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의 진의

요한복음 [9] 니고데모와 거듭남 (요 3:1-12)

오직 은혜 2020. 5. 12. 09:20
거듭남의 비밀 (요 3:1-12)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3: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3: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3: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아니하는도다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아볼수도 하나님 나라를 볼수도 없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율법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선생’ 이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이 행한 이 모든 표적들을 보아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말한다. 즉 그가 예수를 찾아온 동기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며, 자신의 고백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으로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직선적으로 동문서답 같은 영적 정답을 주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너는 지금 나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왔는데 너가 먼저 알아야하는 일은 네 자신이 거듭났는가?’를 물어보라는 뜻이었다. 즉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첫 서두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빛’이라 부르고, 이 세상 죄와 사망에 갇혀있는 모든 인간을 한마디로 ‘어둠’이라 부르고 있다. 어둠에 속한 이 세상은 빛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으로 오셨음에도 ‘어둠’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목숨 걸고 율법과 제사를 지키며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리던 유대인들마저 메시아이신 예수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다 (요 1:11). 사도 요한은 그들의 외식된 종교행위를 폭로하여 구원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라고 혈통적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부시는 선포를 하신 것이다. 즉 구원은 혈통으로나 인간의 의지나 행위나 노력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로 불가능한 것임을 확실히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사도 요한은 그의 글에서 빛이신 예수님과 어두움에 속한 자들을 대조하여 니고데모를 ‘밤’에 찾아 왔다고 밝힘으로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바로 죄와 사망에 갇혀있는 ‘어둠’임을 제시하고 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율법 교사이며, 부와 명예, 집안, 학벌에 겸손한 성품까지 세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완벽한 자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둠’에 속한 자였기에 구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밤’에 속한 니고데모에게 ‘너는 율법 지킴으로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고 있는데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공격적인 답을 주심으로 그의 모든 신앙을 부정하신 것이다. 즉 ‘밤’에 속한 육적 니고데모에게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적 거듭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영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음으로 이내 영의 일을 육의 일로 생각하고 엉뚱한 대답으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되묻은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대인의 메시아가 맞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어서 밤에 찾아와 겸손하게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행한 일들을 종합하여 ‘당신은 분명히 하늘로서 온 선생인 것 같은데 맞는가?’ 라는 진지한 답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직선적으로 육에 속한 네가 어떻게 영인 나를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라는 의미로 첫 마디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뜻은 ‘너는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네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으로 온 나를 진정 알아볼 수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현재 너의 율법적 신앙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혈통과 율법 지킴과 도덕과 윤리적 경건함으로 구원에 합당한 자로 믿어 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율법적 신앙을 부정하신 것이다. 이태까지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던 할례, 제사, 율법, 선한 행위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앞에서 부인되자 니고데모는 황당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상식적으로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럼 내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겠나이까’ 라고 엉뚱한 대답으로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인간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여 되물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이었고 할례를 받았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했으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리는 바리새인으로 보아 완벽한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에는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엉뚱하게 물은 것은 두 가지 뜻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니고데모는 박식한 학문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자였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켜 ‘거듭난 자’ ‘새롭게 개종한 자’라고 불렀다. 니고데모는 자신은 혈통으로도 전통적으로도 유대인이었기에 자신에게는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이 어릴 때부터 열심히 쌓아온 신앙이 한순간 부정당하는 무너짐에 너무나 당황하였고 또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상식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니고데모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엉뚱한 말로 되물은 것이다. ‘늙은 내가 어떻게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전혀 불가능한 말씀이 아닙니까?’ 라는 뉘앙스였다. 니고데모가 어떤 생각으로 예수님에게 그런 엉뚱한 말로 되물은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히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에 대하여 영적으로는 무지하였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확실하게 두 번째 답을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아하여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다시 한번 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두 번째로 주신 확실한 답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확실한 답을 주시면서 너는 육의 사람으로 어찌 영의 일을 알겠느냐 그것이 바로 너의 한계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육으로 판단하는 네가 어찌 무한한 영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너에게서 그런 엉뚱한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주님은 지금 영과 육을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분리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즉 육과 영은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이 영의 일을 육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영으로 거듭난 자는 영생을 사는 자이며, 이 땅에 육으로 난 자는 어둠과 죽음에 속한 자이기에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사는 존재임을 계시하고 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어둠에 속한 니고데모가 어찌 빛에 속한 영의 일을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확실한 이해를 주시기 위해, 거듭남이란 바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며’, 이는 육으로 이해되는 일이 아니라 영으로 이해되는 일이기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니고데모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셔서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지 않으면 이 땅의 존재는 영의 일을 알 수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육으로 난 자는 이 세상에 속한 자요 영으로 난 자는 하늘에 속한 자’라는 확실한 답을 주심으로 하늘나라는 할례, 제사, 율법과 같은 종교 행위나 선행이나 성경 지식이나 신앙적 열심과 같은 것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는 말씀이다.

