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1-5) 하나님의 판단과 대조되는 인간의 판단 /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이스라엘의 강퍅한 고집
롬 2:1-5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바울이 말하는 ‘판단’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바울이 말하는 ‘판단’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여 선악과를 입에 물고 선악 판단의 주체자가 되어, 다른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도를 정하여 놓고,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가치를 정하며, 다른 이들의 실수와 허물과 죄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심판관 노릇, 즉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1장에서 육체의 소욕을 좇아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음란한 도덕적 상태, 즉 모든 인간의 ‘불의’의 상태를 지적하고, 2장에서는 자신들도 똑같은 죄악들을 범하면서도 이방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멸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여 우월감을 챙기며 자신들의 의를 내 세우는 유대주의의 ‘불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바로 선민의식이 고조되어 있는 유대주의를 가리키며,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모두를 심판하심으로 예외가 없다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율법과 제사와 성전과 할례를 받은 선민의식으로 이방인들과 구별된 특권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은 구원받은 민족이기에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관대하여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멸시하며 개로 취급하여 자신들을 높이는 선민사상으로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 걸고 자신들의 영광과 이름을 높이기 위해 교묘하게 자신들을 심판관으로 위장하여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영혼을 죽이는 악행이 바로 자신을 정죄하는 일이며, 결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1-3). 즉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율법적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며 하나님처럼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너희들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너 자신이 너를 정죄하게’ 됨으로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1-3).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외식에 대하여 ‘회칠한 무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라고 저주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킨 자로,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 자칭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해 온갖 거짓된 외식들을 범하였음을,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라고 부르시면서 일곱 가지 화로 선포하셨다(마 23:13-33). 그들은 율법을 이용하여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소외당한 자들을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며, 짓누르고 빼앗는 횡폭으로 자신들의 유익을 챙겨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며' (눅23:5-7),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며' (눅16:14),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며” (막 12:40),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 (마 23: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마 23:27) 전형적인 외식 자들임을 폭로하셨다. 그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다”(요일 2:16). 그들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나누어주는 권위를 가진 자로 자칭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다른 이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판단하는 생명을 죽이는 일들을 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바로 ‘삯꾼’이며, 양을 물어가고 헤치며 (10:12),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며 (10:10), 자신들의 영광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살인하는 살인강도까지 가게 됨으로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라고 지옥의 심판을 선고하셨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을 신으로 모시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 다른 이의 선과 악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서로를 향하여 생명을 죽이는 파멸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어찌 선과 악을 온전히 구별할 수가 있어 다른 이를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죄인이 죄인을 정죄하여 함께 망하는 죽음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이 세상 권세자 마귀가 장악하고 있기에 인간 자체가 바로 죄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며, 바울은 이와 같이 죄의 노예가 되어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아’에서 나오는 판단이 곧바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1:29-32)와 같은 것들임을 제시하고 있다. 즉 나의 유익과 욕심과 탐심과 시기와 같은 불의에서 출발한 판단과 정죄는 생명을 죽여 함께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리의 판단과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2:3). 즉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우월감으로 온갖 거짓과 위선과 같은 '외식'을 행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과 긍휼을 멸시하며, 끈질긴 고집으로 회개를 거부하는 그 교만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당한 자들이며,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고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이시고 의이시며,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한 뜻을 이루시는 전지전능하신 만물의 통치자이시며 심판주이시기에 그분의 판단만이 진리 이심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2:2)라고 하나님은 곧 진리 이심을 제시한다. 선과 악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법과 도덕과 윤리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 판단되고 정죄되는 일도 아니다. 선악의 기준은 절대적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함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완전한 의존적 존재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로 피조 되었으므로 피조물이 선악의 주체가 될 수도,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할 수도, 더더욱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만물의 창조주만이 이 세상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며 판단하시며 통치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고 흥하기도 하시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욥 12:23).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아직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선악과나무를 주시면서 한 가지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선이고 생명이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곧 악이고 죽음임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허락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으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 영광에 도달할 수 없음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선과 의이시며, 진리와 생명이심을 나타내심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실제로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셔야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며, 그 존재 가치가 티끌과 같이 연약하고 무가치한 ‘없음’이며, 하나님의 생명력을 떠나서는 죽음과 지옥이라는 것을 적실히 깨닫게 됨으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임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체가 생명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곧 ‘선’이며 생명임을 처음부터 정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판단과 대조되는 인간의 판단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토해내는 모든 것들이 바로 악한 죄이며, 그 죄의 대가가 바로 죽음임을 아담에게 선포하셨으며, 실제로 노아 홍수의 심판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한 것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창 6:5), 오직 은혜를 입은 노아 8식구만 구원하시고, 온 인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짐승들과 식물들을 땅과 함께 홍수로 철저히 멸하셔서 죄의 삯은 곧 사망(롬 6:23) 임을 보여주셨다. 만약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정하는 선악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하나님은 온 인류를 멸하신 ‘독재주의’라고 판단하게 되며 ‘사랑과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시기 위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모든 가나안 사람들을 어린 아기까지 포함하여 다 죽여라고 명하시고 몽땅 도살하게 하셨다. 인간이 정한 도덕과 윤리로 선과 악을 판단한다면, 하나님께서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행하신 의로운 심판을 ‘악하다’고 판단하게 되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 행하시는 일들을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배신한 기생 라합을 의롭게 여겨 가나안 도살에서 구원하여 주셨고, 시아버지 유다와 간통한 며느리 다말을 의롭다고 하셨으며, 선지자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율법을 어기는 명령을 하셨다.
