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진의

믿음과 행함 (1):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이란?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과 상충되는 것인가?

오직 은혜 2022. 11. 1. 05:38

약 2: 1-26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를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한다면, 야고보서에서 제시하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씀이, 바울이 제시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복음의 핵심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영적으로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과 야고보서의 본질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믿음과 은혜’에 대하여, 즉 구원은 율법적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선물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야고보는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믿음과 행함’의 균형, 즉 실천하는 행위로 믿음을 온전케하는 열매를 제시한다. 야고보는 믿음의 실재는 사라지고 종교적 형식과 의식만 남아 있는 행함이 없는 허탄한 믿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참된 믿음이란 입술의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반드시 경건한 행동이 따르게 됨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가 없는 나무와 열매와 같은 밀접한 관계이며, 거듭난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내주하고 있기에 반드시 성령님의 사역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는 믿음생활의 지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야고보 서신의 목적과 수신자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흩어진 열두지파 유대인들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 사동행전에서 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행 8:1)가 시작되었고, 이를 피하여 로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비록 그들은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적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 의롭게 된다’는 율법적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배경과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적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수를 제시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롬 5: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하지만 그 당시 극한 상황에서 바울의 이와 같은 믿음의 본질을 받아들이거나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대적하거나, 또는 자기에게만 이롭게 해석하는 왜곡된 자유와 방종들로 인하여 실체가 없는 관념적 믿음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즉 “예수를 믿어서 구원도 받고 의인도 되었으므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평소 행실이야 어떻든지 상관이 없으며 노력할 필요가 없다”라는 윤리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만 하고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무시하며, 세상과 타협하여 세속화되는 윤리적 타락에 빠져있었으며, 서로를 미워하고 비방하며,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차별하며,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세상의 악한 지혜를 따라 살면서 자신들의 그릇된 신앙을 합리화하는 뒤틀림과 조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말씀과 복음에 대한 무지와 터무니없는 오해로 복음이 변질되는 심각한 오류들을 바로 잡기위해, 야고보는 관념적 믿음만 지닌 채 아무런 실천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행함과 연결되지 못한 믿음은 허탄한 텅 빈 믿음이며, 죽은 믿음이며,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라고 신랄하고도 직설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 아니라 ‘귀신들이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인정하는,’ 구원이 없는 죽은 믿음(약 2:17, 26),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자들에 대하여,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본서에서 말하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를 뜻하는 것이지 절대로 구원에 이르는 율법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은,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3:28, 갈 2:16)는 복음의 핵심과 상충되는 원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더욱 온전케하는 행위의 균형을 강조하며,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라는 것을 제시함으로 믿음과 행함이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강조한다. 즉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않는 외식적 믿음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유대 율법주의 외식적 행위에 대하여 ‘말씀은 받았지만 실상은 행함이 없는 죽은 행실’이라고 비판하며,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라고 일갈한 것이다. 야고보는 절대로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 즉 복음의 핵심에 역행하는 율법적 ‘행위’를 주장한 것이 아니며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말하는 ‘행함’은 율법적 행함으로 자기들의 의와 영광을 갈취하려는 유대주의 외식적 행위를 지적한 것이고;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믿음의 열매를 말한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서 필수적으로 열리게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말한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란?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믿음에 합당한 실제적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야고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 안에서 성령님의 내주와 역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성령의 열매들이 터져 나오게 되며 하늘나라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게 됨으로 그가 가진 믿음이 산 믿음임이 증명되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이며, 마귀에게 속한 자이기에 마귀의 본성을 따라 마귀의 행함이 나오게 됨으로 스스로 그의 믿음이 구원이 없는 헛것이며 죽은 것임이 증명된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죽은 믿음’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준다. 

