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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오직 은혜 2019. 11. 21. 21:2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선포하시면서 첫 번째로 복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심령의 가난함’은 성도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전 복받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침노하여 들어오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임하는 복음의 선포이다. 이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도덕과 윤리적 행위, 또는 성화를 주장하는 강령이 절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읽어야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상수훈의 팔복은 창세전 복받기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임하게 되는 하늘나라의 영생이며, 그 하늘의 복을 받은 자는 이 세상 원리의 삶과 완전히 반대의 삶으로 이끌려가게 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죄의 종으로 태어나 죄만을 생산하는 죄의 조성자이기에 하늘나라 삶의 원리, 즉 산상수훈의 말씀을 절대로 이해할 수도, 따를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또한 그 누구도 가난한 자로, 주리고 목마른 자로, 애통하는 자로,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핍박과 죽음을 당하게 되는 십자가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이 계시하는 복은 인간의 자력으로 쟁취되는 이 ‘세상 복’ 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음을 철저히 인식시키기 위한 역설적인 설교이다. 즉 천국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행위의 의로움과 공로와 업적으로 쟁취되는 나라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는 선포이다. ‘천국의 복’은 말씀 그대로 이 세상에 속한 ‘세상 복’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늘나라의 복이기에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쟁취되는 나라가 아니며, 그 나라는 이 세상 원리와 반대로 버려지는 가난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애통으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핍박과 조롱으로,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는 자에게만 입혀지는 은혜의 선물임을 확실히 밝히는 복음의 진수이다.

심령의 가난은 처음 자리에 대한 자각이며 광야로 시작된다.

‘심령의 가난함’은 재물이 많고 작고에 무관한 ‘마음의 가난’, 즉 비어있는 마음을 뜻한다. 내 심령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라는 존재가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의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없음’의 존재라는 실체를 투명하게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려가는 그 심령의 가난함을 뜻한다. 즉 나의 영적 가난함을 감지하고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만을 갈망하는 목마름과 굶주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출발이 바로 광야의 시험이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끌어내시자 이내 광야의 길로 인도하셨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곳이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처지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망의 음침한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황폐한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 그리고 그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의도는 이스라엘을 낮추시기 위함이며, 마음을 시험하기 위함이며, 그분의 말씀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함이며,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이라’ 고 말씀하신다.

‘낮추신다’는 말씀은, 오직 나의 유익만을 추구하던 나의 ‘자아’를 내려놓는 마음의 비움이며, 자신을 하나님에게 의탁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는 비워진 마음 상태를 말한다. 자신의 힘과 노력과 열심의 대가로 육신이 원하는 것을 먹고 즐기는 탐욕과 욕심을 내려놓기 위하여, 자신의 ‘자아’를 건설하기 위한 수고하고 무거운 짊을 내려놓기 위하여, 세상과 단절된 광야로 인도하신다. 그 광야에서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만을 먹으며,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의 옷만 입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만 있어야만 살수있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주관하는 '자아' 가 완전히 기각되고 부정당하게 된다. 그 광야의 시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로 연약한 자로 낮아지게 되며, 세상의 것들이 빠져나가게 됨으로 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낮아지고 비워진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성도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함이라"라고 말씀 하신다. 성도는 내 육신을 위해 먹던 세상 양식이 끊어짐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게 되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생명의 근본임을 깨닫게 되며,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사는 하늘의 존재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게 된다.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치가 바로 티끌과 먼지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임을 알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시험을 주셔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게 하시며,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없음의 존재이며, 저주와 죽음으로 종말하게 되는 패역한 죄인인지를 인식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만을 갈망하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의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면, 죄와 사망이 무엇이며, 구원과 생명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광야의 시험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며,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바로 죄와 사망에 던져진 세상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너를 주리게 하신다’는 말씀은, 죄악과 사망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만을 끄집어내어 세상과 단절된 광야로 인도하심으로 육신의 탐욕으로 먹던 세상 양식을 끊게 하심을 말씀하신다. 그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과 홍해 바다로 세상을 단절시키고 홍해의 세례로 ‘애급의 수치를 물러나게 하시는’ , 즉 세상에서 살던 옛사람이 홍해 바다에서 죽고, 가나안을 향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솟아나와 광야의 시험을 거쳐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받는 출애굽 사건이다. 옛사람의 죽음이 바로 세상을 향해 죽는 굶주림과 목마름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구원의 의에 대한 복된 굶주림과 목마름이다.