신약에서, 5섯 남편을 갈아치운 창녀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정죄 받는 사마리아 여인을 친히 찾아가 주셔서 당신의 신부로 취하셨고;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살려 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심으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 7:34)라는 비방과 경멸을 받으셨다. 또한 그들이 목숨같이 지키고 있는 성전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헐어라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라는 치명적인 말씀을 던지셨으며, 목숨처럼 지키는 안식일을 수시로 범하시며,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을 친구로 삼아 자주 어울리신 것이며, 그들이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규례들을 수시로 깨고 비판하시면서 그들이 선하다고 행하는 종교행위를 마귀의 행위, 외식, 회칠한 무덤, 독사라고 저주의 욕설을 퍼부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각종 질병에 묶여있는 자들을 안식 날에 고치셔서 깨끗한 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과 어긋나게 사역을 하시면서 자신들이 평생 쌓아놓은 선한 업적들을 전면 부정하시고 자존심을 짓밟는 예수님을 그들은 ‘악하다’고 판단하며, ‘죄인’이라 정죄하며, 결국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하나님을 살인하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입에 물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마저 ‘죄인’이라 판단하여 죽이는 진리를 대적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선악구조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 인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악 판단의 기준이 타락한 ‘자아’에서 출발하기에 자신에게 유익한 것, 즉 이기심과 욕심을 충족시키면 ‘선’으로 인지하고, 불리한 것을 ‘악’이라고 인지하는 진리를 대적하는 마귀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을 신으로 삼아 마음의 정욕대로 행하여 육적 탐심과 육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신만을 위한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법칙과 원리를 거슬러서 역으로 인식하고 역으로 행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거슬러 악을 행하여 스스로 생명을 죽이는 무덤을 파고 있다. 바울은 인간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영을 대적함으로 서로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르기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7-21).
그리하여 예수님은 육신을 따라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5-1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인간처럼 ‘자아’에서 출발한 육신의 탐심으로 사물을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권세로 영으로 판단하시기에 그분의 판단은 곧 진리이시다. 그분은 본체가 선이시며 생명이시기에 그분이 계획하시고 일으키시고 성취하시는 모든 일은 '선'이시다. 본질상 그분은 '선'이시며 '의' 이시며 ‘거룩'이시며 '영생'이시기에, 이 역사를 선으로 주관하시며 선으로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을 둘로 쪼개서 판단하는 인간이 인식하는 '악'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다. 이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며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입혀주셔서 구원의 진리가 되셨다. 이르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예수그리스도 품 안에 집어넣어 하나로 만드셔서 영원히 함께 사는 구원을 성취하여 주심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시며, 오직 그분의 심판만이 의로우심을 천하에 나타내셨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5:30).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2)라는 진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판단하심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판단을 피할 수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2-3). 즉 그 누구도 진리에 근거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선악과를 입에 물고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타락한 육체의 본능을 따라 마귀 행사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과 행함은 오직 나의 유익과 욕심에서 출발한 악일뿐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롬 3:10-20).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 본성이 악하기에 선이라는 것이 나올수가 없음에도 자신을 선으로 위장하여 율법의 자대로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마귀의 행사를 하는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이며, 외식하는 패역한 자들이며, 결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고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 자들을 향하여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2). 인간이 ‘선하다’고 인정하고 판단하는 일은 인간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행하는 ‘외식’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악하다’고 판단하시며 그런 자들을 ‘악인’, '독사의 새끼'라고 정죄하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인간의 주도하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한’ 은혜를 입혀주시는 사랑의 본질 때문임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3-25). 즉 그분은 본체가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한 마음으로 한없는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시는 인내를 베풀어 죄인이 죄를 자백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오도록 회개로 인도하심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시며’(사 1:18); 우리를 결코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심으로”(롬 8:32)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바로 하나님의 그 본질적 사랑에서 격발된 한없는 자비와 긍휼과 길이 참으시는 은혜의 덮음으로 죄인을 회개로 인도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임을 바울은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시는 긍휼한 마음은 그분의 속성이시다. 그 죄가 아무리 패역하고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당장 죄인들을 멸하실 수 있으시라도, 길이 참으시는 긍휼한 마음으로 결코 회개로 인도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분은 긍휼, 용서, 자비, 인자, 오래 참음, 그 자체이시기에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에게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은 변치 않으시며, ‘호세아서’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당신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보여주셨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와 이스라엘의 패역한 역할을 맡은 창녀 고멜의 이야기다. 하나님의 긍휼이 고멜에게 부어지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창녀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십자가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이것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내하시는 긍휼이며,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평생 끝까지 창녀 짓만 하다가 결국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어 노예 시장에 매달려 있을 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명하여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아주시게 하셨다. 창녀 고멜과 같이 패역한 죄인을 아무런 조건과 대가도 없이 오직 사랑으로 은혜를 입혀 신부로 삼아주신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처음부터 인간을 이 땅의 티끌로 ‘없음’으로 만드셨으며, ‘없음’이 ‘있음’의 존재가치가 된 것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긍휼과 은혜 때문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화로운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패역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긍휼을 입혀주시는 사랑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로 인도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죄에 대한 무감각으로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하나님 앞에 불의를 행하며, 온갖 외식으로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가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한다. 자신들도 하나님의 판단과 정죄 아래 있는 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행함을 ‘선’이라 주장하고, 다른 이들의 행함을 ‘악’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교만하고 패역한 마음 상태를, 바울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는데, 바로 우리 모든 죄인의 마음 상태를 대표한 유대인들의 강퍅함을 지적한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4-5).
