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47)
요 8: 31-47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말이 너희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 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
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요한복음 30절에 보면 유대인 무리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8:30).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참 믿음의 특징을 제시하시고, 동시에 자칭 믿는다는 자들의 거짓된 믿음을 폭로하신다. 이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우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택함 백성이라고 자고하여도 이들의 본심은 마귀였으며, 하나님에게 향한 진실과 진리의 말씀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이 없었다. 오로지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의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며 지도자의 기득권을 세워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갈취하는 일에 목숨을 건 자들로 율법이 이들에게는 멍에와 짐이 되었으며 자신들을 얽매이는 사슬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에게 진정한 진리와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주신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은 거짓 믿음을 행사하는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마귀적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 참 제자가 되는, 즉 참 지도자가 되는 믿음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선포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 믿는 자의 특징이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포하심으로 성도의 존재 양식이 바로 그분이 주시는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즉 매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먹는 것임을 제시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매일 먹는 자는 말씀과 매일 동행하는, 즉 말씀과 동고동락하는 절대 떨어질 수없는 하나로 연합을 이루게 된다. 이 위대한 진리를 계시하여 사도 요한은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실상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육은 육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것과 같이. 영은 영의 말씀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으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부르셨다. 즉 말씀이 곧 생명이며, 말씀을 떠나서는 곧 죽음이기에 주님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 안에 거하는”것임을 제시하신다.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제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서 말씀을 먹이시며,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를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교제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시며,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주장하신다. 이와 같이 말씀이 곧 우리 마음에 생명의 법으로 새겨지는 하나가 되는 연합이기에 주님은 ‘말씀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생명의 말씀은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옥토에게만 심겨져서 하나의 연합체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지만,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는 말씀을 흡수하는 마음 밭이 아니기에 생명이 잉태될 수 없음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아주 선명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육신의 떡으로 보고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쫓아온 황폐한 무리에게 씨 뿌리는 밭의 비유를 주심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상태가 바로 돌짝밭이며 가시밭이며 길가임을 나타내셨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진 자:
마 3:19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자가 와서 그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씨는 밭에 뿌려져야 싹이 트고 살아 올라올 수 있다. 그런데 밭이 아닌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생명이 잉태되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길가는 자신을 나타내며 자랑하며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명예와 영광에 목숨을 거는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뜻한다. 이들은 하늘나라와 영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며, 때문에 생명의 씨가 그 속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흡수할 수가 없게 되며, 결국은 악한 마귀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이들의 마음이 이미 악한 마귀에게 빼앗겨 마귀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영생의 주님을 알아 불수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이들은 밖으로 나타나는 도덕과 윤리적 행위로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높아지기를 추구하는 외식하는 자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밭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언제든지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이름을 나타낼 수 있는 길가를 좋아하고 선택하게 되어 있다.
말씀이 돌 짝 밭에 뿌려진 자: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짝밭은 전형적인 종교인을 말한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로서 예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기적으로 이 세상 물질적 복을 얻어먹기 위해 처음에는 예수를 쫓는 일에 도에 지나치게 열광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에 조금이라도 손해나 흠이 되거나 환난과 핍박이 닥치면 곧 예수 를 부인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로 나온다. 예를 들면, 5병2어의 기적으로 하늘의 떡을 먹여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며, 장차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생을 설명하는 표적이었다. 그런데 그 기적으로 떡을 먹은 이들은 예수를 육신의 배를 채워주는 신으로 생각하고 떡 달라고 주님을 쫓아온 것이다. 주님은 이들을 돌짝으로 묘사하여 “너희가 나를 찾는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자신들과 어긋나게 사역하시며 듣기 싫은 진리를 말씀하시자 이내 진리를 대적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가 된 것이다.
말씀이 가시 떨기밭에 뿌려진 자: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는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생명의 씨가 싹트는 것을 막고 자라는 것을 막음으로 살아 올라오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어 일상이 돈과 쾌락을 쫓는 욕망으로 잡혀 있다.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종교가 개입되면, 이들은 곧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자신들의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는 방패로 삼게 됨으로 하나님도 믿고 세상 맘몬도 믿는, 즉 하나님 외에 자신의 유익에 해당되는 복 주는 신이라면 서슴없이 쫓고 섬기게 됨을 말한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까지 제단에 두 신을 모시고 제사를 드렸던 모습을 볼 수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얻어내지 못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풍요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단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줄곧 맘몬을 함께 섬겨왔다. 이 세 가지 마음 상태가 바로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하는 패역한 유대인들의 모습이며 이들은 말씀 안에 거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며 말살하려고 한다.
