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진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 옵나이다

오직 은혜 2019. 6. 19. 20:16
 

부활은 예수님은 참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진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시며, 그분의 구원은 참 되시며, 진심으로 생명의 근원이시며, 진리 이심을 전적으로 인증하신 증거이다. 그분은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로 일치된 메시아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뿌리이다.

부활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생명을 말하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인 영원히 사는 생명체를 말한다. 때문에 영생은 지상에서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며,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다. 즉 영생은 오직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이며 본질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생명인 영생을 주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최종의 목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여 영원히 함께 하나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믿는 성도만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 옵니다” 라고 확실한 고백을 할 수가 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여타의 모든 종교들은 죽음으로 종말을 고하지만, 오직 기독교만은 죽음에서 부활의 영생으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의 기초와 핵심이다.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도, 사도행전에도, 서신서에도 선포되는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 바로 예수의 부활과 영생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고전 15:20)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쳐온 것은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는 부활신앙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요 부활이요 진리이다’ 는 선포가 2천여 년 동안 기독교가 전해온 복음의 핵심 이었다. 비록 그동안 쉴 새 없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론들로 기절설, 도난설, 환상설, 등으로 오해와 의심을 받아왔지만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진리가 되었고, 기독교는 이 부활신앙에 의해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바울이 부활의 중요성을 강요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만약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나의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4) 라고 지적한 대로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이미 부활한 성도로 영생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 우리에게 입혀주실 생명과 영생의 복을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에덴동산과 선악과나무를 설명용 교재로 등장시키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를 주셨다. 하나님은 선악과 나무에 ‘먹지 말라’는 언약으로 첫 인간에게 하나님에게 향한 순종을 요구하셨다. 모든 피조물은 반드시 창조주에게 순종이라는 매개체로 생명의 관계를 맺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으로 있을 때 만이 인간은 비로소 가장 의로운 상태로 영원히 사는 복을 입게 된다는 것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순종’ 이라는 한 계명을 주셨다. 하지만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 티끌의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창조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주장하려는 망상으로 결국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한 몸이 되어 함께 죽음이라는 지옥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은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아담은 죄가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것이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마귀에게 종속되어 이 세상에서 유리하는 노예가 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티끌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 의존자로 있을 때 만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고 깨달으라고 마귀를 들어서 인간을 유혹할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떠나서는 저주와 죽음이며 지옥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죄와 죽음이라는 악을 소품으로 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는 ‘먹지 말라’고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은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 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의 결국은 사망과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선악과 나무는,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만이, 하나님 절대적 의존자로 있어야 만이,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 잠시 등장한 모형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을 때 인간은 저주와 사망의 지옥에 던져지는 티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교보재이다. 그리하여 창세기 시작에서 죄와 죽음을 상징하여 등장한 선악과 나무는 계시록에 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태초로부터 하나님 나라에는 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선악과 나무 자체가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한 생명나무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가시적으로 소품으로 등장한 모형이다. 때문에 계시록에서 오직 생명나무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나무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생명의 주관자 이시며 영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 어떠한 것으로도 예수그리스도 외에 구원과 영생은 얻을 수가 없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만세전에 택한 자기 백성에게 무상으로 선물로 주시기로 작정하신 생명이다. 

 

값없이 준다는 말은, 이 세상 그 어떤 값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그 어떠한 노력과 대가로도 소유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주기로 작정하신 하늘나라의 생명이다. 너무나 소중한 생명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 주기로 작정한 자기 백성에게만 사랑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며, 선택된 자는 그 생명을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값을 길이 없다. 그 생명은 하늘나라의 생명이기에 하나님은 오직 은혜를 입은 자신의 자녀에게만 값 없이 줌으로 우리에게 향한 의로움과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정확하게 은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 그 어떤 값으로도 또한 죄인의 그 어떤 행위와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이 죄악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오직 하늘나라에서 내려주시는 흠도 점도 없는 의로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행실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 뿐이기에 인간 쪽의 그 어떤 것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그 생명을 받기에 합당한 순종만을 원하신다. 그 순종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즉 자신이 티끌에 불과한 죽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함으로 철저한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갈 때 그 비워진 본래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 그분이 진정 나의 아버지가 되어 나의 전 인생을 주관하시며 간섭하시는 모든 일에 순종할 때 그 상태가 바로 의의 상태이며 복된 상태이다. 