이스라엘의 강퍅한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패역한 마음
바울은 1장에서 모든 인간의 패역한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이다”(1:29-31). 때문에 제아무리 지식과 지혜로, 종교적 열심으로, 율법 지킴으로 공로를 쌓는다고 하여도,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의 근성들은 제거할 수가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위선과 거짓을 행하며, 마음이 더욱 강퍅하여 회개를 거부하며, 자신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 교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시는 은혜의 손길을 멸시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마귀적 본질을 빼어닮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 '휘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6)라고 경고한 것이다.
구약 4천여 년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줄곧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외치며, 그럼에도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완악함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외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악행을 일삼아 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끈질긴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패역한 마음 상태로 제사 놀이를 하는 외식과 거짓에 진노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 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극지에 달한 죄악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셔서 선전문을 닫게 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0).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경멸하여 가시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 놀이에 하나님께서는 더는 참을 수가 없음으로 400여 년 동안이나 침묵으로 말씀의 기갈을 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으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자신들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셔서 은혜의 새 시대를 여는 세례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보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보내주셔서,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물세례를 거행하게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보내 주셔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심으로 구약의 모든 제사와 율법 지킴을 끝내 주셨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그리하여 세례 요한이 외친 두 구절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이다. 천국이 임하였기 때문에 이제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서 제사드림을 멈추고, 광야로 나와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의 세례를 받고,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외침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라는 말씀이다.
세례요한은 죄와 어둠에 잡혀 있는 그들에게 내면에 숨겨져 있는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고 정죄하며, 율법과 제사만을 고집하여 자신들의 의와 영광 얻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목이 굳은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외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였으며,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여’(2:4),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고집스러운 유대인들은 참된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인내와 긍휼을 멸시하고, 여전히 율법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 것으로 자신들의 율법적 신앙을 자랑하며, 의인이라 자칭하며,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높임을 받기를 추구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이들이 도무지 알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선’으로 ‘불의’를 쌓고 있는 패역함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외친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 3:10).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저희 조상들보다 더욱 완악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까지 대적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으며, 수많은 이적과 표적으로 자신이 바로 그들이 그렇게도 손꼽아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도, 세례요한의 증거도,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언도, 모두를 무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죽도록 핍박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이며, 세상의 빛이며, 선한 목자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고 증거하여 주심으로,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촉구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과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멸시하고, 극악무도한 악행으로 예수님을 핍박하여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더욱 창궐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모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며 죽이는 엄청난 죄악들로 스스로 심판의 근거를 쌓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끈질긴 고집으로 회개를 거부하며, 자신들의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온갖 거짓들을 서슴없이 행하는 추악한 외식에 대하여 마태복음 23장에서 일곱까지 화로 낱낱이 폭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너희가 바로 우맹 한 자요 불의 한 자이며";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마 23: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며”(마 23:27);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며’(눅23:5-7);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며(눅16:14);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전형적인 외식 자들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나누어주는 권위를 가진 자로 자칭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여 영혼을 죽이는 악행들을 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바로 ‘삯꾼’이며, 양을 물어가고 헤치는 절도이며(10:12),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10:10) 강도와 이리들임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 있는 추악하고 악랄한 위선적인 죄악들을 낱낱이 폭로하며, 그들의 가치관과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바울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고집과 패역함과 악랄함과 회개치 아니하는 끈질긴 죄의 근성을 지적한 것이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고한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