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8]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요 11:1-16)
요 11:1-16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 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의 사랑
죽은 나사로가 다시 부활하여 살아나는 사건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모형으로 미리 보여주시기 위한 사건이었기에 나사로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비한 마리아의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11:2). 주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유독 여기서만 ‘사랑하시더라’(라고 각별한 마음을 주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11:5). 나사로의 가정은 평범한 가정과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오직 3남매로 사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이 필요한 가정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장으로 극진히 모셨고, 예수님 역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음을 ‘사랑하시더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10:38~42)에 보면,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르다는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 듣기를 좋아함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 것을 보아 한 식구처럼 지내는 각별한 사이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린 것이다. 나사로는 집의 기둥이자 가장이었기에 그가 세상을 떠나면 동생 둘만 남겨지는 그야말로 가련하고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동생들은 그동안 사랑하여 주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전함으로 모든 희망을 예수님께 건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소식을 받자마자 곧바로 달려오셔서 각별히 사랑하여 주신 오빠의 병을 고쳐서 살려 주시리라고 굳게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뜻밖이었다.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11:4)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틀이나 더 유하신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재촉하여 한시라도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위독을 알고 계시면서 즉시 떠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사실은 나사로의 완전한 죽음을 기다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각별히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은, 육신의 병 고침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세속적인 사랑을 초월하여 그 영혼을 사랑하여 죽음과 부활을 체험함으로 제자들과 세 남매에게 영생의 부활을 믿게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제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사로와 같은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들을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어 당신의 영으로 새사람으로 잉태되는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 즉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지체하신 것 자체가 바로 부활을 경험하는 사랑이었음을 실제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증명된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오직 생명으로 충만한 끝이 없는 영생으로 이어지는 사랑이며,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구원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측량할 수 없음으로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아무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노력도 없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임하는 선물이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수많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사는 인생 자체가 짐과 멍에를 지는 고해이며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저갱으로 빠져 들어가는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전부를 영혼까지 “이처럼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어 주시며 신랑이 되어 주시는 하나로 함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때문에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천국임을 감지하게 되며 믿게 된다. 우리가 믿는 신랑 예수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능력의 권능으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주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그분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감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이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을 기쁨과 복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 이 세상에서 잠시 육신으로 겪는 일들과 시험들을 복된 연단으로 간주하는 믿음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이 음침한 골짜기이든, 쏘는 사망이든, 나사로와 같은 평생 거지로 사는 인생이든, 나면서 소경으로 살든, 또한 인생길에서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사랑’으로 감지하게 하시며,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며, 사랑으로 인내하고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믿음을 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결국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여 주시는 주님과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 고난의 길을 자진하여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9).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셔서 그의 죽음을 허락하여 이틀을 더 지체하신 것은, 나사로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직 ‘예수만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만민에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연장하심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는 잠시 큰 실망과 시험이었지만, 결국은 오빠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신앙을 경험함으로 예수님에게 향한 믿음이 더 강건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의로 지체하신 것은 이들에 대한 주님의 독특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은 이들의 생각과 육신의 원함을 초월하여 주님의 때와 주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고 역사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세상 원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원리로 정하신 계획과 섭리로 일을 하신다. 그리하여 이 세상 육신에 묶여있는 인간은 그분을 알 수도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위독 소식을 알고 계셨음에도 나사로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려 이틀을 더 유하신 것이다. 나사로의 병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11:4). 앞서 9장에서도 ‘날 때부터 소경 된 것이 그 자신의 죄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9:2)라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주님은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저주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 소경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두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소경 됨을 통하여 그에게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빛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에게 있음으로 그 일을 위해 그가 소경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에게 맡겨진 역할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계시하셨다.
마찬가지로 잠시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슬피 울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됨으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11: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나사로와 같은 죽은 자들이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임을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가 정하신 계획대로 그분의 때에 따라 일을 하신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일을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의도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왕왕 현재에 매달려 현재의 것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하여 완벽하게 이루어주심으로 우리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며, 그것이 곧 영생을 얻는 가장 복된 미래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몽땅 맡기는 것이 곧 사는 길이며 이보다 더 안전하고 더 믿을 수 있는 분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특별히 고난과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심으로 당신의 자녀에게 그 시험과 그 시련에 합당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만민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많은 시험과 연단을 겪게 하셨으며, 거의 100세가 되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완전히 포기하였을 때, 하나님의 때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정하신 때와 계획에 따라서 일으키신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려 주시고 만민에게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에 걸리고 또 죽도록 기다리신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이해되는 영적 계시이다.
