거하시는 최후 심판을 진행하신다.
성도는 예수님이 지불하신 십자가 죽음의 대가로 죄에서 완전히 해방 받은 자유인이며, 영원히 무죄 선고를 받아 의인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되어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헤셨으며”(갈 3:13),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롬 5:7) 자들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 구원이 성취되는 순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를 입은 아들이 되었고, 신부가 되어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갈 4:4-7). 아버지께서 독생자의 피와 생명으로 잉태한 우리를 그 누구도 ‘죄인’이라 정죄할 수도 심판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즉 그분은 이제 영원히 우리의 ‘주’가 되셨으며 그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정죄와 심판이 무효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다.이 선포는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됨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이 임하는 복음의 선포이다.즉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천 년 동안 계시하신 십자가의 비밀과 모든 예언과 언약과 약속들을 다 이루셨다는 선포이며,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문의 계명을 다 이루셨다는 선포이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8:3),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7:4),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온전히 이루시는 ‘공의’로,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을 페하시어,율법의 정죄와 심판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완성과 폐함’의 선포이다.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함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지성소의 휘장은 천국의 문을 상징한다.이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그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화평을 이루사,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있게 되는 복음의 선포이다.“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7)이다.십자가의 본질은,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모든 저주와 죄와 죽음이 영원히 없어지는 완성이다.십자가에서 단번에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영원한 제사로”우리를“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0-14)라고 선언하고 있다.그분이 흘린 피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완전하며 영원하시기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롬8: 1-2)이다. 그리하여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이제부터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도 심판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롬 8:16) 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온전케 된 자를 다시 심판할 수가 없는 일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의인’으로 탄생하여 그리스도와 함몰된 신부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신부를 죄인이라 정죄하거나 고소하거나 심판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4-3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말씀하시는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심판’의 대상은 창세전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영원히 온전케 된 성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죄의 속성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며, 이 세상과 진멸하시기로 정해진 마귀의 세력과 마귀에게 종속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진노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종말의 선언이다. 동시에 성도에게는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며 신부 단장으로 재림의 신랑을 맞이하게 되는 영광을 입게 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편애를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고백이다.
‘산 자와 죽은 자’란? 성도는 신랑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심판의 대상과 관련하여 사용된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하여서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시점을 기준으로 살아있는 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해석이며, 또한 육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엡 2:1)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영원히 사는 영적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셨다. ‘없음’을 상징하는 티끌, 가장 비천하고 무 가치한 흙이라는 물질로 만드시고 잠시 육적 목숨만 붙여주셨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다시 티끌로 돌아가는 ‘없음’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저주를 내리셨다. 죽은 시체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배설물과 같은 죄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진토’ ‘거름더미’(삼상2:8), 즉 쓰레기, 짐승, 흙, 티끌로 묘사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척점에 있는 세상에 속한 자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회칠한 무덤, 귀신들린 자, 개, 돼지, 이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죄성을 뼈저리게 파악한 사도바울도 모든 인간은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 3:12-16).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11)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세상은 인간의 타락한 속성을 따라 더욱더 악한 세상으로 문둥병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다. 인간은 자신들의 편리와 안일과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극대로 문명으로 발달시키고 있지만, 동시에 죄의 타락으로 이루다 말할 수 없는 잔인성과 파멸성으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극지에 도달한 타락과 죄악의 결국을 노아 홍수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으로 멸종당함을 보여주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6-8). 인류 멸종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노아 8식구만 구원하시고 선택에서 제외된 모든 인간의 결국이 바로 심판임을 노아 홍수의 사건을 통하여 미리 경고로 보여 주셨다. 즉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은 이 세상과 함께 곧 파멸과 멸망의 심판으로 종결짓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려 오신다”는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제시하여 주심으로 말씀 속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과 철저히 구별되어 있다. 