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의 진의

요한복음 [10]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3-15)

오직 은혜 2020. 5. 12. 09:23
요 3:13-15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혈통과 율법 지킴과 도덕과 윤리적 경건함으로 얻을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하지만 여전히 영의 일을 육의 일로 생각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시면서 거듭남의 본질에 대하여 민수기의 불뱀과 놋 뱀의 사건을 인용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신다. 즉 민수기에서 이야기한 장대에 달린 놋 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예표한 것이며, 그 장대에 달린 나를 바라보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어릴 때부터 할례를 받고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던 바리새인이며, 겸손과 학문적으로 완벽한 사람임에도 예수님은 그의 율법적 신앙을 모두 부정하여 “너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영에 무지한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진의를 알지 못하여 엉뚱한 질문으로 당황해하는 그에게 물과 성령의 거듭남을 말씀해 주시고, 그 거듭남은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처럼 나무에 들린 자신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니고데모에게 이제 네가 지켜온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믿으라 그리면 네가 원하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뜻이다. 거듭남이란 무엇을 해서, 공로와 업적으로, 경건한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을 쳐다봄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즉 내가 놋 뱀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구원이 성취됨으로 너는 그 십자가에 달린 나를 바라보고 믿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모세의 놋 뱀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구약에 능통했던 니고데모는 놋 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금방 민수기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니고데모는 더디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진의를 깨닫고 거듭난 자로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도 예수와 함께 장대에 매달려 죽고, 함께 부활하여 영의 사람으로 거듭남을 깨닫게 체험하게 됨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는 ‘낮’의 사람으로 전환되어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제사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왜 거듭남을 불뱀과 놋 뱀의 사건으로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빼내어 광야로 인도하신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곳이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처지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막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황폐한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애급 세상 양식을 완전히 끊으심으로 세상 사람으로 살던 옛사람은 죽게 하시고,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만 먹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만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으로 살던 옛사람의 죽음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나는 새 생명의 잉태를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신 것이다 (신 8:2-3). 그렇게 세상 애급 사람이 죽는 광야의 생활이 이스라엘에게는 당연히 고통과 절망과 죽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끊임없이 모세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출 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에돔을 건너가려 했지만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땅을 건너가지 못하게 했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돌아서 가야 했고 그 길이 너무 고단했기에 백성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하며 모세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당신들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거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21:5) 라고 원망하며, 애급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모세에게 돌을 던지며 죽이려고 한 것이다. 곧바로 하나님에게 향한 대적이었다. 그러한 패역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독을 가진 불뱀을 보내어 즉사하게 하신 것이다 (민 21:6).

이스라엘은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되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해서 살려 달라고 애걸한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아 쳐다보라고 하신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 (민 21:9). 하나님은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이들에게 기적으로 즉각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심판을 상징하는 놋을 뱀으로 만들게 하시고, 그 놋 뱀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놓고 오직 그 놋 뱀을 쳐다보는 자만 살려주신 것이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에게 다시 뱀을 쳐다봄으로 살려준다는 말씀은 가혹한 일이기에 그 말씀에 순순히 따라 다시 자신을 물어 죽인 뱀을 쳐다볼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중에서 하나님의 가혹한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물어 죽인 그 뱀을 쳐다보는 자가 있으니 그들에게만 생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모두가 아니라 오직 장대에 매달린 뱀을 쳐다보는 그 자에게 생명을 주시겠다는 선택의 구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불뱀을 풀어 뱀의 독으로 죽이는 심판을 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독을 품은 목이 굳은 불뱀과 같은 독시임이 증명된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패역한 본성이 독뱀과 같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품에 안으시고 광야 40년 동안 먹이시고 입히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셨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적을 통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적하고 돌을 던지는 일이 일쑤였다. 이는 곧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돌을 던지는 것과 동일하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불뱀에게 물려죽는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불뱀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원망과 불평으로 애급으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아우성치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주심으로, 너희들이 탈출한 애급이 바로 불뱀, 즉 마귀의 소굴이며 (출 7:8-12/ 겔 19:3), 그 불뱀의 소굴에서 너희가 구원을 받았으며, 다시 애급으로 돌아가려는 자는 애급의 불뱀에 물려 멸망하게 됨을 보여주심으로 애급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접고 가나안을 향해 매진하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은 뱀의 후손으로 태어나 육의 본능을 따라 오직 자신만을 추구하는 ‘자아’에 집착되어 자아 욕망과 탐심으로 악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의 정체가 바로 독뱀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3-18) 라고 아주 적나라하게 인간의 마귀 본성이 바로 독사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열린 무덤과 독사의 독일뿐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들의 유익에 조금만 손해 가도 이내 독사가 되어 하나님마저 물으려고 대적한다. 그 모습이 이스라엘에게 고스란히 드러나 모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까지 달려든 것이다. 바로 하나님에게 향한 반역이기에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독을 가진 불뱀을 보내주어 물러 죽게 함으로 그들의 정체성이 바로 불뱀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스스로 자신들의 독으로 멸망을 자초하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된 마귀의 후손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음으로 반드시 멸하심을 불뱀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후손으로 태어난 육신의 옛사람은 죽고, 놋 뱀으로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나게 됨을 계시하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불뱀에게 물려죽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며,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불뱀에서 구원하여 새 생명을 주실 십자가 구원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즉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던 놋 뱀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

