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2]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요 14:16-25)
요 14:16-25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주님은 3년 넘게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실 때가 오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 없이 지내야 하는 허무함과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마음에 근심하고 있었다.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절대로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구하여 영원히 너희와 함께하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며, 그가 바로 “진리의 영”이시며, 너희 마음 안에 직접 들어와서 너희 안에 함께 계심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라고 위로하여 주신다. 그리고 그 ‘보혜사’가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실 ‘성령’이시며, 즉 예수님 자신이심을 제시하여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라고 밝히신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당신의 백성들에게 육신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오실 것이며, 그 영으로 오시는 자신을 가리켜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으로 부르고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14:15-1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첫 번째 보혜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육신으로 오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육신으로 가르치고, 말씀을 선포하시고, 능력으로 기적과 표적들을 행하셔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여 주시는 “보혜사”의 역할을 하셨다. 보혜사(保惠師)는 지켜주신다는 보(保), 은혜라는 혜(惠), 스승이라는 사 (師), 즉 ‘은혜로 보호하시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함께하여 지켜주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입혀주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즉 그분은 친히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이 주신 말씀의 진의를 설명하여 주시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하지만 오직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들어오시는 영이시기에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라고 확실하게 오직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들어오셔서 함께하심을 구분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어떤 분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며 그분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이제 육신을 입고 오신 모습으로 일하시지 아니 하시고, 영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나로 계시는 방법으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 이루어 가실 것임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주님은 이제 그 십자가 구원을 사랑으로 성취하시고, 육신이 아닌 영으로 즉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즉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예수님의 본체이신 영으로서의 보혜사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성령의 권능으로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하실 것이며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6-27).
사도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부르기에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와 같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심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주님은 태초로부터 아버지와 하나로 계신 분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한 본질, 한 성품, 한 인격을 가진 아버지 품속에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영원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로 계셨음을 말씀하셨다 (요 10: 30). 즉 본질상 아버지 품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 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리하여 주님은 장차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실 때, 그 성령님은 아버지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또한 성령 하나님으로, 즉 삼위 하나님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됨을 강조하여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성도가 인격적인 동거 안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되며 또한 성도의 최종적인 신앙생활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8)
주님은 마음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성령으로 와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고아”란 말은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제자들은 모두가 육적 부모를 가진 자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잠깐 육신적으로 떠났다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제자들을 향하여 의지할 곳 없이 버려진 ‘고아’라는 단어를 쓰신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며, 그 안에 그리스도 영이 없는 자는 ‘고아’와 방불한 존재임을 제시하신다. 즉 제자들의 현 상태가 바로 ‘고아’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안다”(14:20)고 말씀하신다. 이제 주님이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시고 다시 오시는 그때에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되실 것이며,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며, 너희를 죽도록 사랑하는 내가 보혜사 성령으로 너희에게 다시 와서 너희 안에 하나로 있을 것임을 약속하여 주신다. 이제 주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자신의 영으로 낳아주시는 부모가 되어 주실 것이며, 가르치시는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이며, 생명의 꼴을 먹이시는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며, 무엇이든지 다 구하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며, 사랑을 속삭이는 신랑이 되어 주실 것임을 계시하신다.