첫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 2:1-5).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들이기에 높음도 낮음도 부자도 가난도 강함도 약함도 없기 때문에 믿는 자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으며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 존귀하신 우리 주님이 이 악한 세상에 낮고 비천한 종의 형체로 오셔서 우리를 섬겨주셨기에 낮고 비천한 자를 무시하는 것은 곧 우리 주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을 주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다.
  •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진 부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비난하고 멸시하고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핍박을 가함으로(약2:6-7) 그러한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자를 천대하는 것은 그가 가진 믿음이 이 세상에 속한 세속적인 믿음이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단 한 가지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잉태된 성도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거나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그가 가진 믿음은 구원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증명된다(약 2:8-9). 이르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 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함과 같이 사랑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니며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 15-17). 야고보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돌아보는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과 구체적인 구제와 봉사가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그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기에 진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줄 긍휼한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긍휼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선행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며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밝혀짐을 말하고 있다. 즉 말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믿음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한 실제적인 나눔과 섬김과 긍휼이 없다면 그 믿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며,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 마귀에 속한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셋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 만약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무 잎만 풍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가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야고보는 확실하게 제시한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잎사귀는 풍성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 21:19)라고 저주하자 이내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볼 수 있다. 주님이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주님이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유대인들 눈앞에 나타나셨음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또한 그에게 구원과 생명을 구하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한 율법적 행함과 제사에 목숨을 걸고 있는 무지하고 패역한 외식적 행함을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 비유하여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하신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열매도 맺지 않았다는 것이며, 반대로 자신들의 의를 높이고 영광을 갈취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 무화과 잎이 풍성하도록 열심과 열정으로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맺으려는 열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자의로 만들어낸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들 열매임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아예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게 저주해 버림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라고 열매가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인지는 오직 행함으로 나타남을 강조하여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라고 말함으로, 만약 네 믿음이 행함이 없다면 네가 가진 믿음은 허탄한 믿음이며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은 귀신들이 하는 믿음이며 귀신은 하나님은 한분이심을 인정하지만 행함은 마귀의 행사이기에 오직 멸망일 뿐 구원이 없음을 강력히 비난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 19-20). 즉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그런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으며, 귀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에게 속한 믿음과 같이 허탄한 믿음이며 죽은 믿음이기에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출발점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심 줄을 믿는’(약 2:19) 귀신들도 인정하는 구원이 없는 믿음이며, 마귀의 본성에서 나오는 악행으로 멸망에 이르게 됨으로 믿음 그 자체가 죽었다고 야고보는 말한 것이다(2:17,26). 이로보아 야고보의 요점은, 네가 ‘믿음으로 구원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의 진리로 구원 받았음을 확신한다면, 너의 행함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믿음임을 증거하라는 것이며, 만약 네가 믿는 믿음에서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신들이 믿는 죽은 믿음이라는 일갈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라고 행함이 믿음을 증거하며 온전케 함을 주장한 것이다. 야고보는 형식적이고 종교화된 구원이 없는 거짓된 죽은 믿음을 비난한 것이며,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된 믿음인지를 믿음의 행함으로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말하는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란’ ?

야고보가 지적하는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란, 우선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만 떠들고 자랑하지만 실상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며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말살하려는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거짓되고 외식된 믿음을 가리킨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하나님은 한분이심을 믿고 열심히 섬긴다고 떠들고 자랑하는데 그와 같은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한 거짓된 믿음임을 지적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외식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일곱 가지 화로 선포하셨다 (마 23:13-33). 

마 23: 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외식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폭로하시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강력하게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 초점이 자기 영광만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믿음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며”(요일 2:16),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45)라고 너희는 마귀의 행위를 하고 있으니 너희 자신들의 행함으로 스스로 마귀의 자식임이 증명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너희는 말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내어놓는 행위는 거짓이요 외식이요 이 세상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 탐심으로 하나님의 선한 법마저 악용하여 영혼들을 죽이는 악행들을 행하고 있으며, 자기들의 영광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살인하는데 까지 가게 됨으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라고 지옥의 심판을 미리 선고하셨다. 

