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진의

로마서 (2:13)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그 ‘행함’은 무엇인가?

오직 은혜 2023. 1. 2. 01:44
 
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행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롬 2:13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 바울이 말하는 율법적 행함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율법주의자들의 율법적 행위를 본받지 말라' (마 23:3)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율법적 행함이 바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요10:10) 절도요 강도요 삯꾼의 악행이며, 마귀의 자식이며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이 제시하는 진리는 저버리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며 영혼을 죽이는 숨 막히는 외형적인 세부 규칙들과 유전들을 지키면서 율법을 행한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의를 내세워 사람들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아 영광과 기득권을 얻는 방패로 삼았으며, 자기들끼리 서로 법에 묶어놓고 위선과 거짓 의와 교만을 자극하는 종교 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법마저 자신들의 의를 세우는 방패로 삼고, 자신들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였으며,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율법으로 예수님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독사의 새끼’들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 질하는’ 좀 먹는 벌레이며, 으뜸이 되고자 ‘세상과 간음하는’ 간음자들이며, 군대 귀신들린 광인과 같이 쇠사슬로 묶여놔도 감당이 안 되는 목이 굳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마태복음 23장에서 철저하게 폭로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어떻게 피하겠느냐”(마 23:33) 라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귀의 자식이며 살인자임(요 8:44)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는 그 율법 ‘행함’은 절대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유대 율법주의 자들이 행하는 외식적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그 의롭게 되는 행함은, 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바울이 모든 서신에서 제시한 복음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뿐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적 행함이라는 인간 주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체하시는 믿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선물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웹 2:8-9). 

그리면 바울은 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이라고 모든 서신에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음에도, 여기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는 행함이 마치 율법을 열심히 지켜 행하여 의롭게 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바울은 반복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갈 2:16). 바울은 확실하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으며, 그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이기에 구원과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라고 말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율법의 행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이며, 이는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에서 제시하는 복음의 핵심과 완전히 일치한 것이다. 

둘째,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9).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행함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임을 바울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 안에는 내 옛사람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것으로 잉태하는 거듭남을 포함하고 있다.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라 부르고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영원한 주인으로 믿고 순종하며 하나로 동행하는 삶이 시작되어 우리를 결코 율법의 완성자로 의롭다 칭하여 주심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믿음을 율법의 행함으로 말씀한 것이다. 이르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셋째,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분은 오직 점도 흠도 없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이 세상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은 타락한 마귀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선한 법을 행할 수도, 더더욱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나도 없다. 이르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와 같이 바울은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율법적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신 분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율법의 완성자로 이 땅에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문의 계명을 다 이루어 주셨다.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율법을 상징하는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 즉 죄인에게 쏟아지는 심판의 쓴잔을 마심으로, 율법의 정죄와 저주와 심판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다(갈 3:13). 그리하여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으로 율법의 완성을 선포하셨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 7:4),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이루시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 6-7). 그렇게 율법 아래 있던 내 옛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 받아(갈 3:13) 다시는 심판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 됨으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 14)라고 구원에 이르는 행함이란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뿐임을 제시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성도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며,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자이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십자가 피의 공로를 입었기에 율법을 지켜 행한 자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성도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행함은, 율법을 주신 의도와 일치하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추악하고 더럽고 불가능한 죄인의 실체를 인정하며, 죄를 사하여 주시고 도말하여 주신 십자가 피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붙드는 믿음뿐이며, 이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복음의 핵심과 일치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지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모든 죄의 문제를 단 한 번에 해결해 주시고 사하여 주신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때문에 죄인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행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진의를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분명 성경은 “이 세상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라고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죄인에게서 나오는 열심과 노력과 의지로 율법을 지켜 의인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도전하여 자신을 의인으로 위장한다면 어찌 그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너희는 그 율법에 근거하여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다’고 말씀한 것이다(롬 2:12). 왜냐하면 율법은 ‘죄와 죽음의 법’(롬 8:2), 즉 율법을 지킬 수 없음으로 죄인으로 판단되고 정죄되어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며 이것이 곧 율법의 역할과 기능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으라는 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 25).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고후 3:6 현대인 성경). 즉 율법은 죄인의 죄를 폭로하여 죄인으로 판단되어 죽음이 선포되는 심판의 법이라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율법으로는 옛사람 죄인이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나 영생을 얻는 것이다. 

(2). 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행하는 행함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아주 분명하게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오직 믿음, 즉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믿음으로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과 은혜임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다.