 

그분은 내 속에 있는 옛사람의 죄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영원히 못 박아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와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새 창조를 일으키신다. 그래서 그분은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모든 삶을 간섭하시고 통치하시며, 그 삶의 전체 과정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부인의 삶으로 끌고 가신다. 세상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죽음, 하나님에게 향한 온전한 순종을 의롭다 하며, 그 상태를 연합이라 하며 영생과 사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창세전 자신이 택한 백성만 사랑하시고 그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의의 생명을 내 놓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선택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 만이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흙에 불과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인간과 동물을 흙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티끌 같은 동물과 방불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택한 자만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전 인류에서 노아와 그의 식구 8사람만 구원하시고 세상과 온 인류는 물로 멸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성에서도 아브라함의 기도로 룻만 구원하시고 불로 모든 죄인을 그 성들과 함께 멸하셨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사 17:13).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사 40: 15-17).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시 113:7 / 삼상 2:8).

이와 같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거대한 열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흙, 거름 데미에 불과하다. 그 말은 생명은 하나님의 속한이기에 생기를 주면 사는 존재이고 생기를 걷어 가시면 죽은 흙, 거름 데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흙의 존재에서 하나님은 일부를 택하여 자신의 생명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나머지는 그냥 소품으로 쓰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교훈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을 ‘죽은자’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선택을 받아 죽음에서 살리심을 받은 것이 은혜이며, 축복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없거니와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버리는 악한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은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까지 죽이는 인간의 극악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 13:14). 생명 나무되신 예수님이 영생을 품고 오셨는데 그분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알아 듣는자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신을 화염검으로 숨기시고 막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와 눈은 하나님이 막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선택 외의 모든 자들은 티끌이기에 그들에게는 죽음이 정해져 있고 그들에게는 생명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내 말을 전하라고 하시고, 듣는 자의 귀와 눈을 막게 함으로 못 알아듣게 하신다고 하셨다. 즉 티끌 같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또한 알아 들을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사 6:9-11).

이와 같이 하나님의 비밀은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기 백성들에게만 나타나 보여주고 듣고 깨닫게 하신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자신을 숨기시는 사건이 여러 번 반복하여 나온다. 그분이 자신을 철저히 숨기셨다는 것은 그분은 오직 이 세상 속에 숨겨진 자기 백성만을 위해 오셨다는 증거이다. 화염검으로 둘려있는 생명나무이신 그분은 세상에 드러내어지는 분이 아니라 세상에 감추어져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밭에 숨겨진 보화로 비유하신 것이다 (마 13:44-46).

그러므로 영생은 영원전부터 선택된 백성에게만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1: 2). 그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생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다. 선물은 주는 분의 선택이며 받은 자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다. 그분의 선택을 받은 자는 감격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너무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그분에게 향한 사랑이 격발되어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이끌려 가게 되며, 결코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 

 

그분이 죄인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당할 수가 없이 위대하기에 은혜를 입은 자는 내 자랑이든가 내 의를 내 세울 수가 없다. 어차피 나는 죽은 지옥에 떨어져야 할 존재인데 그분의 은혜로 그 지옥에서 건지심을 받았기에 그 은혜를 깨달은 자는 ‘나’라는 존재 가치를 내 세울 수가 없게 된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죽든지 살든지 오직 내 안에서 존귀하신 예수님만 나타내기를 원하게 된다. 이 은혜를 아는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내게 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0-21).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는 모든 것을 성령의 계시로 가르치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감추어진 비밀로 남겨둠으로 선택에서 제외된 자는 예수를 알지 못함으로 영원한 지옥에 던져진다. 이것이 천국의 은밀성이며 주님이 비밀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을 세상에 향하여 철저히 감추신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전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는 보이고 만져지고 소유하게 됨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에서 주님은 친히 12 제자만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이는 영생이신 주님은 오직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만 부르시고 믿게 하신다는 증거이다. 주님이 택한 제자들은 그 어떤 자격도 조건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창세한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을 받았고, 생명이 임하였고, 영생이신 예수를 소유한 자로 증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게 은과 금(세상 소유)은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생명)를 준다는 당당한 고백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은혜란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이 친히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생명을 주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절대로 자신을 내 세울 수도 교만할 수도 자고 할 수도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될 수가 없게 된다.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기에 순종의 삶으로 그분의 지체가 되어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자로 지어져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요한이 주님을 말씀이라고 부르신 것은, 말씀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계시가 없이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생명의 진리로 풀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알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그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생명을 소유할 수도 없게 된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도전서 2:6-7). 