즉 진노의 심판을 맞이하게 되는 이 세상 중에, 창세전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며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자기 백성을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예수님은 오직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영접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7). 이 세상 중에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이기에 당연히 우리를 데리려 오신 신랑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요. 15:16) 이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은 신부 단장으로 신랑과 영원한 결혼을 맞이하게 되는 혼인잔치이다. 신랑이 데리려 오시는 신부는 이미 창세전에 정해져 있었고,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손꼽아 기다리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영원한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는 최고의 축복과 영광의 순간이다. 오직 그들만 전 인생을 재림의 신랑만을 기다리는 소망으로 살아가게 된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2장에서 전 인생 동안 예수님의 초림을 손꼽아 기다라는, 즉 구원자이시며 진정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두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가 등장한다. 시므온은 두 눈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고 평생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아기 예수를 한눈에 알아보고 품에 안을 수 있는 영광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달라‘(눅 2:29-30)고 기도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참 남편이 되어주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리는 안나 선지자이다. 그는 육신의 남편, 즉 율법의 남편을 사별하고, 과부로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과 기도로 ‘은혜’의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안나 이름의 뜻이 바로 ‘은혜’이다. 그는 더디어 그렇게 매일 소망하며 기다리던 아기 예수를 은혜의 남편으로 알아보고 영접한 것이다. 구세주 예수님이 탄생하실때, 이 세상 그 누구도, 매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제사장도 아기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초림도 도적같이 비밀리에 나타나셨기에 오직 두 선지자만 알아본 것이다.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만 나타나시며 그들에게만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과귀를 열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이 세상 죄와 죽음의 절망 속에서 잠시 살고 있지만, 매일을 신랑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소망으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집중하여 그분만 바라보며 온전한 신부 단장으로 깨어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사도신경에서 제시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신부가 된 성도에게는 그 어떠한 위험도 두려움도 될 수가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사도바울은 확신을 주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죽은 자와 산 자” 의 영원한 주가 되시기 위해 당신의 신부를 맞이하시기 위해 오시는 최고의 기쁨과 영광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너무나 벅찬 기쁨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 간의 분리와 심판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영생의 복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과,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던져질 이 세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구별하셨음을 천지창조의 시작에서 읽을 수 있다. 창세전, 아직 빛이 임하기 전에 우주는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 2)으로 뒤 섞여 있었다. 거기에 빛이 임하자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낮과 밤이 분리되며, 육지와 바다가 분리되는 틀과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즉 하늘과 땅을 분리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구별하시고, 낮과 밤을 분리하심으로, 빛에 속한 자와 어둠의 지옥에 속한 자를 구별하실 것임을 계시하셨다.그리하여 인간이 아직 후손도 태어나기 전에 먼저 여자의 후속, 즉 하나님의 자녀와, 뱀의 후손, 즉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을 분리시키시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창3:15). 그리고 빛의 대척점에 있는 어두움은 이제 그 빛에 의해 심판의 과정을 겪게 되며, 결국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하며” 어둠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빛만 있는 "만물을 새롭게 단장한 새 예루살렘(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계 21:1-5)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천지창조에서 빛의 나라와 어둠의 세계를 하늘과 땅의 분리로, 낮과 밤의 분리로 계시하여 주심으로, 장차 빛의 자녀는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게 되고, 어둠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은 어둠의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임을 미리 정하셨음을 보여주셨다.그 선명한 그림이 예수님 십자가 구원 성취의 현장에서 확실한 증거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구원이 성취되는 그 관건적인 순간에, 십자가를 기준으로 왼편 믿지 않는 강도가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을 대표하여 영원한 형벌로 던져지는 것과, 예수를 구원자로 알아보고 자신을 맡기는 성도를 대표한 오른편 강도가 구원받는 두 길로 갈리는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주님은 분명 여러 가지 많은 비유들을 들어서, 특히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에 들어갈 오른편 양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질 왼편 염소는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고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오른편 양으로 불리는 성도를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 받을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라고 창세로부터 성도를 위해 예비 된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왼편 염소를 향하여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2) 라고 그들을 위해 준비된 죄옥 불에 그들이 던져짐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를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로부터 분리하신 종결은 이미 하늘의 묵시에서 결정되고 완성된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갈라내어 분리시키는 능력으로 선포되고 성취된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3)고 확고부동한 선언을 하고 있다.