이와 같이 천국의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빠져나온 ‘출애굽’ 한 자들이며, 세상과 단절된 광야의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이끌어내시고 세상 애급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홍해의 바다로 애급 군대를 몰살하시고 닫아버렸다. 성도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으로 세상을 위해 살던 내 옛사람이 죽는 과정을 광야에서 겪게 하신다. 그 그림이 바로 애굽인으로 살던 60만 명이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먹여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 즉 생명의 말씀으로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피조물 60만 명만이 예수의 모형인 여호수아에게 속하여 요단강을 가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건이다.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더는 세상의 것으로 배를 채워 멸망으로 달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성도는 영생으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먹기 위해 이스라엘이 겪어낸 40년 광야의 삶을 걷게 된다. 즉 세상의 것과 단절되는 굶주림과 가난으로 이끌려가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만을 받아먹으며,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의 옷을 입으며, 하나님이 친히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길로 이끌려가게 된다. 세상과 단절되는 광야에서 성도는 이제 세상을 향해 살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영으로 하늘나라에서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하늘나라 원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하늘나라의 삶은 영으로 사는 삶이기에 육신으로 살아낼 수 있는 삶이 아니며, 육으로 지키고 실천하는 노력과 열심의 대가로 이루어지는 삶도 아니다. 그 나라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성취하신 구원과 생명이 하나님 은혜의 덮음으로 내 심령 안에 뚫고 들어와 나를 장악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의 열심과 공로로 입혀지는 나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이끌고 가시는 광야의 삶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이며’, ‘나는 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자신의 실체를 철저히 깨닫게 하신다. 천국이 나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이태까지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가 기각되고 부서지고, 깨지고, 빠져나가는 철저히 비워지는 자기 부인, 자기 붕괴로 나타나게 됨으로 천국의 복이 나에게 임하게 될 때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이다. 즉 가난하다는 것은 자아가 깨지고 부서지고 비워진 텅 빈 마음이며, 그 텅 빈 마음에 하나님을 담은 새 피조물을 말하며, 오직 택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에게만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주님은 이들을 ‘복 있는 자여’ 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 육은 끝없이 육신의 욕망과 탐심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이며, 마귀의 종으로 태어나 마귀의 조종 아래에서 마귀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기에 절대로 하늘나라 원리의 삶을 알 수도 또한 살아낼 수도 없으며, 그 삶은 육신의 소욕을 거슬러 사는 삶이기에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요구 사항은 지키고 실천하고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위해 쌓아두었던 이 세상의 것들이 몽땅 털리고 버려지고 포기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로 추락하는 완전한 비워진 마음의 상태를 말씀하신다. 즉 한마디로 쟁취하여 얻으라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몽땅 버리고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어라는 역설이다.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지켜 행하는 대가로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쟁취하는 복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거지 나사로와 방불한 자로 없음의 자리로 내려간 가난한 심령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 삶은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삶이 아니기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먼저 살아내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열매를 무상으로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있도다’ 라고 팔복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면 먼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심령의 가난함’을 살아내셨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심령의 가난을 먼저 살아내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복을 주시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몸으로 천국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내셨다. 그분이 이 세상에 천국으로 오셔서 천국의 삶을 살아낸 삶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갈망하고 다투어 쟁취하려는 명예, 재물, 부귀와 같은 이 세상에서 받는 영광이 아니었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왕의 자리에서 죄인의 육신을 입고 오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신 마음의 비우심이었으며, 그 마음에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담으시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시고 하라는 말씀만 하시는 아버지 주체의 삶과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살아내셨다. 그 삶은 자신의 이름과 영광과 숭배와 섬김을 받아내는 삶이 아니었다. 완전히 반대로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조롱과 멸시와 핍박과 매 맞음이었으며, 무력한 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희생이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천국으로 오셔서 살아내신 천국의 삶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가난한 자로 내려오신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죽음의 삶이었다.

