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은 [16] 추수에 동참하는 제자들과 왕의 신하의 믿음 (요 4: 31-54)
요 4:30-34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로 마을 사람들은 주님께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제자들이 양식을 갖고 와서 시장하신 주님께 음식 드시기를 권하였다. 그 때 주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 라고 육신의 음식이 아닌 다른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치 육신의 해갈을 위한 ‘물’을 구하는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말씀하신 것과 같이, 육신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늘의 양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즉 주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아버지와 화목을 이루시는 십자가 구원성취임을 제시하셨다.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4:34).
주님께서 행하실 하나님의 뜻
요 6:38-40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며,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주신 자녀를 하나도 잃지 않고 살려내는’ 일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하는’일이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장차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모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십자가 구원성취가 바로 주님이 드실 양식이라고 제시하신다. 한마디로 주님이 죄인을 살리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이 주님의 양식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양식은 살기위해 먹어야하는 필수적인 것이며, 양식이 없으면 죽음이라는 것을 누가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사는 양식이 된다고 역설로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방법이다. 땅의 존재들은 무엇이든지 채워야 사는 것으로 인식하고 탐심과 욕심과 야망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떡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자신의 배에 집어넣어 자아를 건설하고 확장하고 실현하는 성공에 열혈되어 있다. 그렇게 썩은 것을 채워서 가는 곳이 바로 썩은 무덤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들을 주님은 ‘회칠한 무덤’, 즉 겉으로는 가득 채워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썩어있는 마음상태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죽는 것이 사는 양식이 된다’고 역설로 말씀하신다. 즉 굶어서 목말라서 죽어가는 사람이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는 그 절박한 갈증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이 구원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세상이 주는 양식을 점차적으로 끊게 됨으로 굶주리게 되고 목말라 죽게 되는 십자가 자기죽음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세상양식을 끊게 됨으로 굶어서 죽고 목말라 죽게 되지만, 그 죽음은 성도에게는 살기위한 귀한 죽음이며, 그 비워진 마음에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 즉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져 진짜 ‘배부른 자’로 영생을 살게 됨으로 그자가 복된 자라는 말씀이다. 바로 그 원리를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제시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육신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물동이를 던져버림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은 것이다. 똑같은 원리를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너희가
죽으면 살리라
요 12:24~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마 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태까지 자신의 탐심과 유익만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것들로 배부르게 살던 내 옛 사람은 반드시 세상 탐심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혀 죽는(갈 2:20) 죽음을 통과하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죄와 마귀의 종으로 살던 내 옛 사람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내 영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진리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매일 진리의 양식을 구하고 먹으라고 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끄집어내시고 광야로 인도하셨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곳이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처지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망의 음침한 광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황폐한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세상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옛 사람 애급인은 죽게 하시고,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만 먹고 태어난 새 사람만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주신 것이다. 세상 양식으로 채워진 옛 사람은 굶주려 죽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먹이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는 새 생명의 잉태를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육신이 죽는 금식을 시킨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라고 확실히 말씀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도에게 오직 당신의 의만을 필사적으로 구하고 갈망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는 구원을 이루시며, 세상과 격리시키는 광야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는 이 세상의 것으로 배를 채워 멸망으로 달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광야의 삶에서 이태까지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가 기각되고 부서지고, 깨지고, 빠져나가는 자기 부인의 가난으로 끌어내리시며, 죄에 대한 자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의만을 필사적으로 구하는 애통하는 자로 만드시며, 하나님의 뜻과 인도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온유한 자로 서게 하시며, 이제 굶주리고 목마른 사슴같이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받아먹는 진정한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내신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는 말은 곡식을 파종하고 최소한 넉 달은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됨을 가리킨다. 주님은 지금 일반적인 농사에서 쓰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추수하는 일의 긴박성을 알리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에 가서 ‘메시아가 왔다‘라고 복음을 전하자 마을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오고 있었다. 주님께로 몰려오는 이들을 가리켜 “보라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왔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추수의 대상은 바로 주님께로 나오는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이제 율법과 제사와 혈통을 목숨으로 지켜낸 선민이라 자처하던 유대교를 떠나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을 잃은, 율법과 제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개로 취급받는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선물이 은혜로 말미암아 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42절에 ‘세상의 구주’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주님은 유대인들만의 구주가 아니라 세상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구원의 ‘구주’ 라는 선포이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과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구원받은 자들을 추수 꾼으로 부르신다. 이들 모두가 처음에는 영생을 얻는 진리의 말씀을 이 세상적인 떡과 물로 받아들였던 자들이었다. 주님께서 영의 양식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물으면서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4:33) 라고 의아해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당신의 구원 사역에 추수 꾼으로 부르신 것이다.