그리면 사도신경에서 제시한 마지막 ‘심판’을 받을 자들은 어떠한 자들인가를 알게 되면 더 확실한 이해가 될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저희를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심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 속한 믿지 않는 ‘저들’이며, 말씀을 진리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저들’ 율법주의자들이다. 주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드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회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7-33).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심판을 하시지만, 그 진노의 심판은 인간 스스로 쌓는다고 말씀하신다. 즉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는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그 악한 마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고집이란, 자신의 잘못된 것에 대한 뉘우침과 자신이 바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각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없이 망할 때까지 심판의 날까지 끝까지 가는 인간의 패역함을 말한다. 바로 자신의 자존심과 의와 존재가치를 끝까지 주장하려는 교만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없는 자는 구원자가 바로 앞에 있어도, 영생을 준다고 하여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영생을 거절하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의 의와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영생의 주를 거절하는 부자 청년 이야기를 (마 19:16-26) 들려주셨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자존심과 의와 공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영생도 하나님도 거절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않는 유대주의 목이 굳은 고집이다. 오히려 그 고집과 교만으로 구원과 영생의 주를 대적하고 죽이는 살인자로 나아가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배설물’ 과 같은 공로와 업적들을 열심히 쌓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마귀의 행사, 회칠한 무덤, 군대 귀신 들린 광인, 더러운 돼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 독사의 새끼, 외식하는 자라고 저주하시고 비유로 이들의 추악함과 패역함을 폭로하신 것이다. 육에서 나온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무가치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배설물과 같은 것들이며, 인간들이 내어놓는 의는 더러운 누더기(사 64:6) 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심판의 근거를 쌓는 일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여 패역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 자체를 심판하실 것임을 구약 때부터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셨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습 1:15). 이와 같이 무시한 심판을 받게 되는 자들이 바로 자신의 의를 세우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아를 고집하는 교만으로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이며, 진리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마저 죽이는 자들이며, 이들이 바로 영원한 심판에 합당한 독사의 새끼들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니”(롬 1:18) 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세례 요한은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회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히라 하더냐”(마 3:7)라고 하나님의 진노를 외친 것이다.
그와 반면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7절)고 약속하신다. 즉 ‘참고 선을 행하는 자’는 창세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다. 이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으며, 오직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따르며,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가 되심을 영광으로, 바울과 같이 십자가 구원만을 믿고 자랑하는 것을 존귀로, 그분이 입혀주시는 은혜의 복음만이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복과 영생임을 굳게 믿으며,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환난과 곤고와 시험을 당하여도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며, 이들이 바로 매일 그리스도의 임재를 소망하는 ‘선을 행하는 자들’이며, 오직 이들에게만 영생이 임한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높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숭배와 영광을 얻어내기 위한 자아 건설과 자아 확장과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자는 세력을 확장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마귀와 한 몸이 된 자들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같이 쏟아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거부하셔서 진노의 심판으로 종결짓기를 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8). 이와 같이 마지막 때의 심판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세상 종말에서 끄집어내어 당신의 나라로 들어 올리는 편 가름의 분리이다.
부활과 예수님의 재림
부활은 우리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들뿐 아니라 심지어 불신자들도 부활한다는 사실이다.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라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신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부활하여 영생을 살지만, 악인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으며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산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이는 최종 심판이기에 그 날 이후로는 다시는 변경할 수 없는 영원한 두 부활로 분리가 된다고 주님은 확실하게 선포하신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 말씀이 바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는 사도신경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이 세상 티끌로 만들어진 모든 인간은 마지막 심판에서 두 길의 편 가름으로 종결을 고하는 확실한 선언이다.
