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진의

산상수훈 (9)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회 것임이라

오직 은혜 2020. 1. 24. 21:57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회 것임이라

 

마태복음 5:10~12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산상수훈의 ‘팔복’은 오직 창세전 복받기로 선택된 자에게만 불가항력적 은혜로 임하는 복음의 선포이다. 오직 복받기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임하게 되는 하늘나라의 영생이며, 그 하늘의 복을 받은 자는 이 세상 원리의 삶과 완전히 반대의 삶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하나님 주권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천국의 복’은, 말씀 그대로 이 세상에 속한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늘나라의 복이기에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쟁취되는 복이 아니다. 하늘의 복받은 자는, 세상 것이 털리는 가난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의 금식으로 옛사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하여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게 되는 완성으로 진리가 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난 자들이다. 이들은 이 세상과 분리된 하늘의 존재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십자가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배척과 핍박을 당하게 됨으로 마지막 선포가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이다. 즉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이제 완성의 지점에 선 자이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는 선포이며, 믿음의 선지들이 모두 이 완성의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핍박을 당하였으니 너희들도 그 완성으로 내가 끌고 가시겠다는 약속의 선언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란?

주님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바로 ‘나를 인하여 받는 핍박’이므로 그 ‘의’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의 성취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 죽으심으로 구원의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그 성취하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기 위해 그분은 성령으로 친히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켜 주신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함과 같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다시 살려내어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하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먼저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온갖 조롱과 핍박을 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묘사대로,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으며”(사 53:3),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53:7)라고 묘사한 그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하지만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아”(사 53:5)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이다.

바울의 진술과 같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되고 성취되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거저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9).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라”(롬 3:25-26).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십자가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죄인을 찾아와 주셨으며,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십자가 원리의 삶을 살아 내셨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권세자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다. 그렇게 연약하고 무력하게 저주로 보이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의 의로 보이고 믿어지게 되는 은혜가 입혀진 것이다. 오직 그들만 예수가 지신 저주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영생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게 된다. ​오직 그들만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롬 5:18) 믿음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하늘의 존재로 하늘나라의 삶을 추구하여 오직 십자가 예수만을 붙들고 의지하고 자랑하고 전파하며, 십자가 진리만을 고집하는 자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로 인하여 너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되지만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너희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시작하여 더디어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핍박을 받게 되는’ 천국의 완성으로 정착되었기에 ‘즐거워하라 천국이 너희 것이라’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당하게 되는 핍박