물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신약을 여시면서 먼저 요한에게 ‘세례’라는 이름을 붙여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 세례를 주는 역할로 보내주셨다. 즉 구약과 신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세례요한은 성전에서 열심히 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제 더는 양이 아닌 참 제물, 즉 너희들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가 천국으로 너희 앞에 나타나셨으니 성전에서 광야로 나아와 회개의 세례를 받고 천국을 영접하라고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거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주변에서 다 요한에게로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는 물세례를 받은 것이다 (마 3:5-6). 물세례의 회개는, 이스라엘이 성전 제사와 율법의 종에서 풀려나는 해방과 자유의 상징이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생명이 임하는 성령의 법으로 옮겨지는 은혜의 상징이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옛사람 죄인이 죽고, 새사람으로 올라오는 성령세례를 모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요1:33) 이라고 증언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불러내어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아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여보내는 세례에서부터 신약을 시작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세례요한이 행한 물세례는 물 아래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는 옛사람의 죽음과, 천국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는 새 생명의 탄생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 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 3:11)라고 자신이 베푸는 물세례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를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는, 옛 성전과 율법에서 벗어나 광야로 이끌어내어 회개를 시켜 메시아를 영접하도록 준비를 시키기 위한 세례이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진정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영생이 임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즉 그분만이 자신의 권세와 권위로 구원과 생명을 주는 성령 세례를 베풀어 주실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내 옛사람 죄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세례이다. 물세례는 내가 바로 죄인이며, 누군가 나를 건져주지 않으면 죄와 사망에 갇혀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회개의 세례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라고 말씀하신 봐와 같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물세례는 내 옛사람 죄인이 죽는 죽음을 의미하고, 성령세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분에게 속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연합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받으신 물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공생애를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점도 흠도 없으신 의인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먼저 죄인과 연합을 이루시는 물세례를 받으셨다. 즉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죄인의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 구원 성취를 시작하시는 의미에서 먼저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자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에게 임하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마 3:17)라고 증언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선언으로 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죄인을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 먼저 죄인과 연합되심을 상징한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없애 주시기 위해 친히 죄인의 육을 입으심으로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의 유전을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에게 전가시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철저히 도말하여 주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죄를 뒤집어쓴 육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모든 유전이 철저히 영원히 죽어서 소멸된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 1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기 위하여, 그분이 죄인 속으로 들어오셔서 죄인과 합하여짐을 상징한다. 죄가 없으신 의인되신 그분이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죄인의 속에 뚫고 들어오셔서 죄인이 되어 버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신 것이다. 물세례는 바로 죄인의 죽음을 뜻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 옛사람 죄인도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깨끗하게 죽음으로 끝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먼저 우리 죄인 안으로 들어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품에 안고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우리를 품에 안고 영생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연합으로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로 연합을 이룬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은 내 옛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내 죄인의 철저한 죽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3-6).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나는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의 다시 사심, 즉 부활에 동참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죽어야 할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전체 과정을 포괄하여 말씀하고 있다. 물세례는 물에 잠겨 내 옛사람 죄인의 죽음을 상징하며,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창조를 업어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말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즉 세례는 내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장사된 ‘없음’의 상태를 말하며, 새롭게 태어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영생을 말한다.

 