야고보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실상은 귀신들도 믿는 귀신에게 속한 믿음이며, ‘영혼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너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너희의 행실로 너희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라는 일갈이다. 야고보는 그들이 믿는 믿음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인지 아니면 마귀의 탐심에서 나온 거짓된 믿음인자를 식별하는 가장 유일한 기준이 바로 그들의 ‘행함’에서 나오는 열매임을 말한 것이다. 즉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일은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의와 영광을 쟁취하는 썩은 것을 심고 썩은 것을 거두는 죽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자손이요 구원받은 족속이라고 스스로 확신하였지만, 그들이 행한 것은 마귀의 행사였음이 천하에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자고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말살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마귀의 행사를 한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행함으로 마귀를 믿는 마귀의 자식임을 스스로 증명하였기에 그들의 믿음을 귀신에게 속한 믿음이라고 비난 한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이란? 

약 2:21-24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참 믿음이 행함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아브라함의 순종과 기생 라합의 행함이다. 먼저 여호수아 2 장에서 보면, 라합은 도덕과 윤리적으로 방탕한 기생이었고, 그녀에게서 의라는 행함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도 또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방탕한 기생 라합에게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주어지고, 그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히브리인 정탐들을 숨겨줌으로 자기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자가 되게 한것이다. 비록 라합의 반역은 죽어 마땅한 악에 속한 행위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함을 받아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기생 라합의 행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 행위였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선이며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5). 

두 번째로,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순종의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온전케 되어 의롭다 함을 받아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의지적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에서 출발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선이며,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진실과 충실한 행함에서 격발되어 나온 하나님의 선행이 우선이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아브라함의 전 인생이 이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음으로 야고보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의 믿음과 선행에 근거됨을 성경이 말해주고 증거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불러내심으로 성경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났다”라고 믿음으로 시작하신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알아보고 원해서 자신의 의지로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떠밀려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안일한 고향 집을 떠나 떠돌이하는 고생길에 들어선 것이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행과 은혜로 말미암아 크고 작은 하나하나의 사건과 고난 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아가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 살수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는 언약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씨를 잘 보존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내까지 왕에게 두 번씩이나 팔아넘긴 자이다. 즉 ‘내 사랑하는 아내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나의 씨를 보존하여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힘을 다 하겠다’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도움을 주기 위해 종 하갈을 끌어들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통하여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하나님께 구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택한 이스마엘을 부정하시고 쫓아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행위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기나긴 사귐과 실수와 험한 인생에서 하나님의 믿음이 자신을 굳게 붙잡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는데 백 살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 비로소 아브라함 자신이 약속의 씨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존하여 주시며, 그 씨는 지켜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제물로 받쳐지는 희생으로 이루어짐을 깨닫게 됨으로, 독자 이삭을 살려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다만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의 가슴에 칼을 꼽는 데까지 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인간이 힘을 보태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믿음에서 격발된,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행하여진 ‘행함’이 아브라함의 행함으로 인정되어 의롭다함을 받은 것임을 말하는 것이지 아브라함 자신에게서 나오는 기특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대로 행하도록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그의 행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됨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의 행함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근거하지 않았더라면 그 행함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아브라함 자신의 행함이기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 만약 하나님의 진실하신 행함이 그를 이끌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더더욱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행위가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고 빚어진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성령님의 내주와 진리의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터져 나오게 됨으로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라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2-3)라고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 때문에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 자랑할 행위가 없다고 확실히 못을 박는다. 만약 아브라함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어서 의를 행하여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신의 공력을 자랑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죄인에게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란 나올 수가 없다), 그의 믿음과 행함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주도하에서,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고 빚어졌기 때문에 행함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정한다. 더 확실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행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살리기 위해 대신 드려진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음을 성경은 시작부터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아담의 첫 후손 아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양의 제물과 아벨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받쳐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그 제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졌음을 말한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짐을 이삭의 제물로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고전 15:10)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시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선물이며, 때문에 그 어떤 행함의 대가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피의 공로를 믿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소유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기에 기필코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이미 택하여 놓으셨고 의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기에 의롭다함을 받아 영화롭게 된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은혜를 입어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현실이다. 이는 나의 선택, 나의 의지, 나의 노력이라는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기에,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이르는 믿음을 주셨기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영화롭게 하셨다고 바울은 성도의 정체성과 신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제물로 받침으로 그 제물을 통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독자를 받치는 순종을 주셨으며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시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창22:12) 아브라함이 자기의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에게 향한 믿음을 입증하였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먼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받쳤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을 보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 아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구원의 의를 성취하시는 뜻은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루어진 변할 수 없는 묵시이며, 그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셨으며,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행함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의로운 행함을 우리 성도를 통하여 나타내신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열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믿음과 선행(열심)에 의해 구원받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임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들이 먼저 믿음을 발휘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시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나온 행함은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선행에서 격발되어 나온 하나님의 것이기에 의로운 것이다. 만약 그것이 죄인에게서 나온 ‘행함’이라면 그 행함에는 죄가 섞여있기에 절대로 의로올 수가 없음을 바울은 반복하여 강조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야고보가 제시하는 성도의 행함이란 ?