 

이와 같이 말씀되신 예수는 이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복음은 영세 전부터 세상과 차단되어있기에 세상은 예수를 알 수도 또 하 믿을 수도 없으며, 오히려 세상은 생명의 말씀을 배척하게 되고 죽여 버리게 된 것이다.

성도는 우리 안에 계시는 말씀과 교통하기에 세상과 고립되고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님은 성도는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얻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천국이네 마음이 이미 임하여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 24). 

 

성도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영생을 누리는 자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육은 이 죄악된 세상을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은 매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서 성령의 내주로 주님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영생이신 주님이 영으로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그분이 계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며 그분과 함께 있는 그 상태가 바로 영생을 사는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멘

아멘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위에 고백한 모든 것이 사실이며 진리이며 나의 신앙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믿을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으로 살아가겠다는 약속의 다짐이다. 성도는 그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게 된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죄악 속에 우리를 잠시 집어넣으심으로 우리는 본래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사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배우고 깨닫게 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도말하셔서 당신의 나라로 이끌고 가시기 위해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직접 계획하시고 간섭하신다. 

 

우리는 구원 받기전 이 세상을 나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 이 세상이 주는 힘, 세력, 재물, 명예, 지식 등을 믿어왔다. 돌이켜 내가 믿어왔던 이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자기 부인, 즉 세상에 향해 죽는 십자가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도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라는 신앙인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는 더는 ‘나’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자가 된 것이다. 성도가 하는 일은 오직 나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주시는 그분을 아는 일과 내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6:3) 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며,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구원받은 성도는 어떠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가를 아는 일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비록 구약시대 사건을 경험한 적이 없지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겪어온 사건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야곱의 허막한 인생에서 내 죄의 근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며, 모세의 출애굽기와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내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며,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삶에서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종의 의무와 순종을 배우게 된다. 성경은 끝없이 우리 인간의 조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일관성 있게 점진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하고 있다. 성도는 성령의 계시로 구약에 들어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 나의 옛 사람을 바라보게 되며, 길이 참으시고 인내와 자비로 그런 죄인을 끝까지 은혜로 덮어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끈질긴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신약에서 비록 나는 2천 년 전 십자가의 사건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함께 동참하였음을 믿음으로 실상으로 내 안에서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된다. 즉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현재 나와 함께 영원을 살고 있는 실상을 매일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어서 나에게 영원으로 지속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생활이다. 즉 성도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여 동시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창세전 예수 안에서 영원속에 있었다고 하고 장차 그 나라에 우리는 이미 와 있다고 말하고 또 이루어 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신다고 바울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회 구원을 이루라 너회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회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너회는 나와 같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 묶어 사는 노예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사를 살고 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아무리 힘들고 고난을 겪더라도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훈련과 양육의 과정을 시간과 공간으로 정해진 이 역사 속에서 받고 있을 뿐이다. 

 

영원을 사는 성도는 멸망으로 썩어져 가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는 그 삶이 고통스럽고 시련과 고난으로 넘어지기도 학고 실패하기도 한다. 내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만 내 육은 이 세상을 향해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의 깨우침과 골수와 모든 것을 관찰하고 질러 쪼개는 말씀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 주어진 것이며, 날마다 말씀으로 새로워지며, 날마다 예수 생명이 나에게 채워져가며, 날마다 영생을 사는 자로 지어져 간다. 그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입혀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이기에 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라고 말씀하여 주셨고,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요 1:18) 라고 말씀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내는 생명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영이요 생명”인 말씀이 우리 생활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내 삶 속에서 예수 생명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 우리가 고백하고 추구하게 되는 신앙생활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뚫고 들어오셔서 매일 나를 새롭게 창조하여 주시는 말씀을 부어주심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향하여 사는 자로 다시 탄생시키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가고 체험하여 가며, 내 마음에 완전히 그분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내 마음과 뜻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는 참다운 신앙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하셨고,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자는 영생을 가졌다 (요6:52-56)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