36절에서, 거두는 자들이 나오는데 그 거두는 자들이 이미 삯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삯은 일을 해야 지불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아직 일을 하지 않았고, 삯을 받을만한 성과가 없음에도 먼저 삯을 받은 것이다. ‘삯’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정의를 주고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롬 4:4-7).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삯으로 비유하고, 그 삯은 행위에 근거한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의에 근거하여 선물로 얻어짐을 말씀하신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행위를 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의가 아니라, 일한 것이 없는 자,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그의 불법을 사하여주고 죄를 가려 주심으로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삯’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성취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는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가리킨다. 그 선물은 십자가 희생 제물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 선물을 받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미리 값을 지불하여 주신 그분을 믿고 두 손을 뻗어 선물을 받는 믿음이며,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기에 의로운 것이다. 그분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입어 구원을 선물로 받으라고 믿음이라는 수용적인 방법을 주셨다. 구원과 영생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값을 지불하셨기에 공로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 일한 것이 없는 자, 불경건한 자, 죄밖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완전한 죄인에게 거저 임하게 되는 선물임을 사도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삯’은 일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서 얻은 것이기에,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4:38)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삯에 대한 선명한 그림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체험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창녀와 같은 불경건한 여인으로 사람들로 부터 죄인이라 정죄 받아 멸시를 당하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받은 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전도자로 영생의 씨앗을 뿌린 그리스도와 함께 추수에 동참하는 기쁨을 얻게 된 것이다. 심령 속에 심겨진 영생의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뿌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두는 즐거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얻기 위해 구원과 생명의 씨를 뿌린 자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였음을 말씀하신다. 즉 구원과 영생을 얻은 너회는 이제부터 내가 뿌린 열매를 함께 거두게 됨으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한다‘ (4:36)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당신께서 뿌려놓은 생명의 열매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두게 하시는 동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자신을 생명의 씨앗으로, 가꾸고 열매 맺게 하는 분은 농부이신 아버지로, 성도는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표현한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일은 농부이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이지만 열매는 가지에 달리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열매를 거두는 추수에 우리를 동참시키는 그림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4:37).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요 4:3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씀이 사실임이 사마리아 땅에서 바로 제자들의 눈앞에 현실로 펼쳐진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서 육신의 양식을 구하고 있을 때,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생명의 씨앗을 주어 영생으로 거듭나는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이 가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을 동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뿌린 것이다. 그 열매를 거두는 일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한것 없이 동참만 한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추수할 밭이 무르익은 것은 예수님이 밭을 일구고 생명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구원성취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살아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와 영원히 굶주리지 않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복음을 명쾌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이 고향에서 냉대 받은 일에 대하여 누가는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눅 4:24-29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비록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가리키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유대 지방 전체, 특히 예수살렘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고 말씀하심으로 전체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항상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줄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대적하고, 핍박하고,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의 운명이 바로 선지자의 운명임을 제사하여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은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고향은 바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 전체를 가리키며,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여 자신을 선지자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왜 자기 백성에게 냉대를 당하였는지를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있다.
엘리야 시대 때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큰 흉년이 들어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돈 땅의 이방인 과부를 택하시고 엘리야를 그에게로만 보내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엘리야를 배척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인 과부에게만 보내셔서 그 과부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에게는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고침 받은 사람은 이방인 나아만 한분뿐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더럽고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의 적군인 아람 군대의 장관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문둥병에서 구원받았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한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일화를 들려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아브라함의 자손, 언약의 백성이라는 혈통으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자,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자,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과 은혜가 입혀지며,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증오하고 짐승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에게 임한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함이었다.
말씀에 근거한 왕의 신하의 믿음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예수님께서 갈리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요한은 그 왕의 신하가 찾아온 가나를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말은 주님께서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과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이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영원한 천국 잔치가 완성됨을 보여준 표적이다. 죽어 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도 역시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성취로 죽은 자가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성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사건이다. 그리하여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어 간다‘ 로 표현하시고, ’그가 살았다‘라고 표현함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이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됨을 보여줌으로 사도요한은 이 사건을 ‘표적’이라 부르고 있다.