우리가 믿는 예수는 이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고난과 수모와 핍박과 죽임을 당한 십자가 예수이다.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영접 받고 세상이 원하는 풍요와 재물의 복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지상낙원을 세우기 위해 오신 이 세상 임금이 아니시다. 그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을 분쟁케하시려고 불로 검으로 오셨으며, 오직 자신에게 속한 택함을 받은 자만 이 세상 속에서 끄집어내어 분리시켜 하늘나라로 끌어올리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은 절대로 예수를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대적하고 핍박하고 조롱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인생은 이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죽임을 당하는 생애였다는 것을 한마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요약하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는 한 개인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권세와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의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내가 ‘나’를 주장하는 주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고 자신의 생명으로 나를 의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그분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요,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가 됨으로 당연히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세상은 하늘나라 원리로 사는 백성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 같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교는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칭찬과 영광과 숭배를 얻어내기에 열혈되어 있다.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는 기필코 어울릴 수 없는 갭으로 서로 배척하는 충돌이 일어나게 되며,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멸시와 핍박을 받는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세상과 맞서 싸우거나 십자가 죽음을 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도살당하는 무력한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세상 임금에게 내어주어 매 맞음과 조롱과 멸시와 핍박과 십자가 죽음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영생의 주인이 되셨다. 그래서 주님은 미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 분명 양이 세상 이리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리에게 잡혀 뜯기고 찢겨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도 믿음의 선지자들이 그 길을 갔으며, 신약에서도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 길을 갔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세상 이리에게 잡혀 먹히는 양의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임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막 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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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십자가 삶으로 이 세상 힘의 원리를 무력하게 함으로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여 보여주는 일이다. 십자가의 삶은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음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순종으로 살아내는 자기 부인의 삶이다. 우리 주님이 먼저 이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천대받고 버려지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삶을 살아내셨다. 주님은 어린 양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하늘나라의 원리로 세상을 이기심으로 세상 권세자의 무력함을 폭로하셨다. 육신은 비록 세상 임금에게 내어주어도 그분의 본체이신 영원한 생명은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죽임을 당하나 오히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의 원리이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다. 즉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력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도에게는 구원이며, 부활이며, 영생이며, 천국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과 맞서서 싸우는 자도 아니요, 또한 빛과 소금의 착하 행실로 세상 부패를 방지하는 정화로,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로 인정과 칭찬과 모델로 영광을 받는 위인이 아니다. 반대로 성도는 썩어지는 세상과 분리된 썩지 아니하는 소금이며, 이 어둠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빛의 자녀라는 선언이다. 성도는 세상이 공격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살해를 감당하는 십자가 삶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하늘나라 존재이다. 주님이 앞서가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를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히 11: 35-38). 그리하여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는 성도는 ‘종일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하는 양’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세상이 감당치 못한 자로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내 힘과 내 의지가 아니요,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강하게 붙들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치기를,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라는 진실된 고백이 터져나오게 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와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욕망과 탐심으로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채우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항복하는 자기부인과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을 이해할 수도 또한 받아들이지도 않거니와 도리어 자신들의 거짓된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거역한다고 바울은 인간의 죄악된 본질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3).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오직 열린 무덤과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는 불순종을 택하게 되어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 10-18). 이와 같이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열린 무덤이며, 파멸과 고생이며, 더러운 걸레이며, 먼지이며, 배설물임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세상은 자신들의 의를 부정하고, 목숨 걸고 추구하고 쟁취하는 이 세상 복을 배설물로, 더러운 걸레로, 열린 무덤으로 폭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성도를 당연히 핍박하고 죽이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하나같이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부인하는, 즉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십자가 죽음과 죄에 대한 심판과 회개와 은혜의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서 이 세상 것들이 차압당하는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이 복된 삶이며, ‘예수를 인하여’ 가난과 굶주림과 애통과 멸시와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복음이 가시처럼 불편하며 듣기 싫기에, 전하는 자도, 듣고 깨닫는 자도 없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처럼 배설물처럼 여기고, 육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며, 오직 예수 십자가만 주장하고 자랑하며, 예수 십자가의 피만을 고집하며, 예수만이 참 진리이며 생명임을 증거하는 성도를 이 세상은 가만히 놔 둘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예수를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다.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와 하늘나라에 속한 자는 절대로 한 길로 갈 수가 없기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며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때 그들은 핍박하고 때리고 죽여 버린 것이다. 바울과 스데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믿음의 선지들이 십자가 복음만을 고집하고 외칠 때 하나같이 온갖 핍박과 조롱과 죽음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십자가 고난의 삶은 오히려 기쁨과 감사로 영광으로 여겨지더라는 것이며, 그래서 세상은 십자가 삶을 살아낸 성도를 감당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히 35-38).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와 순교 당하는 것을 기쁨으로 복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없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탐심이며 오로지 육신의 안일과 재물의 형통과 인기와 명예와 부귀영화 등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타고난 마귀의 체질로 살아간다. 그런데 창세전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갈 5:24), 하늘에 소망을 두고 윗것을 바라는 삶으로 전환된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난 성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의만을 고집하고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세상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초개로 배설물로 인식하게 됨으로 세상과 함께 춤을 추지 않게 되며, 오로지 십자가만 자랑하고 전하며, 십자가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삶을 지향하게 됨으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며, 고립되고 분리되는, 즉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게 될 때 내 옛 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죽게 된다. 이것이 성도에게 핍박과 고난으로 감지되고 경험되며,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겪는 일이기에 평강으로 기쁨으로 복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라고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 41)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체질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상으로 믿고 예수를 위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오히려 자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거듭나게 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와 고난과 핍박을 즐겨 받으며, 그 어떠한 조롱도 채찍도 옥에 갇히는 것도 돌로 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과 시험 속에 집어넣더라도 세상이 하늘의 평화를 사는 성도를 감당치 못하더라고 증거하고 있다(히 11:35-38). 이것이 십자가 의로 거듭난 성도의 삶이다. 바울만큼이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은 이도 없으며, 바울만큼 복음으로 산 자도 없다. 바로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걸작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도록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바울은 세상이 주는 환난과 핍박과 조롱을 오히려 자랑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3),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라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을 외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라고 당당하게 권고하고 있다. 세상이 천국이 된 자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주님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격려하여 주시고 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확고부동한 진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당하게 되는 핍박