빌 2:7-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세상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가난하고 천한 자리로 내려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예수를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또한 그 십자가 삶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전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여 놓으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가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은 오직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요구되는 특권이며, 그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먼저 살아내신 예수님이 친히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를 장악하시기에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의로운 일이다. 즉 ‘심령의 가난’은 내 의지로 격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심령의 가난을 살아내시고 성도에게 그 심령의 가난을 전가하여 주시고 그 삶으로 끌고 가시며, 그 심령의 가난이 바로 천국이 나에게 임한 증거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은 부유한 천국으로 오셨지만, 우리에게 부유한 천국의 복을 내려주시기 위해 그분이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가난으로 상한 심령으로 내려가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배하시고 심판하시는 부족할 것 없는 부유한 천국의 소유자이시다. 그럼에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죄인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비천한 자로 가난한 자로 내려오셔서 가난한 삶을 살아내신 것이다. 성도는 이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내신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로 끌려가게 된다. 그 삶이 바로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는 순종이다.

자기 부인의 십자가는 내 옛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주장하고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이끄시는 하늘나라 삶의 원리를 뜻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길이 바로 천국으로 향하는 가난한 심령이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가 되었기에 당연히 신랑 되신 주님의 간섭에 순종으로 화답하게 되며, 그분과 하나로 사는 그 상태가 바로 천국이 내 안에 임하여 천국의 삶을 사는 복된 삶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은 바로 자신만을 위해 살던 그 옛사람에 대한 자기 부인이다. 이 세상의 탐심으로 꽉 차있는 오물들을 끄집어내시는 가난한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애통하는 마음을 주신다. 그분이 먼저 상한 심령으로 아버지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구원과 생명을 성취하셨기에 당연히 십자가로 구원받은 성도도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삶을 보여준 다윗의 고백

심령의 가난은 자신의 처음 자리에 대한 자각이다. 자신의 처음 자리가 바로 ‘티끌’ 임을 알게 됨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것이며, 그 깨달음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의 손을 잡고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어 당신의 영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함으로 내 영이 그분을 알아보고 순복하게 되는 성령님의 인도를 가리킨다. 내 안에 천국으로 뚫고 들어온 성령님은 먼저 나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게 하시며, 나의 존재가치가 바로 ‘없음의 티끌’임을 인식시켜 주신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자각이 바로 자신에 대한 부인과 죽음이다. 그렇게 티끌의 존재가치를 알고 깨닫는 자만이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며,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와 사랑과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에 내려보내어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만드신다.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를 가난한 자로 택하셨기에 이 세상에서 연약한 자로 오직 목자의 보살핌과 인도가 있어야만이 살 수 있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리로 끌어내리신다. 성도는 오직 목자이신 예수 한 분만을 구하고 바라보며, 그분의 구원과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완전한 의존자로 그분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게 됨으로 다윗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줄게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 지시는 자시라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40: 17).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자리에 있음에도 그는 자신이 바로 죄와 사망에서 건지심을 받아야 하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임을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의를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성도의 부르짖음이다. 다윗은 세상 적으로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왕으로 있지만, 그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애통한 자로, 진리의 말씀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묘사하고 있다. 시편 51편에서 더 선명하게 심령이 가난한 자의 애통이 나오고 있다.

시 51: 1-6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 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죄를 범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짓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잘 살고 있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할 때 다윗은 이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죽인 죄들로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의 회개 대신, 자신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여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십자가의 구원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모태 중에서 죄인으로 잉태되어 나왔기에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영원한 죄 사함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근본적인 죄의 뿌리 즉 죄의 본질을 영원히 제거하여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이다. 그 본질적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 그분이 제거해주셔야 그 죄의 뿌리가 제거됨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죄를 영원히 없애주시는 어린 양의 십자가 구원을 구한 것이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함이다.