예수님 재림의 날에는, 주님 재림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또 그때까지 살아 있는 매일을 재림의 신랑을 기다리는 깨어있는 성도들이 그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함께 신부 단장으로 공중에서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가장 찬란한 순간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이는 모든 감추어져 있었던 것들이 백일하에 만 천하에 드러나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자나 지금 살아있는 자나 재림의 날은 시간 공백이 없는 한날한시 순식간의 사건으로 모두에게 동시에 일어나지만,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영원히 분리된 운명으로 갈리는 순간이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학수고대한 하늘나라 소망이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신부 단장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는 영원한 축복이다. 그 긴 역사 동안 이 땅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뜻, 즉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다. 태초부터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여 주신 완전히 새로 단장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순간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거기에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 이러라"(계 21:4 )라고 미리 그 나라를 소망으로 신랑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성도에게 확신의 계시를 주시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정하신 이 세상과 이미 마귀와 한 몸으로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곧바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이다” 즉 그분의 재림은 이 세상 자체를 종결짓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배제한 이 세상과 사단과 그에게 종속된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심판으로 종결하기 위함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은 파멸될 것이다”(벧후 3:10-13; 히 1:10-12)라고 미리 제시하여 주셨다. 구약에서도 이사야를 통하여 이 세상 종말에 행할 심판을 미리 제시하셨다 “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 당하게 하셨은즉 그 살륙 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사 34:2-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5)이다.
사도 요한과 바울은 마지막 때 당하게 되는 심판과 그 대상에 대하여 확실히 가르쳐주고 있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3-15).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 9).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이 세상 마귀에 속한 악한 자들은 이 세상 멸망과 함께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너무나 상세하게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토록 심판은 모든 것이 종결되는 최대의 사건이다. 그 심판을 통해서 이 세상은 종말로, 성도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더디어 현실로 다가오는 영광과 축복의 순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최후에 심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어느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단정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 말씀과 재림에 관하여 주신 여러 가지 비유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마지막 심판을 이해할 것인가를 충분히 배우고 깨달으며, 매일을 신랑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로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어라 그 날은 도적같이 오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항상 미래 지향적인 동시에 종말론적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의 본향은 정해져 있고, 아버지의‘아들’로 그리스도의‘신부’로서 미래 준비된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신랑의 재림을 소망하며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이 땅의 존재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죽음과 지옥’이라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은 개개인에 향한 종말과 인류 전체 즉 세상을 심판하시는 종말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진지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다시 이 세상에 심판으로 오실 때 그 징조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물으셨다. 주님은 제자들이 묻는 마지막 심판 때의 징조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24: 4-13).
첫째로, 적그리스도와 가짜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거짓 복음으로 교회 안에서 공공 연연하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고 또한 적극 용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구약시대에서도,예수님 때에도,사도 시대 때에도 일어난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들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셨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신13: 1-5).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따르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죽이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이적과 기사는 나의 관심과 나의 욕구 충족과 야망과 나의 이름을 떨치는 방패가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아니며, 그들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훈련에 악역으로 쓰임을 받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거짓 선지자와 같은 가라지를 심어놓고 모든 가증한 것들과 외식하는 것들의 추악한 죄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금같이 연단하고 계신다. 그래서 요한은 말하기를,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4:1). 이와 같이 사도들은 수시로 우리에게 적그리스도와 가짜 선지자에 대한 경고를 주셨다. 그리고 이천여 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이들의 미혹으로 혼란과 시련을 겪어왔다.이들로 인해 종교전쟁과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수많은 이단 종교 파들이 생겨났다.
둘째로, 주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일과 끝없는 기근과 지진 같은 재난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막13:7-10).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나라와 나라와의 전쟁과 분열, 끝없는 자연의 재앙, 그러한 세상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핍박과 고난 속에 던져 짐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회에 넘겨 감옥에 갇히고, 온갖 고문으로 심한 고통과 고난과 핍박과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5-38).
하지만 그러한 극심한 환란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목숨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할 것을 사명으로 주셨다. 땅 끝까지 선택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다 돌아올 때, 그때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이다. 사도행전이 바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책이다. 땅 끝까지의 복음 전파는 사도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고 지금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주님의 이 명령을 따라 제자들과 사도들이 극심한 핍박과 순교를 당하게 됨으로 그들의 피를 타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통로를 열어 놓으셨다.