인간이 인정하는 선한 일, 착한 일, 경건의 삶, 의로움 등 성화를 주장하는 율법적 행위들은 티끌이라는 ‘없음’의 존재에 가치를 매기는 헛되고 가증한 일이며, 은혜의 복음에 도전하는 ‘마귀의 행사’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없음’의 존재로 이 땅의 티끌로 만드시고, 무가치로 정하셨다. 그리고 그 없음의 티끌이 어떻게 ‘있음’, 즉 생명의 존재가 되는지를 하나님의 독립적인 창조사역으로 이루어 가시며, 자신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시는 목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티끌의 '없음'으로,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의와 선한 법에 도달할 수가 없음을 알게하시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행하라고 명하셨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가 필수적임을 계시하시기 위한 의도로 율법을 먼저 주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면서 죄인으로 사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도 또한 생명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고 패역한 마음은(렘 17:9) 세상을 향하여서는 살아있으나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마음이다(엡 2:1). 하나님만이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영생의 진리이심을 들어내어 나타내시기 위해 처음부터 인간을 티끌로 만드심으로 인간의 존재가치를 ‘없음’으로 정하셨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이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원시적 율법을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시면서 ‘먹지 말라’는 계명을 붙여주신 것이다. 본래부터 ‘없음’의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은 연약한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낼 능력이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티끌로 만드심으로 비천한 흙과 같이 부서지고 깨지고 더러워지는 즉 타락할 수밖에 없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을 주셨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 (창 2:17)고 선포하셨다. 목적은 인간의 육을 통하여 영의 영원한 실상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그분의 의로운 구원 성취로 자신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역할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죽음으로 정하셨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실상이며, 오직 그분만이 의와 진리이시기에 오직 그분의 의로운 행위로 인간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복음을 주시기 위한데 목적을 두셨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19). 첫 인간 아담이 타락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롬 5: 12).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목적은 타락으로 죄와 죽음에 빠져있는 자기 백성을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구원하여 살리는데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락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타락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의 극치에 도달하는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은혜에 은혜를 더한 축복이 되였고, 모든 것을 최고의 이상적으로 회복시키는 화평과 영광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이 정확하게 정립하기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이를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으며’(갈 3:22),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롬 11:32)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때문에 죄인을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성화로 마음을 깨끗게 하는 인간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난 마귀의 탐심과 욕망의 마음 뿌리는 아예 육신의 죽음으로 ‘없음’으로 삭제하신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 세상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정하셨다. 때문에 이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마음 상태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며,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찔레와 가시덤불’과 같은 저주받은 산물이기에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에게서 나오는 더러운 행위들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기에(갈 3:22) 죄인에게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과 의가 나올 수 없다고 성경 전체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처음부터 모태 중에서 죄인의 마음으로 형성되고, 죄인의 마음으로 태어나 죄만을 생산해내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즉 죄가 무엇이며,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에 도달할 수가 없으며, 때문에 구원자가 필요한지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셨다.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갈 3:1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와 같이 인간들의 패역함을 들여다보고 죄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지를 깨달으라고,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렇게 패역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으라고 선하고 의로운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열심히 지키고 행하여 자신들의 가치와 자존감을 세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의로운 자로 위장하여 힘써 세우더라는 것이다. 분명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그 죄와 사망의 율법을 행하여 자신들의 거짓된 의와 가치를 높여 사람들의 칭찬과 숭배를 얻어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목숨 걸고 율법과 제사를 지키며 죄를 억제하는 수련으로 청결한 자로 자칭하며,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구원의 의에 도달하려는 망령된 거짓을 행하더라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대적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은혜에 반기를 드는 멸망의 자식들이며 독사들이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 인간은 죄가 더럽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의롭다고 내어놓는 행위의 의가 바로 죄에서 발산하는 더 악하고 더럽고 가증한 외식들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위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다고 열심히 옷을 엮어 입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니라 그 수치를 가리겠다고 입은 그 옷이 오히려 더 가증스러운 수치이며 죄로 얼룩진 더러운 걸레 조각들이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심히 더럽고 부패한 마음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배설물, 더러운 걸레, 진토, 먼지, 열린 무덤과 같은 것들이며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고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더럽고 추악한 의를 세워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망령된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회칠한 무덤, 외식하는 자, 지옥의 자식, 돈을 좋아하는 부자, 악독이 가득한 자라고 정죄하시며 이들에게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이와 같이 율법에 묶여있는 자들은 죄의 근본, 즉 죄의 뿌리가 바로 인간의 마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이들의 모든 것을 전면 부정하시며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시는 예수를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으로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사사건건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였으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오히려 눈에 꼽힌 가시처럼, 자신들의 길을 막는 걸림돌로 보였기에 사무치게 미워하고 핍박하여 결국 십자가에 목 박아 죽여 버린 것이다. 예수를 죽여야 하나님처럼의 영광과 가치를 챙겨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있음’의 존재가치를 챙기기 위해 하나님마저 살해하는 독사들이다.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실체이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부인하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또한 그렇게 살 수도 없는 마귀의 후손이다. 때문에 이들은 예수만이 진리이며, 빛이며, 구원이며 생명임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전하며,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을 고집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죽도록 미워하게 되고, 박해하게 되며, 죽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부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의가 부정되고 인간들의 자존심이 땅에 짓밟히고 존재가치가 삭제되는 일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으뜸가는 민족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제사 지킴으로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숭배를 받는 월등한 자로 자신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이 평생 쌓아놓은 의, 공로, 업적, 영광들을 완전히 부정하시고, 그들의 가식적 의와 자존심과 선민사상을 부수고 짓 밟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대적하고 결국 자신들의 자존감과 의를 지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여 버린 것이다. 인간은 나의 존재가치와 자존감을 치고 들어오면 그 상대방이 하나님이라도 죽이려고 하는 마귀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를 죽이는 살인자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때문에 이들은 율법적 의를 배제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십자가 구원의 의를 이해할 수도 또한 인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성도를 미워하고 박해하며 죽이려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으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의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짐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당연히 이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행한 율법적 행위와 노력과 열심으로 쌓아놓은 공로와 업적에 근거하여 의롭게 된다고 굳게 믿고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데 목숨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무상으로 선물로 입혀지는 은혜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의 대척점에 서서 은혜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자신들의 피땀으로 세운 의를 무너뜨리고 부시고 저주하고 부정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엄청난 죄악을 선택하더라는 것이다. 의를 지키겠다고 하는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죽여 버리는 독사로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먼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내셨기 때문에 그분안에 있는 성도에게도 필연적으로 도래되기 때문에 주님은 ‘나를 위해 너회가 미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 십자가만 의지하고 나타내고 자랑며 십자가가 삶을 살아낸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율법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순교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때문에 오직 예수 십자가 의만을 자랑하고 전하는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 22-23)라고 예수를 인하여 받는 핍박을 복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성도의 지향성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 영역의 싸움과 핍박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의로,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들어가는 나라이다. 절대로 율법 지킴과 행위의 의로움과 공로를 쌓아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다. 세상 육신의 안일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며, 율법적 행위로 자신의 의와 영광을 챙기기에 열심을 부리던 내 옛사람은 반드시 죽음으로 삭제되는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게 된다. 하나님은 십자가 구원 성취 전부터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새 마음, 즉 성령이 주장하는 마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겔 36:26), 성취하셨으며, 현재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계신다. 새 마음이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속한 마음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거듭난 점도 흠도 없는 영생으로 사는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며, 나만을 위하여 살던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 삶으로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 온전히 시행되는 천국으로 지어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는”(마 24:35)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신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걸레 같은 의를 철저히 깨고, 부시고, 죽이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채운 새 마음을 주신다. 진리의 말씀이 좌우에 낱선 예리한 검으로 내 마음에 파고 들어와 나라는 ‘자아’를 쪼개고 도려내기에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며 십자가 죽음으로 정착된다. 선지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을 때려 부수는 방망이요 인간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녹여서 태워버리는 불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렘 23:29), 신약에서는 그 어떤 검보다 예리한 칼로 우리의 생각, 골수와 관절과 뼈까지 찔러 쪼개는 해부로 자아를 죽이는 역할로 말씀하고 있다(히 4:12).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 성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티끌의 ‘없음’과 무가치함과 무능함을 자각하게 되며, 자신의 존재가치가 삭제당하는 자기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기 위한 고난과 시험과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된다. 그분이 불가항력적 은혜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해부하여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육적 자아가 해체당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고 가신다. 그러므로 그 핍박의 현실은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먼저 자신이 삭제되는 자기 부인의 삶으로 시작되어 결국은 십자가 죽음으로 정착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함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옛사람 죄인이 죽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됨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한 증거이다. 그래서 주님은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라고 천국의 존재가 됨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왕의 자리에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완전히 비워진 마음에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담으시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시고 하라는 말씀만 하시는 아버지 주체의 삶과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살아내셨다. 그 삶은 자신의 이름과 영광과 숭배와 섬김을 받아내는 삶이 아니었다. 반대로 우리를 섬기려 오셨으며(마 20:28), 그 섬김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조롱과 멸시와 핍박과 매 맞음이었으며, 무력한 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희생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십자가 삶이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7-8).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본받아 반드시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끌려가게 되며, 절대로 자신의 주체성이든가 가치를 내 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만을 믿고 의지하며, 자랑하고 전하게 됨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당하게 된다. 때문에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고 날마다 지게 되는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십자가 삶에 대하여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으로 간주한 것이다(고전 15:31). 왜냐하면 오직 나만을 위해 마귀의 종으로 죄의 종으로 살던 그 옛사람이 죽어야만이 영원히 사는 그분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그 죽음은 성도에게는 복된 죽음이며(계 14:13), 영생을 살기 위한 죽음이기에 기뻐하게 되며 자랑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르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로 구원받아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서는 죽은 자이며, 또한 이 세상도 성도에게는 죽은 세상이기에 더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성취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는 이제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영적 존재의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갈 5:24) 때문에 실제로 육적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후 5:17),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탄식으로 내 자아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애착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나의 존재가치로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죽어도 이러한 집착과 애착들을 스스로 놓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며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십자가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삶으로 끌고 가신다.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그 옛사람이 새 사람으로 인해 부인되고 깨지고 부서지고 죽어야하는 영적 싸움을 하게 됨으로 나에게는 ‘핍박’으로 감지된다.