불뱀과 놋 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독사 마귀의 본성이 얼마나 악렬하고 추악한 뱀인지를 장대에 매달아 폭로하게 하신다. 그렇게 육신의 일을 도모하며 오직 육신을 위해 사는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대적하게 되며, 심지어는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도 살해하게 되는 패역한 극악까지 가게 되며, 그렇게 포악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내리심을 불뱀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 육의 정욕과 욕심을 죽이는, 즉 우리 옛사람 죄인이 죽는 죽음을 반드시 통과하게 하신다. 그 일이 바로 애급에서 나온 옛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시체가 되게 하시고, 여호와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으로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을 가나안에 들여보내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마귀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육신의 옛사람은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로 신부로 탄생하게 하실 것임을 구약 전체를 통하여 역사의 사건 속에서 반복하여 보여주시고 설명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거듭남’의 구체적 설명을 구약 민수기에서 나오는 모세와 놋 뱀의 사건을 인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들려진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들어 올려 죽인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었다 (마 16:21 / 살전 2:15).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어떻게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시면서 이들의 정체가 바로 뱀이요 독사요 마귀이며 살인자임(요 8:44)을 폭로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로 우리 모든 죄인의 대표이다. 우리는 본래 마귀, 뱀의 유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타락함으로 마귀의 자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한 죄인이었다. 그런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그분이 우리의 저주가 되셔서 놋(심판을 상징함) 뱀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이 대신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들어 올린 뱀임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내 주로 바라보고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게 하고 이스라엘에게 바라보게 하신 것은, 너희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한 뱀이요 마귀라는 정체를 확실하게 드러내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그 장대에 매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자기 백성만 죽음에서 살려내신 것이다. 그중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바로 뱀이요 마귀이며, 불뱀에게 물러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고, 그 뱀을 다시 쳐다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자들만 하나님은 살려주신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독을 제거함으로, 즉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능력이 죽은 자를 살려내신 것이다.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에는 뱀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으로, 즉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신랑으로, 영생으로 알아보는 믿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게 됨으로, ‘십자가에 달린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살려주는 놋 뱀이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불뱀, 독뱀으로 보인다.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에게 뱀을 들이대면 그 누구도 그 뱀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을뿐 아니라, ‘당장 치우라’고 고함을 지르며 다시 불평과 원망으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바로 장대에 매달린 뱀임을 인정하지 않기에 불뱀의 독으로, 즉 자신의 죗값으로 죽음의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로 의인됨을 자랑하며, 높은 자리에 앉는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절대로 죄인을 매다는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들어 올려 못을 박은 그 악행으로 자신들의 정체가 바로 불뱀이며 독사이며 마귀의 자식임이 폭로된 올무가 되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의 악독한 마귀 정체를 감추기 위해 예수님을 사단 ‘바알세불’이라고 뒤집어씌우기까지 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와 귀신들린 자들을 등장시켜 너희가 바로 ‘바알세불’이며, 완전히 마귀에게 조종당하는 잡신 들린, ‘일곱 귀신'들린 자들이며, 쇠사슬로 묶어나도 감당이 안 되는 무덤에서 사는 ‘군대 귀신 들린 광인’이며, 더러운 돼지의 삶을 사는 자들임을 폭로하여 이들의 실체와 결국이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해 광인에게서 나온 군대 귀신을 2천 마리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물에 빠져 몰살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법마저 자신들의 의를 세우는 방패로 삼고, 예수님의 의로운 구원사역을 ‘바알세불의 사역’으로 매도해 버리는 이들의 극지에 달한 악행에 대하여 주님은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성령훼방죄’ (마 12:31-32)로 정죄하신 것이다. 즉 이들이 바로 자신들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생명의 근원인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대적하는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마귀 바알세불의 자식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의 악행을 마귀의 행사라고 지적하시고 이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부르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십계명을 주어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며, 하나님마저 살해하는, 진리의 영을 죽이는 ‘살인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 질하는’ 좀 먹는 벌레이며,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자 ‘세상과 간음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단둘만의 대화임에도, 당신의 백성을 ‘우리’라고 부르고, 율법과 바리새인을 대표하는 니고데모를 ‘너희’로 구별하여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11)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니고데모에게 장대에 달린 놋 뱀 이야기를 하심으로, ‘너회’는 불뱀처럼 마음에 독을 품고 있는 사악한 자들로서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을 것이며, 너희들이 토해내는 그 죄악으로 불뱀에게 물려 그 죄악의 독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인간의 마귀의 본성이며, 때문에 절대로 너희 스스로의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자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제시하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이스라엘 중에서도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을 바라봄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가 있었던 것과 같이, 그 장대에 달린 나를 바라보고 믿는다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구원의 길을 제사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불뱀과 놋 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 옛사람의 정체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심판을 받아 마땅한 마귀의 후손 저주의 놋 뱀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놋 뱀이 되셔 십자가에 들어 올려 죽으심으로 그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독)가 사하여지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게 됨을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거듭남이라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제시하셨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바로 불뱀에게 물려 죽어서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만이 다시 장대에 매단 놋 뱀을 쳐다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오직 자신이 바로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하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만이 십자가를 쳐다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성도는 알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이요 생명이요 영생임을 굳게 붙들고 자랑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때문에 거듭남은 인간이 아무거도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성취하신 십자가 구원의 의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그 옛사람 죄인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 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영으로 그분에게 속한 자녀로 신부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다. 옛사람이 죽어야 점도 흠도 없는 의인의 생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분은 결코 우리 옛사람을 죽이는 선한 일들을 하신다.