그러므로 야고보가 제시하는 ‘행함’은, 구원받기 위한 율법적 행함이거나, 선을 행하여 업적을 쌓아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거나,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높임을 받기 위해 행하는 구제나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와 사랑으로 입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며,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뿐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어떤 의로운 행위는 죄인의 몸에서 나올 수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 수도 내놓을 수도 없는 패역한 죄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고 오로지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모든 삶을 주관하심에 순종하는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으로 내려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올바른 행실이다. 내 ‘자아’가 완전히 부인되고 죽었을 때만이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함’이 나를 통하여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즉 거듭난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이며 동반자임을 야고보는 강력히 주장한다. 믿음과 행동을 나무로 표현한다면, 믿음은 나무의 뿌리요, 행위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이다. 참 믿음은 그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에서 열리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좋은 열매이지만, 이 세상 것을 쫓는 허탄한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는 처음부터 마귀가 뿌린 가시와 엉겅퀴로 인하여 생명이 없는 썩은 열매가 나오게 됨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자연스럽게 기필코 ‘행함’이라는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 열매는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서 터져 나오는 성령의 열매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거나 거짓되고 외식된 행함이거나 탐심에서 나오는 마귀의 행사라면, 그는 처음부터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마귀의 자식이며 당연히 그들에게서는 선한 행위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기에 야고보는 그들이 가진 믿음이 ‘영혼이 없는 죽은 믿음’이며 귀신에 속한 믿음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르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아버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가 된 자이기에 그가 추구하는 삶은 하늘나라의 신령한 삶이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수 없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성도의 삶에서 터져 나오게 되며 이를 야고보는 성도의 올바른 행함이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과 사랑의 본질을 따라 당신의 자녀를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기에’(엡 1:4-5), 반드시 당신의 자녀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믿음과 선행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무엇인가를 발휘하여 업적과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 공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신다. 반대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의 순종으로 썩어서 없어지는 한알의 밀알과 같은 또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원하신다. 그 없음의 자리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당신의 믿음으로 끌고 가시며, 결코 당신에게 순종하는 믿음의 작품으로 만들어 내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이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사셨듯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원하심을 한알의 밀알과 겨자씨 비유로 설명하여 주셨다. 즉 너희에게 요구되는 것은 태산과 같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을 구하는 큰 믿음이 아니라, 반대로 밀알과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존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려가는 순종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갈 때 너희 안에 깊이 박혀있는 ‘자아’ 라는 뿌리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고 그 자리에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져 그리스도의 뿌리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여 주셨다 (눅 17:6; 마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