핍박은 밖에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율법주의 자들로부터 당하는 박해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성령님이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선한 일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말씀이 검으로 내 안에 들어와 예리한 칼로 나의 생각, 골수와 관절과 뼈까지 찔러 쪼개는 해부로(히 4:12) 내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사람을 탄생시키시는 의로운 일이 나에게는 핍박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즉 내 옛사람이 부인되고 죽음으로 정착되는 십자가 삶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의가 내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는 일이기에 주님은 ‘나를 인하여 받는 핍박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며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의가 내 안에 임할 때 내 옛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됨으로 나에게는 핍박으로 감지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과정이 바로 주님이 앞에서 나열하여 주신 팔복이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각으로 애통하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진리를 간구하게 되며, 온유와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하나님과 화평케 되며,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거듭날 때 내 옛사람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삭제되는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내 안에서 당신이 거할 처소를 만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동안 나 자신을 위해 쌓아두었던 이 세상의 것들이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삭제되는 내 자아가 죽는 핍박으로 분쟁과 분리가 일어나게 됨을 말씀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심이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하려 오셨음이라'(눅 12:49-51)라고 말씀하심으로 성도 안에서 옛 사람이 진리의 검으로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죽어 삭제되는 전쟁을 치려야 하기에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 10:34-3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는 해산의 고통을 겪게됨으로 십자가 삶은 이 역사속에서 분쟁으로 불로 검으로 감지되며, 또한 고난과 시련과 핍박으로 감지된다는 말씀이다.