말씀이 성도 안에, 성도 안에 말씀이 거하는 참 제자가 되는 옥토 밭
마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하나님은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들은 돌밭과 가시밭과 길가였던 옛 사람을 갈아엎으시고 결실한 말씀의 열매를 맺는 옥토로 가꾸어 내신다. 즉 그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죽음으로 우리를 옥토로, 즉 당신이 거하는 처소로 만들어 주신다. 참 제자가 되는 일은, 그분이 공급하여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먹음으로, 나 자신 스스로 좋은 밭이 될 수없음을 깨닫는 자각에서 시작되며, 그런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시고 옥토로 가꾸어 가시는 그분의 열심에 점차 자신을 내려놓고 부인하게 되며, 온전히 하나님의 가꾸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되며, 나를 당신의 참 제자로 참 신부로 가꾸어 가시는 그분의 사랑에 함몰되어 죽어도 살아도 오직 말씀 안에서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살아가는 하나로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말씀 안에 거하는 참 제자의 믿음이며 진리를 깨달은 자가 누리는 자유이다. 그 자유는 내가 노력하는 행위와 업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덮음으로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연합으로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라고 주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말씀과 하나가 되는 진리
주님은 절대로 떨어질 수없는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씀 안에 거하는 연합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가지가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이신 그분 안에 거하는 연합이다. 그냥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그 상태에서 농부 되신 아버지께서 열심히 가꾸어 주심으로 가지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 열매는 나의 힘과 노력과 공로의 보탬이 없이 다만 포도나무를 꼭 붙들고 포도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맺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열매를 맺는 일이다. 무엇을 하는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거하여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이다”(요6:2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사도 바울도 말씀하기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엡4:13).
농부이신 하나님에 의해 갈아엎어진 옥토는 말씀의 씨가 떨어지면, 흙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그 씨를 달게 삼키며, 씨 또한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흙 안에 들어옴으로 둘은 하나가 되어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삼키는 자(흙)는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과 시험과 고통에 동참하게 된다. 벌레에게 먹힐 수도 있고, 폭풍과 비바람의 때림과 매 마름의 갈증과 같은 질고를 겪어내야 한다. 그 씨가 겪는 모든 것에 흙은 씨를 담은 일심동체이기에 모든 것에 동참하게 된다.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겪는 그 모든 십자가 고난을 말하며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며, 주님은 그 열매를 우리가 맺은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기에 가지에게 맺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이기에 그분을 따라서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함과 같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함께 산 자가 된 것이다(롬 6:11).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모든 일은 주님이 다 하셨음에도 열매는 가지가 맺은 것으로 여겨주신 것이다 (마 25:31-46).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어둠에 갇혀 저주와 죽음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생명의 양식을 먹여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시며, 각종 죄의 질병들을 고쳐주시고, 한없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입혀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들을 양들에게 전기시켜 주셔서 양들이 한 일로 말씀하셨다. 양들은 자신이 한 일이 없이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선물로 받았음을 알고 있다((마 25:37).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자들에게 임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신부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말씀으로 거하시기 위해 말씀으로 오셔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으로 들어가서 아기로 태어나는 세심한 과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신 것이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 안에서 말씀이 계시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주신 3가지 밭의 마음상태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 또한 우리들의 마음 상태를 말해준다. 모든 인간은 항상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을 자랑하고 자신을 내 세우는 길가를 좋아하며, 마음이 돌같이 강퍅하며,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져다 섬기는 엉겅퀴와 가시와 같은 죄만을 생산해내는 완전히 패역한 자들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을 대표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말씀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며 자신들이 의와 영광을 갈취하는 도구로 방법으로 수단으로 악용되기에, 이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들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말씀 안에 거하기를 싫어하며, 말씀을 배척하며 진리를 대적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외식된 패역함을 폭로하여 죄인으로 해석하며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같이 말씀을 육신의 떡으로 먹게 되면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살인하는 마귀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말씀을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비수로 개조하여 폭력을 휘들이며, 결국 하나님의 아들마저 ‘죄인’으로 정죄하여 죽이는 악행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부른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두 번째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표지는 말씀 안에 거하는 진리를 아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자유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주는 권한이 주님에게 있음을 강조하여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라고 자유는 오직 예수 안에서의 자유임을 확실히 밝혀 주신다. 즉 ‘너희가 내 말에 거하여 진리를 아는것이’ 곧 자유이며, 그 자유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의지로 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해야 참으로 자유하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라 (39)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악행을 계속적으로 폭로하시면서 너희가 바로 죄를 범하는 죄의 종으로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라고 질책하자 심히 분노하여 “우리가 아브라함의 지손이라 남의 종이 된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8:33)라고 대항한 것이다. 주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이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8:39) 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만을 주장하며 언약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세웠음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혈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언약의 씨로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언약을 세우기 위해 부르셨다 (창12:2-3; 롬9:7-8).