”고아”라고 부른 또 다른 의도는,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 세상에 속한 육체를 말하며, 바로 자신이 자신을 주장하는 욕망으로 ‘자아’를 추구하는 무정부 상태를 가리킨다. 주님은 하나님 없이 내 탐심과 정욕으로 살다가 결국 죄와 사망으로 버려지는 자들을 ‘고아’라고 부르신다. 그런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지만 반드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영원히 함께하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됨으로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14: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 세상에 버려져 고아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하나로 사는 아버지와 화평을 이루어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은혜를 입혀주시려고 잠시 떠나지만 곧 오시기에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오직 성령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만 이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가 되며 주님이 나의 영원한 신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먼저 '고아'의 삶을 살아 내셨다
두 번째로, 주님은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면서 잠시 버려지고 남겨져야 하는 그 상태를 ‘고아’라고 부르신다. 바로 이 세상에 잃어버려진 고아로 죄와 사망의 음부에 갇혀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먼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고아’가 되어 3일 동안 죽음에 갇히게 되지만 아버지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만물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권세를 받게 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 26:39)라고 몸부림치셨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우리 죄를 사 할 수도 생명을 줄 수도 없다 (히 9:22) 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육을 입은 그분이 육체로 감당하셔야 하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알고 계셨고, 죄인으로 정하여진 그때부터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하나로 계시던 아버지께서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신 아들로부터 등을 돌리시는 영적 단절로 ‘고아’가 되셔야 하셨기에 그 육적, 영적 고통이 너무나 심하여 땅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8:16, 29)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분께서는 육의 고난과 수치보다 더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버지와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이 하나로 계셨던 그분이 이제 아버지께서 등을 돌리심으로 ‘고아’로 버려져야 하는 그 영적 단절 때문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과 고통을 당할 그때는 아버지가 적실히 필요한 가장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정하여진 그는 죄인으로 계셨기에 아버지는 그에게 등을 돌리셨고, 아들은 아버지를 뵈올 수도 교통할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며 죄에 대하여 쏟으시는 아버지의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홀로 감당하셔야 하는 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었기에 주님은 “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라고 외칠 수밖에 없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그 외침에서 그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하고 더럽고 심각하기에 반드시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는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며, 반드시 죄를 멸하셔야 하며,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대가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고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죽임을 당하시는 ‘고아’의 고독함과 고통을 먼저 겪으셨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끊임없이 이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멸시당하는 버림받는 인생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받는 머리 둘 곳 없는 인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점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은 인간의 짓은 죄를 뒤집어쓰시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는 그 인생을 자처하시고 오셨다. 그분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셔서 유리하셨으며, 태어날 때도 거할 곳이 없어서 말 구유에 내동댕이쳐진 그 운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자기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고, 고향에서도 버림받아 벼락 끝에 떠밀리는 죽음에서 도망하셔야 하셨다. 수시로 유대인들로부터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죄인으로 취급받아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는 철저히 버려지는 인생을 사신 것이다. 죄인들로부터 몸이 찢기는 채찍과 고문과 수치와 조롱으로 만신창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세상은 그가 마지막 숨질 때 입은 옷마저 취함으로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수모를 당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의 죄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셔서 벌거벗은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것이다(사 53:1-12). 그분은 세상 불의에 대항하지도 않으시고, 죄인들의 폭력과 조롱에도 입을 열지 않으셨으며, 묵묵히 도살장에 끌러 가는 양으로 스스로 자신을 철저히 버림으로 우리를 얻은 것이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7). 세상 가치관으로 볼 때, 주님은 완전한 패배자로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버림을 받아 저주의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신 초라한 ‘고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얻기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지는 ‘고아’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에 죄로 만신창이 되어 고아로 버려진 우리를 영화로운 아들로 낳아주신 것이다.
