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0]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 / 예수님은 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겼을까? (요 19:23-27)
요 19:23-27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 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 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순간에, 십자가 위에서와 십자가 아래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일들이 일어났다. 십자가 위에서는 예수님과 강도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십자가 밑에서는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일들이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죄인들의 수치를 가려주는 생명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겨진 상태로 달려 있었고, 그 십자가 밑에서 죄인들은 탐욕스럽게 예수님의 옷을 찢어 나누며 제비를 뽑아 취하고 있었다. 이 장면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에게 생명의 옷을 입혀주시려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예수는 전혀 바라보지 않고, 그분이 입고 있던 옷이 기적을 발휘하는 것 마냥 그 옷을 서로 가지기 위해 찢어서 나누고 제비 뽑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망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만 초점을 두고 그것을 나의 삶의 방법과 도구로 끌어다 쓰려고 하는 그 탐심과 패역한 일들이 현재 교회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기 위해 하나로 가져야 입을 수 있는 옷을 찢어서 천 조각으로 가지고, 예수님의 속옷마저 서로 가지기 위해 제비를 뽑는 추악한 모습이 그대로 십자가 밑에서 연출하고 있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9:23-24). 이는 다윗의 시편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시 22: 6-8).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6-18).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무지한 인간들은 자기들의 탐심과 자기들의 원하는 의도를 들어주지 않자 이내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인간 이하의 조롱과 멸시와 채찍으로 대하며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 22:12-1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유대인 무리들의 포악함과 잔인함이 입을 벌리고 피에 굶주린 사자같이 예수님을 둘러싸 광란을 일으키는 미친 모습들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온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시는 예수님의 처참한 고통과 심적 고뇌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잔인한 죄인을 구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입혀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고, 그분의 그 희생적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죄인들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십자기 밑에서 옷을 찢어 나누고 제비를 뽑고 있었다.
왜 예수님의 겉옷은 찢어서 네 조각으로 나누어져야 했는가?
예수님은 죄인들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으며,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예수님의 생명의 옷, 의의 옷을 무상으로 입게 됨을 나타내시기 위해 십자가 밑어서 은혜를 상징하는 예수님의 겉옷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장면이 등장한 것이다.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동서남북 4방위에 근거한 땅과 우주의 수이다. 이 세상 온 우주를 상징하는 4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수 3이 곱하여 12의 완전수로 상정되고, 12를 다시 곱한 수 144에, 10을 세 번 곱하여 얻은 수가 십사만 사천이며, 그렇게 해서 얻은 십사만 사천은 구원 받기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이다. 바로 십자가 복음이 사명 팔방으로 땅 끝까지 전파됨을 상징으로 보여주신 장면이다. 그리하여 굳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19:23)라고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겉옷’은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 복음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은혜와 생명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겉옷이 4방위를 상징하는 넷 군인들이 넷으로 나뉘어 가지는 장명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즉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동시에 십자가 위, 즉 하늘과 땅을 사이 두고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늘나라로, 거절하는 자는 이 땅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됨을 십자가를 기준으로 오른편 강도와 외편 강도의 분리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의미 깊은 사건이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한 가지 사명을 주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니라“(행 1:8). 바로 이 사명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겉옷’은 또한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을 뜻하며, 옷이 네 깃으로 나누어짐으로 옷의 형체가 없어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 나라 곧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결국 나라의 존립성마저 잃게 됨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일한 민족임을 자랑하던 그들이 세상 사방으로 흩어짐으로 나라는 없어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 남게 됨을 계시한 것이다. 결국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은 로마에 점령되어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진 것이다. 무려 약 110만 명이 학살당하고, 약 9만 7천 명이 살아남아 포로로 잡혀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는 참혹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말대로 받은 것이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4-25) 함과 같이 그들 스스로 자처한 그 죗값대로, 유대인들은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으로 정죄 받으며 씨가 말려지는 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흩어짐으로 십자가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율법으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오히려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새로운 선민들이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하는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열매를 맺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인과 똑같이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있어도 선민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 새로운 이스라엘인 이방인 교회가 탄생됨을 말씀하여 주셨다. 신약 성경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즉 이방인 교회의 탄생과 사역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짐으로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잉태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광을 입게 되어 하늘나라 백성으로 신랑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아버지와 영원을 살게 된 것이다. 이는 구약 호세아에서 이미 예언된 일이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 9:25).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은 율법과 혈통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새로운 선민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열매 맺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탄생되고, 사도바울은 그들을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 예수님의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기를 한 것일까?