율법을 주신 것은, 그 법으로 탐심으로 가득 찬 인간의 죄의 실체를 철저히 깨닫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만을 붙들고 믿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고,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기 위한 선한 의도로 주신 것이지, 탐심으로 먹어서, 즉 지켜 행하여 자신을 세워 하나님 행세를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주신 신명기 율법 조항은 인간이 절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상세한 세목으로 613가지 조항을 주심으로 인간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하셨다. 율법 전체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여 심판 아래 있게 하는 역할로 주신 것이라고 바울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가 없다면 율법으로도 양심의 법으로도 심판을 당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는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라는 그 행함은 유대인들이 행하는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멸망을 자초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대로 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잉태되어 새 마음으로 성령의 주도하에서 행하게 되는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서만 나오는 그 행함을 가리키며 그 행함은 내가 죽고 하나님의 의만을 추구하는 새 마음으로 행하는 영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우리의 옛사람을 거두어 가시고 우리 안에 새 영인 성령을 부어주심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에스겔 36: 26, 31-32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1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 영, 즉 성령을 부어주시면, 육신으로 살던 옛 사람의 자아가 점차 제거되고 하나님을 향한 부드러운 새 마음으로 바뀌어 주심으로 자신들의 악한 죄악들을 돌이켜 보고 그 죄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며 한탄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애통이 터지 나오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성령이 부어지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며”(요 16: 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 24)라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친히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진리로 만드심을 제시하셨다. 율법으로는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나, 성령은 생명의 법이기에 죄인에게 임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됨을 바울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즉 내 옛사람 죄인이 완전히 죽고 새 생명이 탄생되는 생명의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성령을 ‘생명의 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고 정확하게 율법을 인간에게 주신 그 의도를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 율법이 계시하고 제시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한 뜻과 의도는 전혀 무시하고 지켜 행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갈취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행세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율법에 목숨을 걸고 열심을 내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외식을 폭로하고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고한 것이다(마 23:3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앞에서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행함’은,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세우는 유대주의 율법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율법을 통하여 마귀의 탐심과 욕망과 죄의 습성과 악한 성품과 교만한 고집들로 가득 찬 패역한 내 ‘자아’의 실체를 철저히 인식하고 인정하며,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는 자신의 처음 자리에 대한 자각을 말한다. 성령님은 먼저 나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게 하시며, 나의 존재가치가 바로 ‘없음의 티끌’임을 인식시켜 주신다. 그렇게 티끌의 존재가치를 알고 깨닫는 자만이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며,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눅 9:23)라고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신 것이다. 

십자가는 한번 지고 한번 죽는 것인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날마다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이 세상의 것들이 성령의 검으로 잘려나가는 세상을 향해 죽어가는 자기 부인을 매일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친히 들어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는”(히 4:12, 새 번역) 선한 일들을 하셔서, 나를 신으로 삼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 자신을 채우시는 영적 전쟁을 일으키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결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죽음임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내 옛사람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영원히 죽어야 만이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서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0-21).

바울은 성도에게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내 안에 쌓여있는 이 세상 오물들이 끊어져 나가는 세상을 향해 죽어가는 십자가 죽음의 삶을 매일 체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죽음과 날마다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고전 9:27), 즉 내 옛사람이 철저히 부인되는 십자가 죽음의 삶을 매일 겪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제시한 것이다. 철저한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이 바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고전 15:42-44) 영생을 얻기 위한 삶임을 말해 주고 있다.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은 이 세상에서는 미련하고 나약하고 무력하고 무능한 자로 보이며, 또한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핍박과 징계를 당하는 자 같으나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는 능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요, 세상에서는 절망이지만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자요, 평강과 기쁨이 충만한 자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잃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이지만 영생의 복을 받은 천국의 백성임을 당당하게 자랑하며, 우리에게 자신이 살아온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본받으라고 권면해 주고 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도는 성령님의 인도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이 세상에서 먼저 살아내게 됨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과 생명을 얻은 성도는 그 은혜가 너무나 압도적이기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되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종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거기에서 진짜 주님의 사랑이 나오고, 진짜 주님의 용서가 나오고, 진짜 다른 이를 품는 주님의 섬김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는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이며,’ 도저히 불가능한 존재이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벌레와 같은 존재이며, 없음의 존재였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게 된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시고 종의 삶을 살아내셨는데 종보다 더 비천한 패역한 죄인인 나가 어찌 종의 삶을 거부할 수가 있겠으며, 어찌 은혜 앞에서 교만할 수가 있겠으며, 용서받은 자가 어찌 다른 이를 정죄할 수가 있겠으며, 벌레보다도 천한 자가 어찌 다른 이의 상위자로 자신을 높일 수가 있겠으며,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주시는 신랑 예수와 함께 있는 자가 어찌 잠시 육체로 받는 고난을 거절하며 두려워할 수가 있겠는가!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 그가 받은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자신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복음을 위해 순교한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가 날마다 행하게 되는 진정한 행함은 바로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 삶이며, 그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성도의 진정한 율법의 행함이다.