주님의 그 육적 영적 고통을 시편에서는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밑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 22:14)라고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철저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못을 박으셔야 하셨으며,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셔서 온갖 고난과 수모와 멸시를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죄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시고 “다 이루었다” (요 19:28)라는 선포로 인간에 대한 극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이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벳푸 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지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죄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사랑과 평강과 은혜의 복을 내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우리는 그분께서 지불한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대가로 인하여 죄에서 완전히 해방 받아 영원히 무죄 선고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의인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되어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 8: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헤셨으며” (갈 3:13),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롬 5:7) 자들로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들로 거듭난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사랑이 성취되는 순간 고아로 있었던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를 입은 아들이 되었고, 신부가 되었고, 의인이 되어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 (갈 4:4-7). 죄와 사망에 덩그러니 고아로 버려져 있었던 우리를 아버지께서 독생자의 피로 구원하여 영생으로 잉태하여 주셨으니 누가 감히 ‘죄인’이라 정죄하랴. 우리는 이제 당당한 ‘의인’이며, 그분의 자녀이며 신부이다. 이 엄청난 은혜를 깨달은 자가 어찌 우리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을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도 사랑하건만 영원히 사는 영생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 그 영원한 복을 받은 자가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고아’였던 옛사람이 예수 육체와 함께 죽었고, 함께 사는 아들로 신부로 거듭나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이 세상 광야에서 고아로 버려져 죄와 죽음에 얽매여 있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 영원히 하나로 함께 사는 사랑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고아로 살던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의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영원히 아버지와 신랑과 함께 사는 새사람으로 잉태된 것이다. 함께 죽고 함께 산 자가 되었다.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께서 혼자 죽고 혼자 부활하신 사건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갈 2:20), 또한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골 2: 12).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내 안에 임하는 순간, 나의 모든 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영원히 없어지고 옛 죄인은 완전히 죽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죄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롬 7;4).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롬 6:6). 지금의 나는 새 생명으로 잉태된 의인이요, 아버지의 영화로운 자녀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 (벧전 2:24)가 된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깨달으라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마 16:24)라는 말씀을 주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죄의 영원한 사망과 생명의 영원한 부활을 공유함을 말하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죽이기 위하여 자신의 의로운 생명을 내어주시는 십자가였다. 하지만 내가 지는 ‘자기 십자가’는 나의 옛사람 죄인이 죄의 대가로 죽는 죄인을 매다는 저주의 사형들이다. 내 옛 죄인을 못 박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죽어야 만이 다시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활하여 그분 안에 함몰된 하나가 되어 영생을 살기 때문이다. 즉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 6-7) 함과 같다. 죄인은 반드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만이 다시는 나를 심판하는 법 아래 매이지 않고, 의의 생명으로 태어나 은혜 아래 있기 위함이다(롬 6:14). 고아로 살던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되어 우리 주님과 함께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아인 우리에게 입혀진 은혜로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사는 성도의 영적 축복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 난 자는 이제 더는 고아처럼 이 세상 육신을 좇아 탐심으로 무정부 상태로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성령님의 내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칭을 받았기에 더는 이 세상에 속한 고아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화로운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가 된 운명으로 사는 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 육적 존재는 진리의 영을 알지도 보지도 받지도 못하지만, 너희는 창세전 아버지의 아들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직 너희 안에만 뚫고 들어와 “너희 속에 계심으로” 너희는 그를 알게 되고 그와 동행하는 삶으로 그가 너희를 지켜주시고 가르치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심으로 너희는 더는 고아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14:19)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기”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육신에 속한 이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영의 일을 알지도 보지도 받지도 못함으로 죄와 사망에 갇혀있는 어둠의 존재들임을 가리킨다. 실제로 이 ‘세상’은 빛과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그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어둠과 공허와 혼돈’이며, 그러한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인간은 눈뜬 소경이기에 하나님이 빛으로 오셨음에도 빛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라고 요한은 이 세상 죄인들의 실존을 지적하고 있다. 어둠에 속한 인간은 태생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에’ 절대로 생명의 빛을 찾거나 구하지도 않으며, 오리려 빛을 비추어 주어도 배척하고 대적하며, 꺼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14:17)라고 이 세상의 실존을 지적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을 알아보는 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요 1:13). 그들만 예수그리스도를 빛으로 생명으로 알아보는 영적 계시를 받으며 내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생명을 얻게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7,19)라고 부활의 확신을 주시고 있다. 즉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을 사는 소망이 되셨기 때문이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겠음이라”에서 “내가 살았으니"라는, 주님의 생명의 본체를 말씀하신다. 그분은 태초로부터 계시는 생명이시기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이 소생함으로 오직 그분만이 생명이심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우리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셨다. 그중 비밀의 핵심은 바로 “내가 살았으니”라고 말씀하신 예수 부활이다.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육신에 속한 죄의 사망이요, 예수 부활은 영에 속한 새 생명, 성령의 법을 세우려 하심이다. "그 첫째 것을 폐하 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즉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부활은 영의 사건이기 때문에 육의 지성으로는 알 수가 없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실체로 보고 기록된 역사의 증거가 있지만,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성령의 예수는 육감으로 보이지도 이해되지도 믿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14: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도 살겠음이라"라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우리가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게 됨을 확실히 밝힌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즉 진리이시며 길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어 영생을 사는 자임을 확신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기에 주님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라고 선언하신다. 성령이 오셔서 각 사람에게 임하시는 그날에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어 하나가 되어 영원을 살고 있음을 내 영이 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구하여서 주관적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육체로 알 수 있지만 영으로 오시는 예수는 모든 이에게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신다. 오직 성령으로 알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이 확신하기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즉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야 만이 그분의 영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증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9-20)의 진의이다.