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는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8). 예수님의 ”속옷”은 위에서부터 하나로 통으로 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속옷은 씨줄(수직의 실)과 날줄(수평의 실)로 불리는 두 줄의 실이 만나 고대 식으로 만드는데, ‘날줄’은 남성을 상징하고 ‘씨줄’은 여성을 상징하여 남녀가 연합해 새 생명을 잉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시 입으신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짠 것으로 ‘날줄’로만 짜서 만든 특별한 옷이었다.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낱줄’로 짠 속옷은 다른 속옷과 달리 ‘씨줄’이 들어가지 않고 통으로 짠 것으로 오직 대제사장들이 입는 옷이며, 때문에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통으로 짠 속옷을 입으셨다. 이는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셨음을 계시한다. 그분은 진정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죄악을 없이 하시고 둘로 나뉘어 있던 담을 허물어뜨리고 화평을 이루어주신 대 제사장이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 20). 그러므로 예수님이 입으신 통으로 짯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아 한 사람이 취하게 하신데는 우리에게 아주 깊은 영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성령 잉태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굳이 예수님의 속옷은 오직 남성을 상징하는 날줄로만 통으로 짠 옷이라고 강조함으로 예수님의 성령 잉태를 계시해 주고 있다. 즉 예수님은 낱줄과 씨줄로(수직과 수평) 불리는, 남성과 여성의 연합체로 잉태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아들이시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 이심을 상징하는 증거이다.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19:23). 그분은 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죄인의 씨와 상관없으신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당신의 영으로 잉태하신 거룩하신 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은 그 문자 하나 구절 하나 아주 섬세하게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만을 설명하여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처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한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육신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인성을 가지신 ‘인자’ 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굳이 죄인의 몸을 빌려 죄인의 육신 안으로 뚫고 들어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향한 그 구원이 얼마나 완전하시고 온전하시며 얼마나 거룩하신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의 유전을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에게 전가시킴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진 죄인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깡그리 철저히 도말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죄를 뒤집어쓴 육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죄의 유전이 철저히 영원히 죽어서 소멸된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을 입으셔야만 인간을 대표하여 인간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킬 수가 있으며, 죄를 짊어지신 육신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여만 우리를 영원히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향하신 구원은 영적인 진실과 육신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영원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로 영원히 함께 살게 하셨다.
둘째, 하나의 연합을 상징한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영원에서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죄인과 하나를 이루시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의 영광의 성취를 상징하는 계시이다. 그리하여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즉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어짐으로 죄의 담이 무너지고 죄인이 하나님의 앞으로 나아가 하나가 되는 화평을 이루어 주셨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화평과 화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그분은 본체가 선이요 생명이시며, 둘로 나뉠 수 없으신 ‘하나’의 통일체로 계시는 진리이시기에 인간처럼 선과 악이라는 구조로 둘로 쪼개는 일이 없으신 한 인격체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의 성품을 따라 그분이 입으신 속옷은 오직 남성을 상징하는 날줄로 통으로 짠 옷임을 굳이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다. 만물은 오직 ‘하나’의 본질을 따라 ‘선과의’의 통일을 이루시기 위한 진리이며, 때문에 그분은 둘로 나뉠 수가 없는 절대적 진리이시기에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포하셨으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즉 그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하나로 계셨음을 가리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셨으며, 동시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라고 십자가로 하나를 이루심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입으신 속옷은 오직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는 통일체를 상징한다.
셋째,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선포하심으로 영적으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함몰되어 하나가 됨을 제시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가 된 신부들이다.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하나로 혼인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십자가 희생으로 대가를 지불하셨다. 우리를 당신의 정결한 신부로 아버지의 아들로 잉태시키기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사형들에 못 박은 것이다. 그렇게 완전한 하나를 이루어주셨음을 계시하여 그분이 입으신 속옷은 하늘나라 위로부터 이 땅에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영원한 화평을 이루시는 사랑의 연합체를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영생에 이르는 그분의 부활의 속옷을 받아 입음으로 그분과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된 신부임을 계시하여 나눔이 없이 통째로 한 사람이 취하는 제비 뽑는 일이 십자가 현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6:54)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자는 신랑 예수와 영생을 사는 영원한 사랑의 연합체로 완성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이제부터 나는 그분에게 완전히 속한 영원한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부터 하나로 묶어진 사랑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 안에서 나를 향한 그 세심한 섭리와 한없이 입혀주시는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게 됨으로 하나로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을 낳는 기적과 능력이며, 이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매일 매 순간 점점 더 깊이 체험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우리는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 안에 있어 예수님과 하나가 된 존재이며, 그분의 살과 피로 잉태됨으로 우리 안에는 그분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6:54)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의 속옷은 한 사람만 하나로 취하게 하셨을까?
