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 “내가 목 마르다” /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참 의미 (요 19:28-30)
요 19: 28-30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서로 피가 다른 제자 요한과 마리아 어머니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영적 가족, 즉 교회가 탄생됨을 알게 되었다. 새 가족의 탄생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그 어떤 시도나 노력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친히 묶어주심으로 교회가 탄생되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분이 친히 주관하시며, 인간의 의도로 탄생되고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짐을 알게 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시며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직전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쳤다. 바로 우리의 목마름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위해 그분이 먼저 목마르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 아버지에게 갈증을 호소하여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아버지로부터 부어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 즉 성령님에 대한 목마름이다. 주님은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셨다.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 38-39)라고 선포하셨다. 이는 이미 예언된 말씀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첫째, 예수님의 목마름이 바로 우리의 목마름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 즉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위함임을 제시하셨다. 물은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생수로, 생명의 원천으로 말씀하셨다. 만물을 소생케 하고 기갈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공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생수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생수를 주시기 위해 그분이 먼저 목마름의 고통을 겪으셨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 구원 성취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친히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남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원히 그분과 하나로 살 것임을 계시하여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라고 자신을 ‘영생의 샘물’로 선포하셨다.
두 번째는, 하늘에서 이루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짐에 대한 갈증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이내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시고 숨을 거두신 것이다. 그분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이 세상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내려 오셨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온갖 멸시와 조롱과 박해를 받으셨으며, 이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아버지의 뜻이 곧 이루어짐으로 구원의 갈증을 호소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형벌에서 살려내시기 위해 그분이 먼저 우리의 영벌을 대신 받아내시는 의로운 목마름이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 인간이 가게 되는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며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막 9:48-49) 물이 없는 영원한 갈증으로 불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셨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이 땅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던 부자는 천국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구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마 16:23-24). 영원히 물이 없는 지옥 불에 던져지는 그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먼저 목마른 갈증을 겪으신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계 22:1)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한”(계 7:16) 영원한 생수이다. 우리를 영원한 목마름의 지옥 불에서 구원하기 위한 강렬한 구원의 갈망을 “목마름”으로 호소하신 것이다.
세 번째, 죄인에게 향한 구원의 갈증이었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 22:12-15).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그렇게도 괴롭히고 조롱하며, 마치 피에 굶주린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포악하게 달려드는 유대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었다. 택함을 받은 그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수치와 멸시와 박해를 당하는 사정없이 내 던져지는 버림받는 그 외로움과 고독감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목말라하시는 의로운 거룩한 고독이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 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69:20-21). 예수님은 인류의 죄와 저주를 홀로 짊어지시고 홀로 고독한 십자가에 매달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한 그 갈증을 호소하여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의 생수를 주시기 위해 그분은 온갖 모욕과 수치, 멸시와 천대, 고통과 비참한 죽음을 홀로 당하셔야 하는 그 고독감과 외로움을 호소하신 것이다. 이르기를,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 27:29-30).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간절히 찾는 갈증이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8:16, 29)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분께서는 육의 고난과 수치보다 더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버지와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이 하나로 계셨지만 아버지께서 등을 돌리심으로 ‘고아’로 버려져야 하는 그 고독감을 겪어내야 했다.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 받음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등을 돌리셨고, 아들은 아버지를 뵈올 수도 교통할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며 죄에 대하여 쏟으시는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홀로 감당하셔야 하는 그 고통과 외로움이 너무나 극심하셨기에 아버지를 간절히 원하는 그 갈증으로 “내가 목이 마른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그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었기에 주님은 “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그 고독함을 표현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그 외침에서 그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하고 더럽고 심각하기에 반드시 십자가라는 저주와 심판을 내리셔야 하셨으며,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는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대가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신 그 위대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철저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고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과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고독함과 고통을 먼저 겪으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은 머리 둘 곳 없는 인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점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은 인간의 짓은 죄를 뒤집어쓰시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는 그 인생을 자처하시고 오셨다. 그분은 수시로 유대인들로부터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으며, 죄인으로 취급받아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철저히 버려지는 외로운 인생을 사셨다. 죄인들로부터 몸이 찢기는 채찍과 고문과 수치와 조롱으로 만신창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몽땅 쏟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에 갈증을 겪으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죄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시고 “다 이루었다”(요 19:28) 라는 선포로 인간에 대한 극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이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벳푸 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지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죄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사랑과 평강과 은혜의 복을 내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이와 같이 십자가의 사랑이 성취되는 순간 이 세상에 것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던 죄인들이 세상의 것을 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명수를 마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아들이 되었고, 신부가 되었고, 의인이 되어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갈 4:4-7).