우리는 본래 마귀의 자식이기에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며, 마귀의 세간으로 살던 자들이었다. 불뱀과 놋 뱀이 바로 우리의 실체이다. 우리는 자력으로 마귀를 좇아낼 수도 또한 행위와 노력으로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가 없도록 흙의 먼지로 ‘없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으로 마귀의 세력이 물러가고, 영원한 자유와 구원이 임하는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 증거로 천국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 뚫고 들어오시자 아무것도 행하지도 또한 행할 수도 없었던 저주의 대상으로 취급받던 죄인들이 각종 질병에서 풀려나고,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인간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한 문둥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아 새사람이 되고, 눈먼 자와 귀머거리가 복음이 들리게 되고, 죽은 시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는 능력의 이적들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자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천국이신 예수님이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내 욕심을 쫓아 마귀의 소굴로 살던 옛 죄인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내 안에 있는 마귀의 세력이 철저히 죽고,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으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됨을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5) 라고 성령의 거듭남이 바로 영생이라고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지심을 받아 새롭게 탄생되는 거듭남을 모세의 놋 뱀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에 도전하여 티끌의 존재가 감히 자신들의 죄 된 행위로 의로운 자로 자칭하여 우월감을 누리며 자신들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로 둔갑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나라에 들림을 받는 것은 너희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며, 더더욱 너희들의 율법과 제사와 혈통적 우월감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이가 없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오직 그분 안에 있는 그분에게 속한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을 얻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신부로, 아버지의 아들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된 자들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