만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 구원은 생명과 소망이 없는 죽은 구원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 (고전 15:17)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진리가 있을 수도, 생명이라는 영생이 있을 수도 없으며, 하늘나라는 허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라고 주님은 생명이 부활에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라고 부활의 진리를 선포하신다. 죄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영이 내 안에서 새 생명을 잉태 시켜야 만이 나는 영생을 소유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뚫고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생명을 태동시키며 잉태하여 주신다. 부활 예수 안에 영생하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중생한 기쁨으로 부활의 예수 생명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뿔뿔이 도망하고 흩어졌지만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자 새롭게 거듭난 그들은 비로소 담대함으로 예수 부활을 전하는 참 제자들이 된 것이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아버지 안에
주님은 보혜사 곧 성령이 우리 마음에 뚫고 들어오시는 그때에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로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곧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 너희가 하나’임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심으로 너희가 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천지가 있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었기에 항상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권능으로 이적과 표적을 행하심으로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분으로서 본체가 하나 이심을 증거하셨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즉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예수님 스스로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일이며,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6:38)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하나로 계심으로 이 땅에서 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아버지 안에서” 행하시는 아버지의 일이기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4:10-11).
하나님은 창세전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성취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으로 탄생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택한 백성들의 구원과 하늘나라 입성을 아들에게 맡기셨고, 이 세상과 악한 자에 대하여 심판하는 모든 주권과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2-24).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이와 같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심판하시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심으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으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에 이르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이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나니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선포하심으로 영적으로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함몰되어 하나가 됨을 제시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가 된 신부들이다.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하나로 혼인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십자가 희생으로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은 완벽하게 하나의 빈틈이 없이 완전한 하나를 이루시기 위해 먼저 우리 몸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아기로 탄생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냥 하늘 위에서 육신으로 직접 내려오시지 아니하시고, 친히 죄인의 몸속 안에까지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10개월이라는 임 심기 간을 걸치고 아기로 태어나셨다. 이는 밖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몸 안에 들어오셔서 아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거침으로 모태 중에 형성된 모든 죄의 유전을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에게 전가시킴으로 죄의 뿌리가 뽑혀 나옴으로 우리를 깨끗한 자로 창세전 그리스도 생명 안에 있는 그 의인의 생명으로 회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정결한 신부로 아버지의 아들로 잉태시키기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진 육체를 죄인을 죽이는 십자가 사형들에 못 박은 것이다. 즉 아기로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부르셨으며, 죄인으로 정죄 당하시고, 죄인으로 극심한 고문과 고틍을 당하셨으며, 죄인으로 아버지가 쏟으시는 죄에 대한 심판을 십자가 위에서 받아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철저하게 영원히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주신 것이다. 즉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거룩한 영인 성령으로 잉태하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그분의 의의 생명, 죄가 없는 거룩한 영으로 잉태됨으로 죄가 있을 수도 죄를 짓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을 전가 받아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 (고후 5:21).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죄와 상관없는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잉태 시킬 수가 있다. 그분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본체인 성령으로 오셨기에 자기 백성의 죄를 감당할 수가 있었으며, 우리도 그분의 영으로 죄와 상관없는 의인으로 태어나 예수 안에서 하나로 연합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육체로는 우리와 똑같이 아기로 탄생하심과 동시에 자신의 의로운 영으로 잉태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운 생명의 씨를 우리 안에 심어 주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 즉 아들로, 신부로 태어나게 하셨다. 아들, 신부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안에 예수의 생명 씨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명 되신 하늘의 신랑이 이 땅의 죽음에 처해 있는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죽음이 삭제되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죄와 상관없는 의인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신부로 탄생시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써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써 났음이라”(요일 3:9) 함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향하신 구원은 영적인 진실과 육신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영원히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기 위해 인간의 육신 안에 친히 들어오신 구세주이시며,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신랑이시다. 