우슬초 와 신 포도주
29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눅 23:36: 군인들이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우슬초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만 신 포도주를 해융(해면)에 묻혀 “우슬초”에 매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슬초에 관하여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우슬초 묶음을 사용하여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을 피하게 하신 구원에 관한 사건이다.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출 12:22). 그렇게 바르게 하심은 “내가 그 밤에 애급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급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급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급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애급 전체에 똑같이 죽음의 심판이 내려지는데 오직 우슬초에 의해 피가 발려진 자들만 죽음을 넘게 하여 살려내시겠다는 약속이다. 즉 어린 양의 피를 우슬초에 묻혀 바르기만 하면 죽음의 심판에서 살아난다는 구원을 선포하셨고 그대로 우슬초로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린 자들만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우슬초에 매인 신 포도주를 받으시는 사건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장면을 그대로 성취하심을 나타내는 십자가 복음의 장면이다.
두 번째로, 레위기 14: 4-6에서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때 제사장은 우슬초를 사용하여 문둥병 환자에게 피를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한 것이며, 민수기 19:17-19에서 우슬초로 물을 뿌리는 정결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시편 51:7에서 다윗은 우슬초로 자신의 간음 죄를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이와 같이 우슬초는 구약에서 죄의 정결 의식, 어린양의 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에 이르는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어 기자는 우슬초와 피에 대하여 우리에게 상세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 19-21).
신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아버지께서 내려주시는 율법의 저주와 심판의 신 포도주를 마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죄의 심판을 전부 삼켜버림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영원히 속량하여 주신 것이다. 신 포도주는 묵고 낡은 포도주, 즉 구약과 율법을 상징한다. 신 포도주를 예수님이 마셔버림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심판에서 구원하심을 상징하며, 율법 시대가 페하여 짐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내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심으로 완전한 신약 은혜의 복음 시대가 도래됨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새 가족, 새 교회의 탄생까지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모든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 있었으며, 십자가로 완전히 성취됨을 나타내시기 위해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내가 목마르다” 와 “다 이루었다”라고 구원의 성취를 선포하신 것이다. 요한은 십자가 위에서 와 십자가 밑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난 일들이며,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 모든 말씀은 신약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기록(눅 24:27)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구약의 모든 예언의 말씀을 십자가로 다 성취하셨기에 마지막 선포는 “다 이루었다”이다.
첫 번째 포도주: 사 복음서에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드린 포도주에 관하여 조금씩 다른 측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에게 드린 포도주는 두 번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드린 포도주는 예수님이 골고다에 도착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로마 군인에 의해서 제공된 포도주이며 일반적인 포도주가 아니라 몰약과 쓸개를 탄 포도주였다(마 27:34 / 막 15:23). 포도주에 몰약을 탄 이유는 마취 효과를 주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이 죄인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의 표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몰약과 쓸개를 탄 포도주는 거부하셨다(마 27:34 / 막 15:23).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하늘에서 이룬 뜻을 이루시는 그 순간에 포도주에 쓸개나 몰약을 탄 마취제로 사용한 그 포도주는 절대로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성취에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참여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의인으로서 반드시 온전히 받아내셔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 포도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와 몰약을 탄 포도주는 거절하여 받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시기 바로 직전에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시고 우슬초에 매어 주신 포도주는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받으신 ‘신 포도주’를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와 구별하기 위해 굳이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에 있는 그 신 포도주를 해융(해면)에 적시에 우슬초에 매어 주셨다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요한만 신 포도주를 해용에 묻혀서 우슬초에 맸다고 굳이 “우슬초”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다른 복음서에서는 “갈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씀하고 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19:28).