시 51:7~8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우슬초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솔을 상징하며, 다윗이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십자가 구원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을 박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그 ‘꺾으신 뼈’는 또한 우리의 옛 죄인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꺾어서 죽음으로 당신의 새로운 아들로 탄생시키는 영원한 죄의 사하심과 영생이 주어짐으로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라는 복음을 찬양하고 있다. 이 엄청난 복음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은 매번 드리는 짐승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아니하시리이다” (시 51:16~17).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입혀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시련이다. 자신의 존재가치, 즉 실존을 들여다보는 마음을 주심으로 자신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시인하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게 인도하시며, 십자가 구원만을 필사적으로 갈망하는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을 주신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은 나의 의지적 깨달음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그분을 나에게 나타내 주심으로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게 되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간절히 구하게 되며,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의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이 애통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만약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지 아니하였다면, 다윗은 왕의 자리에서 상한 심령과 구원의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의 애통이 터져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왕의 권력으로 사람들로부터 숭배를 받는 교만에 빠졌을 것이다. 다윗에게 그러한 유혹과 시험과 고난의 사건들을 허락하신 것은 다윗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시키기 위함이며,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의 조성자임을 깨닫게 하는 상한 심령으로 내려가 십자가 구원의 의를 갈망하는 애통을 주시기 위함이다. 즉 다윗에게 자신의 본질적 죄를 들여다보는 영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십자가 구원만을 구하는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을 주시기 위한 섭리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격발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의가 성취되었고, 그 구원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먼저 이 땅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핍박과 매 맞음과 조롱과 멸시와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맏아들이 살아낸 그 심령의 가난과 애통함을 주시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핍박을 받는 자로 끌어내리시고 천국의 복을 은혜로 입혀주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심령의 가난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가난한 심령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먼저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다. 점 없고 흠 없는 그분이 우리를 품에 안고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우리 옛사람 죄인이 죽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늘의 존재로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심령의 가난은 내 옛사람이 죽어서 없어지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되는 영원한 십자가 구원을 담고 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다윗과 사도바울의 고백이 바로 우리 성도의 고백이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시는 어린 양의 제물, 십자가의 구원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 즉 깨어진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울부짖는 애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자아가 깨지고 빠져나가는 비워진 마음을 말하며, 그 비워진 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보화만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새 생명의 잉태를 뜻한다. 천국의 복을 받은 자는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며 ‘나’ 자신만을 위해 살던 ‘자아’가 완전히 부인되는 자기 죽음으로 정착된다. 천국이 내 안에 임하는 순간부터 이 세상 오물로 꽉 차있었던 탐심과 욕망과 거짓과 교만과 위선들이 깨지고 부서지고 잘려나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자리로 내려앉을 때 그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철저히 비운 진정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렇게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천국에서 아버지의 품 안에 안기는 복된 자로 정착되는 것이다. 자신의 죄 된 실체를 더욱더 투명하게 깨닫게 됨으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을 구하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 광야에서 끝없는 타락, 유혹, 실패, 절망, 고통,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도저히 죄와 사망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깨닫게 됨으로 바울의 고백과 같이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죄옥에서 구원하리오’ 라고 필사적으로 구원을 외치는 마음이 찍기는 상함과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나는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면 인간쓰레기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존재' 이라는 실체를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은 이 세상 사람들이 정의하여 추구하는 필사적인 쟁취가 아니라, 반대로 내려놓는 것이며 버리는 것이며 포기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인하는 붕괴이다. 자신이 바로 죄인으로 잉태된 철저한 죄의 조성자이며, 패역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 상태는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는” (롬 3:12-18) 살 가망이 없는 심판의 대상이다. 그렇게 자신이 철저히 폭로 당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상한 심령과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아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그분이 택하여 주셨기에, 불려 주셨기에, 그분을 알아보는 영을 열어주셨기에, 그분의 구원을 갈망하는 믿음을 먼저 주셨기에, 은혜로 나를 품어주셨기에,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마음의 가난함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서는 존재 자체가 저주와 죽음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상한 심령이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며, 진리의 말씀을 갈망하는 끝없는 갈증과 굶주림을 체험하게 되며, 그 자에게 천국이 임하게 됨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회의 것임이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심령의 가난을 위한 성도의 광야생활