그러나 이 세상 원리로 사는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오로지 육신이 잘 되는 형통과 명예를 영광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하여 시편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시 73: 2-19).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추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의 삶을 정확하게 다윗이 묘사한 악인의 만사형통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구하는 기도 내용이 바로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없고 재앙이 없고”, “항상 평안하고”, “소득이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시 73:2-10). 모두가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자신의 유익과 안일만을 구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영화와 만사형통과 이름을 높이는 썩어짐의 영광이다. 온통 악인의 만사형통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 사항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이 열심히 구하는 기도 내용이며,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금식 기도, 새벽 기도, 철야 기도, 작정 기도,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와 같은 종교행위를 벌이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히브리서 11:35-39 에서의 묘사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양의 삶을 본받아 세상 속에서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도살당할 양 같은’(롬 8:36) 십자가 자기 부인과 죽음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과 핍박과 여러 가지 죽음의 위험을 당하면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를 인지하고 깨닫게 됨으로 그렇게 높고 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한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바울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라는 렌즈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사랑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이 내 아버지가 되시며 내 신랑이 되심에 너무나 벅차고 감격스럽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보다 귀하고 큰 목적이 될 수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육으로 당하는 고난도 고통과 핍박도 죽음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로 받아들임으로 꺾을 수가 없다. 잠시 흔들리기는 해도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 주님이 굳게 붙들어 주신다. 이들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와 동기와 목적이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7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기 위하여 유대 땅으로 가시려 할 때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줄곧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아왔고, 며칠 전만 하여도 돌로 쳐 죽이려 한 위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11:9-10) 라고 말씀하신다. 밤에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길을 잃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강도에게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낮에 다니는 사람은 밝은 빛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이 세상이 바로 밤이며 항상 위험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나 빛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 빛이기에 어둠의 권세가 덮치지 못하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으며, 빛으로 행하시기에 그 빛을 받는 자는 구원에 이르기에 실족하는 일이 없지만, 그 빛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밤이기에 실족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낮과 밤의 구별이 없이 밝은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내 안에 또한 빛이 있기에 실족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빛과 동행함으로 낮에 혹은 밤에 다녀도 어디로 가든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기에 실족하는 일이 없다는 고백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그 자체가 빛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바로 “세상의 빛이라”라고 선언하셨고, 그 빛 안에 있는 성도는 빛과 소금이라고 선포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빛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실족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빛으로 오셨기에 예수님 안에 함께 있는 자는 밤이 없는 낮이요 빛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때가 아직 남아 있기에 그 누구도 예수님을 건들 수가 없음으로 두려워 말라는 뜻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항상 낮으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때문에 성도가 비록 육으로는 이 세상 어둠에 갇혀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영으로는 예수님 안에 있는 빛이기에 이 세상 어둠의 권세가 절대로 그 빛을 끌 수가 없다. 비록 육신으로는 고난과 질병과 좌절과 절망과 같은 죄의 증상들과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러한 시련과 시험과 죽음들을 통과하여 육신을 벗고 영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에 합당한 새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빛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동행하기에 빛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이 세상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빛이며 소금이라고 선언하여 주셨다.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과 썩어짐을 막는 소금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을 어둠으로 정해 놓으셨으며 죄로 썩어 들어가 곧 멸망하는 심판으로 정하셨기에, 성도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가 없다. 그분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이 세상 어둠과 사망에서 빼내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세상 애급에서 빼내어 주시면서 ‘내 백성아 세상에서 나오라’고 명하셨다.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녀가 아니라 하늘나라 빛의 자녀이며 빛의 나라로 들림을 받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이지, 이 세상 어둠의 권세를 가진 마귀의 자녀가 아니기에 이 세상의 빛이 될 수도 또한 되어서도 안 되는 하늘나라 빛의 자녀이다. 밤에서 빛으로 옮겨진 자는 이 세상 어둠에서 탈출한 자들이기에 이 세상이 얼마나 추하고 악하며 곧 멸망과 지옥으로 치닫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절대로 그 어둠의 지옥으로 다시 들어갈 수가 없다.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빨리 탈출하여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록 육신으로 겪는 일로 낙심되고 실망되고 절망적인 환경과 사건에 말려들 때가 있지만 깨닫고 속히 그 죄악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영혼만은 빛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차 있기에 오직 하늘나라에만 소망을 두며 하늘나라의 빛을 향해 달려가며 빛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에서 다니는 사람처럼 불안해하거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모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함으로 영원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됨을 소망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빛이며, 이 어둠의 세상에서 사는 육신의 사람은 어둠이기에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캄캄한 지옥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제 그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을 ‘깨우려 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낮과 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바로 밤으로 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워서 빛으로 낮을 사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즉 당신이 우리를 영원한 빛의 사람으로 낮을 사는 자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 동안 밤으로 계시다가 낮에 부활하셔서 우리 죄인의 마음에 빛으로 들어오셔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내가 곧 세상 어둠에 갇혀있는 너희를 구원하려 오신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사로를 깨우셔서 밤으로부터 낮으로,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인도하여 내시는 주님의 사랑과 배려를 담은 말씀이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라고 표현하심으로,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을 얻기 위한 귀한 죽음임을 계시하셨다. 