왕의 신하는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셔서”(4:47) 라고 행동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행하여 병을 고치는 능력자로만 보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가려고 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온 것이 아니라 표적을 따라 왔기에, 주님은 왕의 신하와 표적을 믿고 온 모든 자들을 포함하여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48)라고 책망하셨다. 인간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가 없음으로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을 보고 예수를 환영하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리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기적에만 있었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이 누구신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을 살려 주실 분을 제대로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고 다만 아들을 살리려는 마음에 소문을 듣고 온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책망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다만 자신의 아들을 살리는데만 마음이 급하여 또 다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치유의 기적을 행하여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주님은 신하의 간청에 단 한마디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50)고 말씀만 던져주셨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갈릴리 모든 사람들에게 표적 행함이 없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만이 능력과 구원이 임함을 나타내시기 위해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말씀만 던져주신 것이다. 또한 기적만을 믿고 온 왕의 신하에게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주시려는 의도였다.
왕의 신하에게는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그 한마디가 신하의 믿음을 이끌어낸 것이다. 주님은 아들을 위해 신하의 집으로 가지도 않았고, 그 아이를 위한 기도도 하지 않으시고 ‘가라, 아이가 살았다’고 말씀만 주신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 함과 같이 즉각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아무런 이적도 증거도 없이 ‘살았다’ 이 한마디를 믿고 곧장 집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아들이 다시 새 생명을 얻은 것이고, 말씀에 근거한 표적으로 온 집안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아들을 살린 것을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표적을 보지 않고도 말씀을 믿음으로 그 말씀이 곧 현실로 이루어지는 더 기적적인 능력을 온 가족이 체험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바로 말씀에 근거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믿음이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실현 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임을 왕의 신하의 사건을 통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읽을 수 있다. 왕의 신하와 그 가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신하의 외아들에게 열병을 주어 죽게 만들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왕의 신하는 먼 길을 마다하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구원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선한 일이다. 우리의 세계관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택하셨기에 시작부터 완성의 지점까지 그분의 섭리대로 이끄심에 나 자신을 맡기는 순종으로 그분만을 믿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기적을 믿는 자들에게 대하여 2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3-24). 예수님은 기적을 믿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믿고 원하는지를 잘 알고 계시기에 그들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예수를 영접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속섬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외침으로 표적을 믿는 믿음에는 구원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접한 것이 아니라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자신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로 여기고 기적을 구하러 온 것이다. 사마리아인들과 선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오직 말씀으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말씀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로 거듭나게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여인은 자신의 체험을 말로 전함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었고” (4: 41), ‘친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시다’(4: 42) 라고 시인하는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즉 그들의 믿음의 동기가 바로 ‘말씀’이었다. 반대로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의 동기는 바로 자식들의 배를 채우는 ‘표적과 기사’였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 이런 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요 2:23-24). 왜냐하면 이들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님을 기적으로 보고 찾아온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요 6:26)고 이들의 의도를 지적하셨다. 오병 이어의 기적은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하늘의 풍요, 즉 영생을 설명하시기 위해 행하신 표적이었다. 그런데 떡 먹고 배부른 기적을 체험하자 또 다시 떡 달라고 예수님을 좇아온 것이다. 이들은 그 기적 속에 들어 있는 십자가 구원을 보지 못하였고 단순히 배부른 기적만을 열광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이신 것을 설명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십자가 구원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주님을 찾아온 자들에게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마12:38-40)라고 십자가 죽으심만이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구원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외쳐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진리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자존심과 가치관을 부수게 되면 언제든지 분노하고 대적하며 진리의 말씀을 죽이고 살해하는데 까지 가게 되는 인간의 극지에 달한 패역함을 성경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은 기적을 좇고, 체험에 의존하는 사람들이며 기적으로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채우는데 목적을 두기 때문에 기적이 사라지면 이내 마귀의 본심을 들어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 46)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구원과 영생을 입혀주는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표적과 기사로 믿고 있으니 어찌 구원이 있겠는가 라는 책망이다. 즉 표적에 근거한 믿음은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만이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됨을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내는 표적으로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곧 심판이라고 말씀하신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성도의 기도는 내 소원대로 이루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소원대로 이루어 지지 말고 당신의 소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