내 영은 날로 진리의 말씀을 먹음으로 하늘나라 존재의 삶으로 정착되어 가지만, 동시에 내 육신은 이 세상의 것을 쫓아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려고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이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서로 분쟁하며 육신의 사람이 영의 사람을 핍박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미리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육신으로 사는 자가 성령으로 사는 자를 핍박한다고 말하고,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핍박의 갈등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2-24). 이것이 성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며 성도에게는 핍박으로 감지됨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는 애통의 울부짐이 터져 나오게 된다. 하지만 그 핍박을 통하여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자기부인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며, 십자가 삶을 자진하게 되며, 성도의 죽음이 곧 바로 천국으로 이어지는 영생을 살기 위한 복된 죽음임을 깨닫게 됨으로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하늘의 존재로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성도의 복된 삶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 예정에서 핍박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와 같이 성도는 내 옛사람이 철저히 부인되고 죽어야 하는 그 핍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애통의 탄식이 나오게 되고, 진리만을 추구하는 목마름과 굶주림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는 온유한 자로 말씀에 순종하게 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청결한 자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연합으로 이제 그 어떠한 핍박도 죽음도 성도에게는 기쁨으로 감사로 감지되더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다윗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시 116:15)라고 미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셨으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계 14:13)라고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와 시련이 끝나고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생을 살게 됨으로 주님은 ‘너회가 복된 자로다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라고 선언하여 주셨다. 즉 성도에게는 그 옛사람의 핍박과 죽음이 오히려 영생에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이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신랑 예수와 함께 사는 그 영원한 천국은,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영원을 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