사도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고백은 우리도 성령으로 잉태된 하늘나라의 아들임을 믿는 고백이다. 즉 죄의 종으로 살던 육신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영원히 죽고, 내 영은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버지의 의로운 아들로 탄생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 성육신은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의 기적이며 은혜이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요 3:16)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못 박혀 죽으시게 하심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심으로’ (롬 8: 32) 죄인에게 향한 완전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이다. 자신의 의의 생명을 죄인에게 내놓은 그 고귀한 사랑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 8-10).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남을 바꿀 수도 없고, 죽음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는 무력한 흙의 존재이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난 그 상태를 바꿀 수가 없다는 뜻이다. 나의 문제는 반드시 나를 만드신 그분만이 해결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드리셨으며 (갈 1:4), 우리는 그분의 ‘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옙 1:7). 십자가의 진리는 죄에 대한 심판의 공의와 죄인을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의 의를 이루신 데 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께서 지불한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대가로 인하여 죄에서 완전히 해방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다(롬 5:7). 그렇게 주님은 자신의 의로운 핏줄로 이어 주셔서 하나가 되는 생명을 입혀 주셨다. 즉 하늘의 신랑이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오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죄와 죽음이 삭제되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신부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 하나니”(6:56)라고 신랑과 신부의 영원한 사랑의 연합체를 제시하여 주셨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속한 천하고 천한 죄인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셔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입혀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향한 그분의 사랑은 이 땅의 말로 형용할 수도 또한 육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일이다. 오직 영으로 난 자만이 그 사랑이 하늘같이 측량할 수 없음을 충만하게 받음으로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어찌 패역한 죄인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어 영원을 살게 하시는 그 한없는 사랑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그 영원한 사랑을 증거하며 하나로 영원을 살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셨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바울이 고백하기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이제부터 나는 그분에게 완전히 속한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다만 죄인이라는 그 이유와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신 그 극치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여 우리 죄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증거이며 능력이시다. 이와 같이 삼위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그리고 우리 성도와 하나가 되신 그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부터 하나로 묶어져 있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육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겨드리며 내가 하나님을 붙잡고 내 기도와 행위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며, 더는 내 주관대로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구하는 자가 아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나를 향한 그 세심한 섭리와 한없이 입혀주시는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게 됨으로 하나로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을 낳는 기적과 능력이며, 이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매일 매 순간 점점 더 깊이 체험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살로 잉태된 그분에게 속한 자이며 우리 안에는 그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얻은 증거이다. 이보다 더 놀랍고 기적적인 사랑이 또 있겠는가. 이 위대한 사랑에 인간이 어찌 굴복치 않으며 어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은 이제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가 바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음을 알게 할 것이며, 이제 우리 안에서 성전 삼고 하나로 계심으로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심으로 사랑의 계명을 이룬 자로 진정 마음이 하나 된 그 사랑을 하게 됨을 미리 계시하여 약속하신다. 이 세상에서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자에게만 아버지의 사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이며, 그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며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씀이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우리”,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그에게 들어가서 거처를 삼고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23). 아버지는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조건도 대가도 행위도 공로도 없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입혀지는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입은 자는 반드시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 안에 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주님과 하나가 된 자는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러주는 통로가 되어 메마른 땅을 적시어 생명이 태동되어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확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라고 율법의 총 강령을 ‘사랑의 계명’으로 새롭게 구분하여 주신 것이다. 즉 율법으로 주신 사랑의 계명은 처음부터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의로움으로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계명이었다. 오직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함몰될 때만이 성령의 권능으로 지킬 수 있음을 제시하셨다. 