예수님은 이제 구원 성취를 바라보시면서 구원에 대한 갈증, 즉 우리를 이 세상 악과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수를 부어주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시는 심판의 쓴 잔을 반드시 받으셔야 하셨으므로 두 번째로 주시는 ‘신 포도주’는 입에 대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가 주시는 ‘쓴 잔’(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온 백성들의 죄를 도말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 구원의 뜻을 가로막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라고 질책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주는 쓸개와 몰약을 탄 포도주는 거절하시고, 아버지가 주시는 저주와 죽음의 쓴잔은 마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시고 숨을 거두신 것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혹독한 죽음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던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마셔야만 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이유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19:28). 포도주는 성경에서 항상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에서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는 영원한 신랑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로 새 언약을 약속하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흘리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여 주셨다. 사도 요한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7)라고 증언하고 있다.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잉태케하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신 포도주를 입에 대신 것이다. 그냥 포도주가 아니라 신 포도주를 주님이 마신 데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누가복음 5:27-39에서, 주님은 죄인이라 정죄 받는 세리 레위 (마태)를 제자로 택하시고,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와서 왜 금식하는 날에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비양거렸다. 그때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낡은 부대를 대조하여 율법과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시면서 여전히 구약적 율법과 제사에 자신들을 스스로 묶어놓고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는 그들의 악한 외식을 묵은 포도주, 낡은 부대, 낡은 옷으로 비유하셨다. 구약의 묵은 율법을 고수하는 자들을 주님은 묵은 신 포도주로, 낚아서 찍어지고 버려지는 헌 옷과 헌 부대로 묘사하신 것이다.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도래된 하나님의 나라, 성령이 임하는 새 포도주 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임하는 새 옷은 절대로 옛것, 즉 율법과 공존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신랑의 때가 임하였다는 것은 옛 것의 시대가 끝났다는 종말의 선포이기 때문에 더는 묵은 것에 머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율법의 신 포도주를 마셔버림으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모든 저주와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구약에서 지키고 섬겼던 제사와 율법이 폐기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 구원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즉 옛 것이 죽고, 새것이 탄생되는 참 복음의 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이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하여 주셨다.
렘 31:29-34
29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및 유다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며, 그 계약은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던 때에 맺은 옛 계약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고 율법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언약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 본성의 타락함과 불완전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운 법을 지킬 수 없음을 구약 역사가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셨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모든 저주가 끊어지고, 즉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그 죄의 뿌리를 끊어냄으로 이제 다시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렘 31:29), 각자 자기가 짓은 죄로 하나님 앞에 설 것임을 “각기 자기 죄악으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전 옛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8-19). 즉 옛 계명은 무익하므로 페하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소망으로 가득 찬 새 언약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안히 하리라”(렘 33-34)는 언약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죗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 죄가 기억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전혀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이는 예수께서 우리 죗값을 다 갚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 짓고 있는 죄, 그리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가 지을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복음의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십자가로 새로운 언약이 펼쳐지는데 그 새로운 언약이 바로 성령의 약속을 가리킨다. 즉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육신으로 지킬 수 없었던 계명이 우리 마음 팍에 새겨짐으로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계명을 지킨 의인으로 인 쳐주실 것이며, 이제는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로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완성하실 것임을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이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지킬 수 없었던 그 율법의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심으로 아담으로부터 세대를 이어 내려온 죄인에게 향한 모든 죄와 저주의 심판이 예수 한 분에게 내려짐으로 다시는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할 수 없게 됨으로 그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이다”(갈 3:14).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율법의 신 포도주를 마시고 선포하신 “다 이루었다”의 참뜻이다. 바로 율법의 완성과 페기의 선포이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義)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으며(롬 10:4), 율법의 완성이(마 5:17; 요 19:30) 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연약하고 무능함으로 예수님이 대신 율법을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롬 8: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거룩하신 성품과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내신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고 제시하고 있다. 