성령세례는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영적인 진실과 육신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영원히 이루어진 것이다. 육신으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멸하여 주셨다. 영으로는,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속성인 영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을 이루는 영생을 말한다. 중생은 이 세상에 속한 육적 생명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에서 일어나는 하늘나라에의 사건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영의 생명이기에 영생이라고 한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입혀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실 때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거룩한 영인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그럼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그분의 의의 생명, 죄가 없는 거룩한 영으로 잉태됨으로 죄가 있을 수도 죄를 짓을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을 전가 받아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이다 (고후 5: 21). 즉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의 영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 즉 아들로, 신부로 태어나게 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전가시켜 주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특성과 본질을 말씀하여 주셨다. 전통적인 믿음과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율법에 박식한 니고데모는 “당신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라는 인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이 없음을 직선적으로 깨우쳐 주시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즉 육신으로 믿는 믿음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이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중생의 진리를 말씀하여 주셨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나는 하늘나라의 일이기에 그 어떤 시간도, 장소도, 과정도, 준비도 없이 바람과 같이 임하여 이루어지는 일임을 계시하여 주님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사건을 바람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영은 바람처럼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온 우주에 충만으로 차 있으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시는지는 인간은 예측할 수 없으나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씀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열심과 행위를 배제하여 하나님 홀로 역사하시는 일이며,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입혀지는 은혜의 선물이며, 때문에 전적으로 피동적이며 수동적이라는 말씀이다. 죽은 자는 자기 스스로 살아날 수가 없다. 반드시 나를 만드신 창조주만이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살릴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나사로가 죽었는지 3일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완전히 죽어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을 살릴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어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불렀을 때 죽은 시체는 새 생명을 얻어 부활체로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를 향하여 살아있는 영의 말씀으로 대언할 때 그 뼈들은 살이 붙어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겔 37:1-10).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회를 살리셨도다”(엡 2:1)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는 본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며,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 5)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인간의 모든 노력과 의지와 행위를 배제한다. 고백과 결심, 선행과 믿음은 다른 종교에서도 강조한다. 하지만 종교는 죄 사함의 구원과 생명이 없다. 이는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늘나라의 사건이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하나님은 왜 거듭남이라는 방법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가? 거듭남은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2).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난 마귀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심히 부패하고 패역하며,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으로 다시 태어나야만이 죄인으로부터 의인으로, 사단의 자식으로부터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영원히 보장되는 영생을 얻게 된다. 즉 거듭나야만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이 세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육신으로 사는 존재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더더욱 죄가 없는 하늘나라에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다. 때문에 하늘나라는 영으로 들어가는 나라이며 반드시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거듭남은 죄로 죽었던 인간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임재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는 하늘나라의 사건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입혀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피조된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피조 된 인간의 그 어떤 행위와 능력으로도 불가능함을 확실히 밝히는 진리이며,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영의 일은 하나님의 주관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기에 육으로 이해되거나 너의 노력이나 의지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내가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이며, 너는 알 수 없지만 언제인가 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 일은 너의 조건과 육적 공로와 전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그때 ‘놀랍게 여기지 말라’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비록 니고데모는 성령님의 거듭남에 대하여 무지한 고로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책망을 받았지만, 그 후 니고데모에게 참으로 ‘놀랍게 여기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거듭남으로 고민하던 그가 더디어 거듭남을 체험함으로 영의 사람으로 전환된 것이다. 니고데모는 더디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의 거듭남을 깨닫고 거듭난 자로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세례와, 함께 부활하여 영의 사람으로 거듭남을 깨닫게 됨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는 ‘낮’이 되어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제사에 동참한 것이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 /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단둘만의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와 “너회” 로, 즉 영에 속한 ‘우리’와 육에 속한 ‘너희’로 구분하여 부르신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율법교사이며 도덕적으로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기에 예수님은 그를 ‘너희’ 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리면서 ‘너회는 절대로 내가 말하는 하늘의 일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도장을 찍는다.

예수님은 영에 속한 하늘의 백성을 ‘우리’라고 부르고, 육에 속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너희’로 구별하여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11) 라고 말씀하신다. 즉 ‘우리는 이 땅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알고, 말하고, 증언하는데, 너희는 보여주어도 들려주어도 알지 못하니 보이지 않는 하늘의 일을 말하여 준들 너희가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라는 뜻으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땅에 속한 ‘너희’는 영의 일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가 너희 눈앞에 나타났어도 너희는 알아보지 못하였고, 영접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를 배척하고 대적함으로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너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육으로 받아 지키고 행하는데는 열심이지만, 그 말씀이 가리키고 제시하여 주시는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 진리를 죽이려고 하고 있음을 암시하여 너희’ 와 ‘우리’는 같은 영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주신 것이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일을 말하면 어찌 알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이 땅에 속한 육의 사람이기에 내가 하늘나라로 와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설명하여도 너희는 알아듣지 못하였고, 도리어 나를 배척하고 대적하니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빛에 속한 ‘우리’와 어둠에 속한 ‘너희’로 분리하신 것이다. 반대로 하늘나라에 속한 영의 사람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혈통을 배제하여 창세전 영의 사람으로 택함을 받은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되며,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는 하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존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울 필요가 없이 영은 영으로 통하기에 육에 속한 ‘너희’는 당연히 ‘우리’를 알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선택받은 자와 선택에서 제외된 자는 출생부터 다르며 가는 길이 다르며 결말이 다른 것이다. 창세전 선택받은 자는 처음부터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늘에 속한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며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태어난 자들은 이 땅의 권세를 잡은 마귀로부터 태어난 마귀의 자식이며 이들의 결국은 지옥불에 떨어지는 운명이다. 이 둘은 시작부터 결말까지 완전히 반대되는 상극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이 땅에 임하자 즉각 어둠에 속한 이 땅에 속한 육의 존재들이 하늘나라로 오신 예수를 대적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극악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을 대표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너회’ 와 ‘우리’ 로 구별하시고 ‘너회’는 절대로 하늘의 일을 알 수가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존재들에게 아예 구원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4).

그러므로 오직 택함을 받은 자만 영의 사람으로 태어나 영의 일을 알아들으며, 예수님 자신도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영에 속한 ‘우리’를 위해 오신 분이심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 6:44),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6:46). 즉 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아 ‘하나님에게서 온 자’들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찾아서 그들에게만 영의 눈을 열어주시며, 하늘의 일을 말씀하여 주신다. 오직 그들만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으며, 이해하며, 따르며, 믿으며, 의지하며, 그분에게 속한 신부로 연합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