아브라함은 이름 그대로 ‘믿음의 조상’이다.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순종하였으며’(히11:8), 믿음으로 자신의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히 11:17-19).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라고 자랑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행사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언약으로 오신 메시아를 멸시하고 대적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살인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귀의 특징대로 정확하게 마귀의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여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8:40)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마귀의 행사를 하는 죄의 종이기에 아들이 거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너희는 절대로 거할 수없음을 밝혀 주셨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8:35).
이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말씀을 받았다고 자칭하며 율법의 말씀을 지켜 행하였다는 근거로 자신들의 의를 내세워 세상에서 영광 받기를 추구하며 율법으로 연약한 자의 잘못을 참소하여 죽이려는 마귀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율법을 범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악용하여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하여 예수님을 율법 범한 자로 죄를 뒤집어 씌워 공개적으로 처형하려고 올무를 놓는 파렴치한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이 자행하는 그 죄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됨으로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 즉 너희가 지금 진리의 말씀으로 온 나를 대적하고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8:40) 너희가 바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죄의 종이며, 너희가 행하는 그 모든 일이 바로 마귀의 행사임을 확실히 증언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라고 이들이 바로 마귀라고 확실하게 선고하신다.
인간이 원하는 자유와 죄의 종의 모습: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오로지 나에게 적용하여 내가 하고 싶은 내 ‘자아’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이 정의하는 어떤 외부적인 속박이나 억압이나 규제로부터 벗어나 내 의지와 힘을 발휘하여 내가 원하는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타고나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죄에 묶여있기에 그 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절대로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죄이며, 그 죄에 묶여 있는 종임을 알지 못함으로 상대방을 내 자유를 빼앗는 적으로 오인하게 되며, 시기, 질투, 미움으로 저항하게 됨으로 더 깊은 갈등과 싸움과 전쟁과 살인의 연속으로 인간은 더욱 악한 변태를 낳게 될 뿐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다. 즉 죄가 있는 한 ‘자유’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최초 인간 타락에서 명백하게 보여 주셨다.
첫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하게 된 이유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유를 망상하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속박으로 오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잘못된 ‘자유’를 미끼로 던져준 마귀의 유혹으로, 인간은 스스로 생명의 말씀을 거역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의 품을 떠나서 마귀가 지배하는 죽음의 고통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첫째는 마귀에게 종속된 ‘마귀의 후손’이 되어 마귀의 본능을 따라 죄를 행하는 죄의 노예가 된 것이다. 둘째는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게 되는데 그 되돌림을 받은 땅이 ‘엉겅퀴와 가시’로 저주 받음으로 이제부터 하나님의 생명력을 떠난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와 가시와 엉겅퀴로 덮인, 즉 죄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 결국은 한줌의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죽음임을 선포하셨다. 셋째는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즉시 구원하기로 선택한 당신의 자녀를 “여자의 후손”으로, 그 나머지는 “사단의 후손”으로 분리시키고 이들의 결국을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역사는 이제 이두 영역간의 영적 싸움으로 시작되며, 당신이 택한 자녀는 영생으로, 그 나머지는 영원한 죽음의 지옥으로 심판하실 것임을 계시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저지른 일이 바로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살인이었다. 인간이 따낸 소위 ‘자유’라는 것이 바로 나의 유익과 나의 위상과 나의 존재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존재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살인해야 하는 ‘저주’이다. 자유는 자신이 신처럼 되어 다른 이들을 군립하려는 탐심과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상대방을 적으로 인식하며 통제하여 종으로 만들려고 한다.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끝없는 다툼과 전쟁과 분열과 살해로 이어지며,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행사하는 죄의 종이 된 실존이다. 마귀에게 종속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마귀의 자손으로 태어나 마귀의 본능으로 마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 죄가 지향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어 다른 이들을 통제하려는 높은 자리 쟁탈전이다. 죄란 하나님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생명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주관하려는 어리석음이며 그러한 시도와 노력이 오히려 죄가 죄를 낳는 사망이 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귀에게 종속되어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의 사슬에 묶여 얽히고 설켜져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인간의 결국이 바로 죄에서 태어나 죄 속에서 죽는 멸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마귀에게 종속되어 죄의 종으로 죄에 죄를 더하는 완전 패역으로 가는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와 영광과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해 끝없는 외식과 거짓으로 의인으로 위장하고 자신들보다 못나 보이는 연약한 자들을 향해서는 ‘죄인’이라 정죄하여 죽이려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마저 멸시하고 조롱하고 대적하여 죽이려는 마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의 마귀의 정체를 완전히 폭로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이며 그 마귀의 특징이 바로 자기 욕심에 끌리는 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는 거짓말쟁이다(8:44)라고 이들의 마귀 모습을 그대로 폭로하신 것이다. 