즉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는 이제 성령이 그에게 뚫고 들어오심으로 사랑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안에 함몰됨으로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14:20) 하나로 연합된 그 상태가 바로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있는 증거이며, 그 넘치게 흐르는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주게 됨으로 사랑의 계명을 지킨 자가 되는 것이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그 사랑은 이 세상을 토대로 한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생명을 태동시키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이시다. 즉 죄와 사망에 빠져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나 보상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신적 사랑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라고 감개무량하게 외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아낌없이 주셨기에 십자가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어 그분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 바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깨닫는 만큼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음을 알게 되고, 영원한 생명까지 주셔서 영원히 함께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됨을 깨닫고, 확신하고, 믿게 됨으로 현실 속에서 매일 체험할 때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간적으로 잠시 마나 배우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나도 그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하물며 나를 창조하시고, 죄와 사망에 빠진 나를 구원하여 주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주시고 아무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노력도 없이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어찌 그 신적 사랑에 감동하지 않으며 어찌 나 같은 죄인을 신부로 맞아주시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현실을 매 순간마다 체험하는 바울이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 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분의 사랑이 한없이 쏟아부어지는 충만함과 변함없음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체험하고 있다. 매일 실수하고 넘어져도 꾸짖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무한으로 용서하여 주시며, 깨달을 때까지 인내하여 주시며, 사랑으로 권면하여 주시며, 오직 긍휼과 자비와 온유함으로 품어주시는 아가페 사랑을 매일 깊이깊이 경험하고 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또 신부로 잉태시켜주신 우리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내 이웃 형제가 사랑의 범주로 들어와 하나로 묶여있으니 어찌 차별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요한은 아주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요일 4:21).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17)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24)
사도 요한은 복음서 첫 서두에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으로 생명으로 이 세상 어둠 속에 뚫고 들어오셨음에도 세상은 그 빛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빛을 배척하고 꺼버림으로 어둠을 더욱 사랑하였다고 이 세상 죄인들의 실존을 지적하고 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리하여 주님은 이와 같이 어둠에 속하여 빛을 대적하고 빛을 죽이려는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알아보고 영적으로 영접하고 영적으로 믿는 성령의 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 11) 함과 같이 구원과 생명이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택에서 제외된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처음부터 진리의 영을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다고 확실히 제시하신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14:27),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아니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아니한다’(14:24)고 말씀하신다. 그리면 어떤 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며, 왜 이들은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가?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제시하시고 새 계명으로 다시 새롭게 제시하여 주셨다. 예를 들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자신은 부족함이 없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랑하며 (마 19:20) 영생을 확보한 것으로 확인을 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율법을 다 지켰으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라고 ‘이웃 사랑’을 제시하자 부자는 근심하며 사랑의 주님을 떠남으로 스스로 그의 율법 지킴이 ‘자기 사랑’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즉 그 청년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였으며,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가치로 여겨왔기에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이웃 사랑을 어긴 자였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그 청년은 이 두 가지 사랑을 모두 어긴 자로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의 의와 가치를 더 사랑한 율법을 범한 자로 폭로된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 대표로 등장하는 부자 청년을 통하여 이들의 율법 지킴의 초점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은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자기 의와 가치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였음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5: 42) 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향한 사랑과 이웃에게 향한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전환시켜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명예와 의와 영광을 갈취하는 자아 건설과 자아실현에 목숨을 건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는”(14:24) 패역한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세상 신으로 섬긴 것이다. 율법을 다 지켜 부족함이 없음으로 자신을 선한 자로 자칭하는 부자에게 주님은 너는 선한 자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율법에 묶여있는 죄의 종이며 절대로 영생의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이며 너의 계명 지킴이 바로 너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의과 영광을 내세우는 방패였음을 여지없이 폭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것이다’(요 12:43).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열심히 지킨 자로, 부족함이 없는 월등한 민족으로,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자칭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도 더더욱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유로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섬기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반항하고, 대적하며, 율법으로 교모하게 자기 사랑과 자기 집착을 덮어 감추고 정당화시키는 회칠한 무덤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가식적으로 행하는 종교의식과 가식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놓고 지킨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의를 세우고 그 의로 영광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데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도용한 것이다. 