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와 참 이스라엘 (요 1:35-51)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 <요 1:35-42>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1: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12명만 제자로 선택하여 부르셨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좇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원해서도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찾아와 주셨고, 불러내셨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따르는 마음을 주셨기에 다 내려놓고 예수를 좇은 것이다. 이들은 창세전부터 선택을 받아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 운명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시고, 항상 “너희” 와 “저희” 로 구별하셨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천국의 비유를 제자들에게만 풀어주시면서 천국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너회들’ 에게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심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만, 선택에서 제외된 ‘저회들’ 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에 보지 못하게 듣지 못하게 눈과 귀를 막으셨다고 말씀하신다 (마 13:11-13.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하나님이 선택하여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이름을 고쳐주신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고쳐주신 것과 같이, 12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을 ‘베드로’라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심으로, 육으로 태어난 땅에 속한 옛사람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됨을 의미한다. 즉 아담의 혈통으로 땅에서 태어난 옛사람 죄인은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늘의 존재로 새롭게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에 합당한 자로 창조되어 감을 계시하신다.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됨을 새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신 것이다. 즉 이제부터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바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그분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요한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라고 말하고, 성도는 자신을 낳아주셔서 영생을 입혀주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됨을 바울이 말씀하여 주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없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그분의 성품과 속성을 따라 영원하기 때문이다. 비록 겉 사람 육신은 이 세상에서 끝없는 유혹과 옛 습성으로 죄도 짓고, 실수도 하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잉태된 영으로 살기 때문에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새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 이는 마치 ‘시몬’이라는 육신 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된 ‘베드로’가 있는 것과 같고, ‘아브람’이라는 육신 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된 ‘아브라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것과 같이 육신의 시몬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해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베드로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라는 그 이름 위에 교회가 세워짐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때문에 성도의 육신의 장막은 무너져도 그 안에 있는 속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살게 된다고 바울은 말씀해 주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잉태된 속사람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도 그 속사람 안에는 영원히 사는 천국의 장막이 있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육신으로 살던 사울이 위대한 복음의 선구자 바울로 거듭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주님께서 먼저 그를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셨기 때문이다. 사울은 열심히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심히 박해하는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원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 주셔서 자신이 박해하는 예수가 바로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임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하여 주심으로 예수를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사도 바울로 전환된 것이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창세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사도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정해진 자로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작품이다.
참 이스라엘 나다나엘 <요 1:43-51>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
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일은 내가 믿어서, 행위의 의로움과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알아보고 믿게 되며 영접하게 된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3) 라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의 첫 사역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끌어모으는 부르심 이였으며, 그들은 그 부르심에 즉각 호응하여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 예수님은 특히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1:47)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1:48)라고 먼저 다가가신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즉각 호응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 이로소이다”(요1:49)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라는 확신으로 전도하여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은, 나다나엘이 평상시에 율법과 선지서를 묵상하면서 메시아를 간절히 찾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기에 보시자마자 ‘참 이스라엘’이라고 칭찬하여 주셨고, 직선적으로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내가 바로 네가 간절히 찾고 있었던 ‘그이’라고 계시하신 것이다. 이에 나다나엘은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눈이 밝아져서 자신 앞에 계시는 이가 바로 그렇게 간절히 찾던 메시아임을 알아보게 된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즉각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상시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간절히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힌트하고 있다. “누구든지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 이처럼 자신의 주를 기다리는 자는 영광을 얻으리라” (잠 27:18)라는 약속을 붙잡고 언약의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는 참 이스라엘의 대표로 나다나엘을 택하셨기에 굳이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먼저 ‘나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도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음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동안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고 씨름하여온 자신만이 알고 있는 속마음을 다 알고 계셨음을 힌트 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참 이스라엘이며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꿰뚫어 말씀하신 것이며,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통찰력에 즉시 자신의 믿음으로 반응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긴 것이다. 참 이스라엘을 대표한 나다나엘과 우리 성도를 대표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과 영생의 주가 되신 ‘더 큰일’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여전히 예수님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고백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즉시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큰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설명하여 주신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51).
하나님의 일은 오직 영으로만 아는 일이며, 영으로만 그분이 보낸 구세주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으며, 성령님의 가르침이 없이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 앞에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초라하고 허름한 시골 동네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도 민속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힌트하고 있다. 실제로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위대한 신앙고백 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만류하다가 예수님께 ‘사단아 물러가라’는 야단도 들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까지 한 나약한 자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위대한 신앙고백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마찬가지로 나다나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이끌리어 나온 하나님이 주신 고백임을 알수 있다.
주님은 특히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와 연결시켜 말씀하신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모든 죄과를 씻어줄 ‘새순’이 되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상고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다나엘이 평소에 이스라엘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계시한다. 비록 나다나엘은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율법적 의와 제사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씨름하며 깨달았던 사람이었기에 주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그에게 ‘참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이다. 예를 들면, 야곱이 야뽁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의 뜻이 바로 환도뼈가 부러져 옛 야곱이 죽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거듭나 예수 십자가 지팡이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시며 지배하시는 영적 이스라엘로 탄생됨을 '이겼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의 대표로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참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오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또한 나다나엘의 삶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친히 주관하셔서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삶으로 전환될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것이고, 참 이스라엘에게 ‘더 큰일’,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1:51). 천국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은혜의 천국 문이 열렸다는 복음의 선언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메시아 오심을 소망하는 참 이스라엘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즉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사다리’는 십자가 구원성취를 의미하며, 자신이 바로 천국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확신시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입어서 천국으로 옮겨짐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는 이스라엘과 대조하여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로 등장시킨것은,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같은 율법주의 자들이 율법 지킴과 제사와 행위의 의로움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쌓고 있는 '간사한 자'들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렇게 패역한 이스라엘 중에서 진심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고 기다리는 참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그들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참 메시아로 알아보더라는 것이다. 즉 나다나엘은 그 마음에 항상 메시아 오심을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 중 택함을 받은 자를 대표한 것이다.
나다나엘이 비록 민속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의 유익과 소원이 이루어짐을 기다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간사한 자’와는 구별된 자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는, 창세전 택함을 받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그 마음에 이미 메시아를 기다리며 메시아를 영접할 준비된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며, 때문에 택함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호응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게 되는 신령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구세주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매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제사장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중 오직 두 선지자 안나와 시므온만 아기 예수가 바로 손 꼽아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알아본 것이다. 이스라엘 중 예수를 그리스도로 참 메시아로 알아보고 영접하는 ‘참 이스라엘’이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