그러자 이들은 극구 자신들의 죄악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거짓 결백을 주장한 것이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8;41).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8:41)라고 확실하게 폭로하셨음에도 자신들은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8:42) 라고 다시 거듭하여 증거하신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증언들을 주셨다. 그럼에도 끝까지 하나님마저 판단하는 대척점에 서서 진리의 말씀을 역으로 행하며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는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의 육은 날 때부터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범을 섬기는”(롬 7: 25) 자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육은 오로지 내 육의 편리와 유익과 탐욕을 채우는 ‘자아’를 세우는데 출발점을 두고 있다. 때문에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는 ‘배설물’ 과 같은 죄덩어리 뿐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배설물’ 과 같은 공로와 업적들을 열심히 쌓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귀의 행사’ ‘회칠한 무덤’, 군대 귀신 들린 광인, 더러운 돼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 독사의 새끼라고 부르고 비유로 묘사하신 것이다. 육에서 나온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무가치하며, 오히려 율법주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일이며 심판의 근거를 쌓는 일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죄의 근성과 독사와 같은 죄의 잔인성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들여다보게 되며, 그 많은 패역한 죄인 중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바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은혜이며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은 저 끝없는 하늘높이처럼 영원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시려고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타락으로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은 죄에 묶여있는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시기 위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오신 분이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님이 바로 십자가에 죄인으로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의 모든 죄를 담당하심으로 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신 우리의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그리하여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시고 그 진리가 바로 당신임을 제시하여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라고 선언하신다.
인간의 탐심은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하는 것과 같이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본성이 극토록 타락함으로 마귀에게 종속되어 마음속에 이미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그 삯은 사망이다. 진정한 자유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이루어진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멍에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 오르셨으며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심으로 모든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영원한 자유를 주셨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선포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히 철저히 사면해 주심으로 죄 아래 갇혀 있던 죄인이 죄의 종에서 풀려나는 영원한 해방을 받아 자유한 자가 된 것이다. 동시에 마귀의 자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전환되는 영원한 생명이 임하는 축복이 된 것이다.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함과 같다. 두 번째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문의 계명을 다 이루셨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 7:4),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이루시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 함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 지성소의 휘장은 천국의 문을 상징한다. 이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그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화평을 이루사,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를 두고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엡2:15). 그리하여 주님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라고 선포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권고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자유를 현실로 이루어주시는 그림을 아주 선명하게 자신의 첫 사유에서 나타내어 보여주셨다. 천국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 뚫고 들어오시자 아무것도 행하지도 또한 행할 수도 없이 죄의 사슬에 묶여 저주의 대상으로 취급받던 죄인들이 각종 질병에서 풀려나고,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인간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한 문둥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되고, 눈먼 자가 소망이 보이고 귀머거리가 복음이 들리게 되고, 죽은 시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는, 각종 죄의 증상에서 해방 받아 자유의 몸이 되는 기적들이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라는 진의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 세상에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한분뿐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라고 절대적 진리로 제시하여 주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풍성히 채워질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의 진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