세 번째로, 마지막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히 정해진 시간과 표적 같은 기사들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늘상 일어나는 일들을 장차 일어날 징조로 주시면서 잘 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무엇인가 눈에 뚜렷하게 보이거나 정해진 시간에 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징조가 아니다. 우리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몇 날, 몇 시로 정해진 장소에서 일어나는 표적을 징조로 잘못 인식하고 있기에 종말론적 예언자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상을 징조로 말씀해 주시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밤에 도적같이 오심”으로 말씀신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5:1-3). 주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자신도 그 때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24: 35-38).
주님은 자신의 심판의 재림을 ‘밤에 도적같이 오신다’라고 표현하셨다. 그 말씀은 성도는 어느 한 날을 주님의 재림의 날로 정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매일을 재림의 주님을 영접하는 자세로, 매일을 죄에 대한 심판의 날로, 매일을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의의 날로, 항상 깨어 있어 주님과 동행하는 경각성으로 살아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그 어떤 뜻밖의 표적이나 이적이나 특별한 기사들을 징조로 주신 것이 아니라, 늘상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매일을 징조로 주셨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 38-39)라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상에서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신다.
비록 그 시와 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심판 때를 맞이하는 성도가 취할 자세와 어떻게 들림을 받는가에 대하여서는 상세히 알려주시고 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24: 40-42).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그 날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종교적 행위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하지 아니 하셨고, 그렇게 열심히 종교행위를 할 때 주님이 오셔서 데려가신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들림을 받는 자나 벼려둠을 당하는 자나 똑같이 주어진 일상에서, 똑같은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창세전 택함을 받은 당신의 자녀는 들림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자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라는 말은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자식을 돌보며 일터에서 맡겨진 일상을 내팽개치고 무조건 교회 행사를 하나님 일로 정해 놓고 열실을 부리는 그런 종교 행위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 성도는 매일을 충실히 사는 일터에서 들림을 받는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똑같이 밭을 갈고 혹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택함을 받은 자는 데려가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에 버려둔다는 것이다. 특별하게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는 그런 ‘성스러운’ 장소와 행위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먹고사는 일상생활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은 도적같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성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에서 매일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라는 뜻이다.
일상은 하나님이 주신 의무와 책임이 부여되는 소중한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상에 집어넣으시고 그 일상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녀로 빚어 가신다. 성도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수업을 배우고 깨달아 가며, 경험하고 체험하며, 그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똑같이 주어진 일상이지만 성도에게는 목적과 의도와 소망이 뚜렷이 정해져 있으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배움의 교육 터이며, 자신을 정금같이 연단하는 소중한 시험장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천국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의도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일상을 사는 자들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일상은 자신들의 야망과 행복을 쟁취하는 목적과 수단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오직 자신들의 안일과 명예와 이름만을 추구하며, 자기 존재 확장과 자아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약한 자를 짓밟고 약탈하며 서로 죽이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하지만 성도에게 그 일상은 오히려 자신의 야망과 이 세상 것들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추구하며, 그 뜻에 순종함을 배우며, 이 땅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됨으로 오직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신랑이신 주님의 재림만을 소망하는 깨어있는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깨어있는 일생생활이란,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이든 하나님이 심겨놓은 그 자리에서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 일상에서 주님이 찾아와 주시고, 들림을 받게 하신다. 무엇인가 열심히 종교행위를 할 때 들림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일상의 삶은 힘겹고 고통스럽다. 이 땅에서 육으로 사는 삶 자체가 바로 지옥 같은 삶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삶 자체가 바로 지옥임을 체험하게 됨으로 매일을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는 자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도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자로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이다. 그 연합은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생이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으로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사는 성도는 비록 ‘종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온갖 환난과 곤고와 시험과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혹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무소유로 천대 꾸러기로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겪는 일이며, 성도의 믿음과 성장에 필수적이며 유익한 일이기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성도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게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감격이 터져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성도는 천국의 백성으로 잠시 이 세상을 연단과 훈련의 장소로 살아가며, 선한 싸움을 다하는 그날에 신랑 되신 우리 주님이 친히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영접하여 영원한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