통으로 짜인 예수님의 속옷, 즉 예수님과 하나로 사는 영생의 옷은 이 세상 땅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입혀지는 옷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자에게만 입혀지는 어린 양의 피로 물듯 거룩한 흰옷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굳이 네 군인 중 제비 뽑은 한 사람만 가지게 되는 특별한 장명이 십자가 밑에서 연출된 것이다. 땅 끝까지 이 세상 모든 만방에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중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영생의 속옷이 통째로 입혀지는 은혜가 입혀지게 될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하나님의 구원에은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분은 오직 선택한 자기 백성에게만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은혜의 특권을 입혀주신다. 바울은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엡2: 1). 그 ‘진토와 거름더미’ (삼상 2: 8)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도 빠짐없이 보존하신다고 주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 9).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 17: 12).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만 당신의 거룩한 영인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 세상과 구별하시고 분리하심을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옷, 즉 생명의 옷은 모두에게 입혀지는 옷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통째로 입혀주셔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원히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됨을 십자가 현장에서 제비 뽑아 한 사람이 취하는 선명한 그림으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생명의 옷,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은혜의 겉옷으로 감싸주셔서 영원한 하나로 영원을 살게 되는 그분의 한없는 은혜와 끝없는 사랑을 다윗은 미리 보고 찬양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오직 자신이 선택한 자녀에게만 당신의 의로운 영으로 잉태되는 영생의 은혜를 입히시고 하늘나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 선택에서 제외된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심판의 표를 받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잠시 이 세상에서 죄가 무엇이며, 그 죄가 얼마나 추악하며, 그 죄의 결과는 저주와 죽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악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라는 전제적인 운명을 가지고 각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여러가지 역할로 쓰임을 받는 것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을 진흙 한 덩어리로 묘사하고 하나님을 토기장으로 묘사하여 토기장이가 처음부터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정하셔서 만드셨기에 천한 그릇은 이 세상에서 천하게 쓰임을 받는 것이고, 귀한 그릇은 귀하게 만드셨기에 긍휼과 은혜를 담아주시고, 천한 그릇에는 진노를 담아주신다는 것이다. 모두가 진흙으로 빗어진 죄인의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는 긍휼과 구원의 그릇으로 예정하시고 구별하셨다는 말씀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1-23)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죽을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태어나면서 죽는 자도 있고,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자도 있고, 꽃다운 청춘에 죽는 자도 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심판 앞에서 무용지물이며, 아무도 죽임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함으로 인간의 생사 환난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만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오만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롬 1:28). 그러한 자들의 갈 곳이 바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이며 그들에게는 공평 지당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온갖 악행을 서슴없이 행하게끔 내버려 두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 28).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 자체가 ‘없음’ 이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말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왔기에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먼지이며, 본래부터 ‘진토’ 와 ‘거름 더미’ (삼상 2: 8) 와 같은 없음의 존재이기에 땔감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니라” (사 40: 15-16).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 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사 40: 22-24).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 6-7).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물 한 방울, 티끌, 먼지, 메뚜기, 초개와 같은 악으로 채워진 거름더미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 존재 자체가 죽어있는 상태이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올리사” (삼상 2: 8). 이것이 구원받기 전 죄인들의 실체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쓰레기요 거름 더미와 같은 죄악과 저주에서 구원받았다고 확실히 말씀하여 주고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양을 삼키는 이리, 토한 것을 먹는 개, 배설물과 뒹구는 돼지, 썩은 송장인 회칠한 무덤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흙의 존재에서 하나님은 일부만을 택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나머지는 그냥 소품으로 쓰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교훈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옷을 입혀주지 아니하셨다. 벌거벗은 그 모습이 바로 인간의 본 모습이며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는 투명한 그 자체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자 육신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수치로 여기게 되었고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이 세상의 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게 되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세상의 힘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들로 자신을 치장하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아담이 나뭇잎으로 만든 그 옷은 이내 말라비틀어지는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는 헛된 수고로 돌아가는 옷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스스로 만들어 입은 옷은 곧 말라비틀어져 없어지는 멸망을 고하는 옷이다. 그런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달려 있었고, 그분의 생명의 속옷이 죄인에게 무상으로 입혀지는 은혜의 장면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펼쳐진 것이다.