처음부터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열심히 ‘지켜 행하여’ 인간의 거짓된 의를 세워 하나님처럼 되라고 주신 의도가 아니다. 왜 육체를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법을 “지킬 수가 없는가?” 하는 인간의 패역함과 불가능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을 통하여 너희들의 죄 된 상태가 바로 열린 무덤처럼 죄가 목구멍까지 차고 넘친 상태이며, 그 열린 무덤에서 쏘다 져 나오는 것은 오직 추악하고 썩어빠진 시체 냄새가 나는 죄뿐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사도바울은 정의하고 있다. 즉 모태에서부터 전신에 차 있는 그 죄의 실체를 바라보라는 기능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의 실체를 인정하고 자신의 존재가치가 바로 ‘없음’의 먼지임을 자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한 법을 이용하여 악한 죄를 더하는 범법자가 된 것이다. 율법이 계시하는 진리는 저버리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숨 막히는 외형적인 세부 규칙들을 우스꽝스러운 정도로 규정해 놓고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로 자기들끼리 법에 묶어놓고 위선과 거짓 의와 교만을 자극하는 종교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율법을 지킨다는 명의로 사람들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아 존경과 높아지기를 추구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율법적 행위의 의를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위엄과 영광을 얻는 방패로 삼게 됨으로 그 마음이 더욱 교만하고 완악하고 패역함으로 하나님마저 대적하고 죽이는 적그리스도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서 주님은 그들의 율법 행위에 대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요 8:41)라고 그들이 행하는 율법적 행위가 바로 마귀의 행위이며, 그 마귀적 행위가 바로 죄의 본성인 ‘욕심’이라고 지적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즉 그들이 행하는 율법적 행위가 바로 ‘마귀의 욕심’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목이 굳은 독사의 새끼, 뱀,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감당이 안 되는 광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더러운 돼지와 다른 이들을 물어뜯는 개와 이리로 비유하신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해 벌거벗고 무덤 사이로 돌아다니며 쇠사슬로 묶어도 감당이 안 되는 군대 귀신 들린 광인을 등장시킨 것이다. 너희들은 비록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며 율법 지킴으로 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여 사람들의 높임과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의인의 행세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는 미친 광인과 같이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썩어빠진 무덤과 방불한 존재이며,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감당이 안 되는 목이 굳은 끈질긴 군대 귀신들린 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광인 안에 있는 그 많은 귀신들을 돼지 안에 몰아넣고 2천 마리의 돼지 떼들을 물에 직사 시킴으로 이들의 결국은 멸망의 심판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귀신들린 마음 상태가 노아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보다 더 악하여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됨을 선포하셨다(마 10:1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이 반대로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도’ (5: 44) 않았으며,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예수를 더더욱 대적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도 또한 그의 생명의 말씀을 지킬 수도 없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14:24).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였다고 자고 하였지만 실상은 ‘자기 사랑’이었으며, 선한 율법을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명예와 의와 영광을 갈취하는데 악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의 악행을 ‘일곱 가지 화’(마 23장)로 공포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우리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죄악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체임을 뼈저리게 들여다보게 된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 안에 들어와 있는 마귀적 본성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로지 자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악을 택하게 되어있다. 운명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고 사는 인생으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생각이든 행위이든 상관없이 죄인으로 태어남을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의인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는 마귀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화인 맞은 양심으로 아무 죄도 없으신 의인이신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죽이는 데까지 간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잔인한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것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독립적 주권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리고 죄인에게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늘의 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원과 생명을 오직 은혜를 입혀주시는 방법으로 선물로 조건 없이 주시기로 정하셨으며, 하지만 오직 당신이 택하여 놓은 백성에게만 주시기로 정하셨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마 1:21)이다. 즉 이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 속한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며,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뜻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9). 때문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게 되어 있으며,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 1:12-13)고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마 11:27),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옙 1:4) 성도들이며, 오직 이들에게만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함이라"라는 복음을 제시여 주신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 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 (갈 1:15)라고 고백하고 있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옙 2:5),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옙 2:8)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