그 거룩한 율법으로 비추어 볼 때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인의 육적 본능에서 나오는 욕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선한 율법”에 도달할 수도 지킬 수도 또한 순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타락한 인간의 육적 본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법을 지킬 수도 없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죄란 어떠한 것이며, 왜 인간은 오직 십자가 보혈의 피로만 은혜를 입어 율법의 심판에서 구원받게 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내신 법이며, 오직 법의 당사자인 그분만이 완성하실 수 있으며 또한 그분만이 페하실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라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에게는 율법을 폐기하여 주셨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함과 같다. 죄 없으신 의의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시킴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을 율법의 심판에서 속량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함과 같이 옛 죄인은 율법의 정죄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다시는 죽은 죄인을 정죄하지 못함으로 페하여 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바로 그 율법의 ‘완성과 폐함’을 포함하여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게 죽은 것은 하나님께는 살고자 함이라” (갈 2:19).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율법의 신 포도주를 받아 드심으로 인간에게 쏟아지는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 위에서 홀로 받아내신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에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눅22:39) 라고 울부짖으셨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고민하시는 예수님의 그 아픔과 고통, 이제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받으셔야 하는 그 심판과 저주의 잔을 앞두고 처절히 아버지에게 드리는 마지막 기도였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아버지가 주신 그 심판의 잔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주시는 진노의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창조주이신 그분이 모든 권세와 권능을 지니고 계셨음에도 온전히 내려놓으시고, 이제 피조물인 인간에게 도살당하는 양으로 매 맞음의 찢김과 춤 뱉음의 멸시와 조롱과 같은 인간 이하의 수모를 견디어 내셔야 하셨기에, 그 마음의 번민을 숨긴 없이 그대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 마음의 번민을 그대로 표출하신 것은, 장차 성도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며, 그때 그 마음의 번민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나가서 순종의 기도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본보기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마지막 선포는 “다 이루었다”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 5). 그가 수모를 당함으로 우리는 영광을, 그가 죄인으로 정죄를 당함으로 우리는 의로운 의인이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택하셔서 모든 죄를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완전히 없애주시기 위해 고안하신 의와 사랑과 영광과 지혜이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시고 또 원하신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은 우슬초로 주신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라는 선포와 함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는 성경에 기록한 모든 내용을 이루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신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율법을 상징하는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 아버지가 주시는 죄인에게 향한 심판의 쓴잔을 마심으로 율법의 심판과 저주와 정죄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과 함께 ‘영혼이 돌아가신’것이다. 바로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됨을 알리는 은혜의 복음의 선포이다.
첫째, 이는 창세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이루신 구원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선포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천 년 동안 계시하신 십자가의 비밀과 모든 예언과 언약과 약속들을 다 이루었다는 선포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 18:31)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요한은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다”(19:28)라고 성경의 말씀을 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문의 계명을 다 이루셨다는 선포였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 7:4),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이루시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완성과 폐함’의 선포였다. 이는 율법의 일부분은 페하시고 일부분(특히 십일조와 같은 것들)은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의 전체를 몽땅 “다 이루셨다"라는 선포이다. 율법에 갇혀 있던 죄인이 영원한 해방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기쁜 소식, 복음의 선포였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 6-7) 함과 같다. 즉 율법 아래 있던 내 옛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함과 같이 다시는 심판하는 법 아래 매이지 않고, 의의 생명으로 태어나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이다(롬 6: 14). 그리하여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4).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롬 6:14).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함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 지성소의 휘장은 천국의 문을 상징한다. 이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그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화평을 이루사,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7)라고 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 11:25) 이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며, 영광을 받은 자이며,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죄인에게 향한 모든 저주와 심판을 친히 홀로 받아내심으로 하늘에서 이루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예수님 한 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는 구속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9-21).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으며,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 복음을 믿고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은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