예수님은 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겼을까?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죽어 가시면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는 당황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마리아에게는 분명 야고보를 비롯한 여러 자식들이 있기에 얼마든지 지극정성으로 돌볼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굳이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긴 것이다. 이는 이 세상 육신의 가족이 깨지고 영으로 하나가 되는 새 가족이 십자가 복음으로 새롭게 탄생됨을 십자가 위에서 선포하는 증거이다. 즉 십자가 죽으심과 십자가 부활과 함께 육신의 가족이 깨지고, 새로운 가족, 즉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지체, 새 교회의 탄생을 상징하여 주님은 굳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직전에 제자 요한을 마리아의 영적 아들로 엮어주는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 인간이 묶어놓은 육신의 가족의 파멸과 하나님이 묶어주신 영적 새 가족의 탄생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마 10:34-39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막10: 29-30
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가족이 곧 자신이며 그 가족에 대한 애착과 집요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즉 내 가족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수단과 힘으로, 나의 가치와 살아갈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가족은 반드시 파멸됨으로 주님은 검으로 오셔서 끊어내는 불화를 일으킨다고 말씀하신다(마 10:34-39). 그리고 십자가 부활로 새로운 영적 가족이 탄생하는데, 그 가족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가족(교회)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가족이며, 한 가족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가족, 즉 교회의 탄생을 말씀하셨다. '집이 백 배요, 자매가 백 배요, 어미가 백 배요, 자녀가 백 배요, 토지가 백배되는 복을 받을 것이며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막 10:30). 즉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땅 끝까지 사방 곳곳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구원받아 죽음에서 살아올라 오게 되는 새 생명의 창조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어 감을 주님은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진토를 백배로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품에 하나로 안겨 영생을 살게 됨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구절에서 “아버지”만 쑥 빼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형성되는 가족을 ‘형제와 자매와 아버지와 어머나’라고 첫 구절에서 열거하시고(막 10:29), 두 번째 백배로 얻는 새로운 영적 가족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빼시고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막 10:30)를 백배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백배로 설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이루어 지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아버지는 단 한 분이시며 만백성의 아버지가 되심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렇게 오직 아버지 한 분만을 모시고 영생을 사는 새로운 영적 가족, 즉 교회의 탄생은 옛 가족, 즉 육신의 가족 파멸에서 탄생됨을 주님은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막 10:3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눅 12:49-53). 주님은 우리가 가족이라고 굳게 붙들고 모든 가치와 희망과 내 생명까지 투자하여 지키는, 즉 나의 힘과 나의 존재가치를 상징하는 그 육적 가족은 반드시 파멸되어야 하므로 주님은 이 땅에 검과 불을 주어 분쟁케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 분쟁은 집안 식구의 불화라고 말씀하신다. 즉 믿는다고 하는 한 가족, 한 교회 안에서의 영적 분쟁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 10:36)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의인의 탈을 쓴 악인, 양의 탈을 쓴 늑대, 선지자 탈을 쓴 삯꾼 강도 목회자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명의 천사로, 하나님의 종으로, 의인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식구로 가장하여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온 독사, 마귀들이기에, 주님은 이들에게 불을 던질 것이며,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분쟁을 일으킬 것이며, 반드시 검으로 악인을 갈라내어 지옥 불에 던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십자가 기준으로 아버지의 자녀로 탄생하는 새로운 영적 가족과 이 세상 가치로 똘똘 뭉치는 육신의 가족 간에 일어나는 분쟁으로 분리를 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 인간들이 똘똘 뭉쳐서 힘과 세력을 쌓아서 하나님께 도전하겠다는 바벨탑 쌓기를 흩으셨던 것과 같이,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분쟁케 되는 영적 싸움이 시작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는 또한 성도 안에서 옛사람이 진리의 검으로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죽어가는 전쟁을 치려야 하기 때문에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아들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는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됨으로 십자가 삶은 이 역사 속에서 분쟁으로 불로 검으로 감지된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하늘의 평화는 내 옛사람이 죽고, 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자기 집안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가치로 매기는 가족, 돈, 명예, 모두가 내 육신이 원하는 마귀의 탐심에서 나오는 자아 숭배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세상 배설물과 같은 오물들을 움켜쥐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자아’가 마귀이며, 그 마귀의 집착, 습성, 탐욕 등은 나를 죽음과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때문에 주님은 친히 우리 안에 검으로 들어오셔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 자신을 채우시는 싸움을 하시며 그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져 새롭게 탄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하는 새로운 영적 가족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 제자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를 주심으로 그 새로운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교회가 탄생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됨으로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진토를 백배나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새 가족의 탄생은 반드시 십자가 죽으심과 십자가 부활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새 가족을 주셨고, 그 새 가족의 탄생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탄생됨을 계시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창에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를 흘림으로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성도가 그분의 지체가 되는 교회가 탄생된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예수님의 갈비뼈로 탄생됨을 창세기 3장에서 첫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탄생시키는 그림으로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육적으로 형성된 가족은 십자가와 함께 죽고, 영원히 죽지 않고 아버지와 하나로 영생을 사는 새로운 가족이 탄생됨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가족 관계, 즉 신랑이신 예수와 하나가 되는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됨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곧 한 형제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심을 제시하여 주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내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었고 내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 되었다”라고 선포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영적 가족관계, 즉 성령님의 임재로 당신의 백성을 하나로 묶는 영원한 가족관계, 교회가 완성됨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 아버지 한 분 안에서 영원한 가족으로 완성됨을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