(3). 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행하는 그 행함은 예수님이 제시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 애(自愛)’와 이기주의 ‘자아’에서 벗어나는 한 계명을 주셨는데, 어떤 새로운 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 즉 율법 전체가 제시하는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율법의 총 강령이 바로 사랑임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 34-35).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사도 바울도 계명의 정체가 바로 사랑이라고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 행함은 바로 예수님이 주신 계명과 바울 자신이 강조하는 율법의 완성과 일치하게 ‘사랑’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성취하셨으며 사랑으로 영생을 입혀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본질이며 사랑으로 모든 율법을 이루어 주셨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라고 바울은 사랑을 율법의 마침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유일하게 맺게 되는 열매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따라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주어 사랑으로 구원에 이르는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음 전파이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지상명령으로 주셨다. 그리고 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따라, ‘이웃사랑’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라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줌으로 오직 사랑으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됨을 제시한 것이다. 즉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이타(利他) 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지향성을 제시한다. 

인간은 오로지 ‘나’라는 존재만을 사랑하며, 나의 존재성과 나의 가치와 나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 사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렇게 오로지 나의 목적과 나의 확장과 나의 성공을 위해 살던 ‘나’라는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입혀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이 존재가 되고 생명이 입혀짐으로 나에게 향한 사랑을 하나님에게 향한 사랑으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주는 이웃사랑으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에 이르는 하늘나라 삶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하나 됨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른 이웃에게 흘려주는 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됨을 제시하여 제자들과 우리에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명하여 주셨다. 즉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여 주셔서 십자가에서 쏟아내신 그 피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주라는 말씀이며 이는 반드시 행하게 되는 실천 강령이기에 “내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됨으로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라고 율법의 행함과 완성이 바로 주님이 제시한 “사랑”의 계명임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이 곧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실천 강령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이며,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성품을 추구하는 자로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다른 이의 부족함과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고 참아주며, 믿어주고 바라며, 견디어 내고 온유하며,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비와 희생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 땅에서 드러내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을 추구하는 율법 행함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주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풍성히 받는 성도들에게만 흘러나와 이웃에게 흘러 들어가는 샘물 같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소유적 조건적 사랑이 아니며 우리의 자발적 의지로 노력하여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생명의 뿌리이신 참 포도나무에 굳게 붙어 있음으로 공급받는 사랑이며, 반드시 이웃 가지에게 흘러들어가 지속적으로 생명이 잉태되는 열매를 맺게 됨으로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너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내 안에 거하여야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사랑하라고 ‘사랑’을 율법의 완성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만 적용이 되며,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 많은 생명의 과실을 맺게 하신다. 때문에 사랑 역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주시는 가장 고귀한 특별한 구별된 선물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적 행함은 바로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여 율법의 완성자로 빚어가는 성도의 지향성을 말한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기에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자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늘나라 삶의 원리이며 성도가 이 땅에서 지향하며 살게 되는 실천 강령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라고 계명의 정체가 바로 사랑이라고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는 그 행함은 바리새인들이 행하는 행함, 즉 율법이 제시하는 총 강령인 “사랑”의 본질을 빼먹고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세목들을 지키겠다고 열심을 부리는 오만한 고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입혀주신 사랑의 행함이며 그 행함은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기에 바울은 사랑의 성품을 성령의 열매로 제시한 것이다(갈 5:22-23). 

성령의 법이 내 마음팍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던 내 옛 죄인을 미워하게 되며, 그 옛 죄인에게서 쏟아 나오는 죄악들을 부끄러워하고 한탄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을 주심으로 자신이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이었으며, 또한 죄로 인하여 한없이 부패한 존재였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령이 우리 안에 부어지면 자신만을 사랑하던 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을 부인하는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되며, 그 십자가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아내신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서 죽음으로 생명이 잉태되어 많은 생명의 열매가 탄생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이다.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셨기에 제자들과 우리에게도 십자기 자기 부인의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눅 9:23). 나만을 사랑하던 집착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고, 그 자리에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영혼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통치하신다. 성도는 주님이 한량없이 내려주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과 좌절을 기쁨으로 감사로 영광으로 여기게 해달라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도를 하게 되며, 그 삶을 추구하게 되며, 내가 죽어서 저희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죽음까지 감당하는 순교를 구하게 된다. 그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함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진실 된 바울의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