주님은 지금 나사로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주님과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에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육신으로는 비록 고생과 고통과 질병으로 죽지만, 성도에게는 진정한 내 고향집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 위한 과정이기에 복된 죽음이다. 그 옛사람 죄인의 몸이 영원히 죽어야 만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영생하는 생명이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옛 죄인이 십자가에 못을 박아 내 ‘자아’가 죽는 죽음이다. 완전히 철저히 죽어야 만이 죄와 상관없는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의인으로 탄생되기 때문에 성도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며 귀한 죽음이며, 주님은 “잠 들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이와 같이 예수와 함께 내 옛사람 죄인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내 새사람은 그분의 의로운 생명으로, 즉 그분의 신부로 부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죽음이기에 복된 죽음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을 자다가 곧 깨어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영적 의미를 알아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음으로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가 깨우러 간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나사로가 잠을 자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11:14)라고 그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신다.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죽음은 곧 다시 깨어서 일어나기 위한 ‘잠’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시 새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광을 입은 모습으로 회복되어 영생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은 마치 누에고치가 하늘을 날아 올라가는 나비가 되기 위해 죽음의 고치 상태를 벗어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기 위해 잠시 쉼을 얻는 잠과 같다는 말씀이다. 새로운 부활체로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위해 육신을 벗기 위한 죽음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이 있으며, 더 좋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소망이 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간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들을 잠들어 있는 것처럼 여기고 깨우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승리가 되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고난과 핍박과 죽음이라도 기쁘게 순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비밀이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사건이 바로 주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섭리임을 계시하여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라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1:15)라고 말씀하신다. 즉 나사로를 살리는 일에 너희를 동참하게 하여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부활을 믿게 함이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나사로가 죽어야 부활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 당신과 제자들이 계시지 않았던 것을 기뻐하셨던 것이며,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즉 제자들의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 나사로에게 귀한 죽음을 허락하신 것이다. 즉 성도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통과하여 영의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기에 귀한 죽음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향한 진정한 사랑이다. 이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신랑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영원을 사는 그 사랑이다.
이 귀한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제자들에게 심어 주시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마리아와 마르다의 소원대로 예수님이 나사로와 함께 있어서 죽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사로가 죽음으로 그를 살리시는 것이 제자들과 두 자매에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신앙에 더 큰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귀한 배려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나사로가 확실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이제 그를 살리는 일을 위하여 나사로에게로 갈 때가 됐으니 “그에게로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를 살려 부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고 말씀하시는데, 도마는 정 반대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는 지금 믿음 없는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유대 땅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으며 몇 번이고 돌에 맞아 죽을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고 하자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11:8)라고 제자들이 만류한 것이다. 도마는 이번에 다시 유대 땅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하였기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라고 말함으로 마치 주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영웅처럼 나서고 있다. 15절에서 이미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절대로 실족하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였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먼저 그분을 알고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에 늘 함께 있었으며, 수많은 능력과 기적들을 보았고, 진리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음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못하였고,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그분을 위해서 분주히 무엇을 해서 보여주는 자신의 의와 영웅 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진정 알지 못하고는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분의 일을 가로막으며 은혜를 욕되게 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망령된 짓들을 하게 된다. 육신으로 행하는 행위나 업적이 우선이 아니라, 영으로 먼저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영의 사람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분의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우선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서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기를 원하시며, 그분과 영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즉 우리는 나약하고 무력한 티끌의 존재임을 깨닫고, 그분 안에 거하여 그분의 섭리대로 움직여주심에 순종으로 받아들이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열심을 지켜보면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무게를 깨닫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모든 일에 기쁨과 순종으로 화답하며, 그분의 통로로 씀임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에 기쁨과 감사뿐이다. 그분은 자신의 계획과 섭리로 우리를 움직이고 계신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갈 1:15-16)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우리의 상상으로 판단하는 시각에서 하나님의 일을 헤아리는 어리석은 생각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시각으로 전환하여 영의 계시를 따라 ‘나를 위한 그분이 사랑이 어떻게 펼쳐져 가는가를 알아가며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그분의 선한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