심령의 가난은 자신의 처음 자리에 대한 자각이다. ‘티끌’의 존재가치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자기인식은 허무와 불가능이며, 자아의 무너짐과 부정이며, 육적 인간성의 붕괴와 죽음이다. 그런 자에게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다윗과 같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이라며, 바울의 고백과 같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다. 때문에 나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수하며, ‘나가 나로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사야 41:17~20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

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게 하는 마음을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갈증과 배고픔과 헐벗음의 가난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과 그분을 간절히 구하는 갈증과 목마름을 주시기 위해 그분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광야로 인도하신다. 세상 사람으로 살던 내 옛사람이 광야에서 굶어 죽어야만 하나님에게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선명한 그림이 바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끌어내어 바로 약속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모든 것이 복으로 구비되어 있는 평안의 안식처로 들여보내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오자마자 들어선 곳은 음식도 물도 거처지도 없는 메마른 죽음의 광야였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의 안락한 안식처에 돌아가지 못하게 홍해를 다시 닦아 걸어서 애급과 완전히 차단시키셨다. 그리고 왜 그들을 광야 40년이라는 기나긴 굶주림의 가난을 주셨는지를 말씀하여 주신다.

신 8: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기나긴 40년 광야의 시험을 주신 목적은, 육신의 배를 채우던 이 세상의 탐욕과 욕심으로 먹던 세상 양식을 완전히 끊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육신을 위한 이 세상 양식은 모든 사람이 추구하고 쟁취하여 쌓아서 누리는 평안과 형통한 복으로 감지되지만 실상은 저주와 멸망과 죽음이기 때문에, 천국의 복을 받기로 택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세상 양식을 끊는 배고픔과 굶주림과 목마른 갈증으로 광야의 삶이 시작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의에 목마르고 굶주리는 가난한 자로 만들어 가심을 이스라엘 40년 광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택한 백성은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목마르고 굶주린 자로 이끌어 가신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를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으며, 그 진리의 말씀을 먹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됨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을 지향하게 되며, 나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신 그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됨으로 내 안에 오직 그분으로 충만한 천국의 백성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받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임하게 되는 복음을 미리 선포하여 주셨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

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가난한 자로 만들어 내시며, 반드시 그 가난한 마음에 아름다운 소식, 천국의 복음으로 채워주신다. 천국의 복이 내 안에 침노해 들어옴으로 상한 마음이 고침을 받고, 죄와 사망에 표로된 나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며, 저주의 고통 속에서 애통하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나에게 화관과 희락과 찬송으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그 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영광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세상과 대치되는 ‘심령의 가난’

세상에 속한 멸망의 후손들은 절대로 ‘심령의 가난’으로 내려갈 수가 없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를 철저히 구분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이 세상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멸망의 자식들을 대표한 바리새인들은 높아지기의 삶을 추구하며, 칭찬받기를 좋아하며, 자신을 의인으로 치장하여 의와 영광 챙기기에 열중하는 자들이다. 때문에 그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 그들의 외식적 행위는 회칠한 무덤이며, 마귀의 행사라고 예수님은 찍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에게 임한다고 말씀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 25-33).

마 23:5-7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반대로 천국의 복을 받기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낮아지기의 삶을 추구하게 되며, 자기 부인의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구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며, 생명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의를 위하여 미움과 조롱과 핍박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럼에도 복받기로 작정된 성도만 이 모든 것들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입혀주시기 위한 선한 일로 감지되며,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 삶을 복된 삶으로 감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성도를 이 세상 광야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긍휼을 입어야만 살 수 있는 자로, 이 세상에서 미움과 주롱과 핍박을 받는 십자가 죽음으로 끌고 가셔서 강권적으로 은혜를 입혀 천국의 아들로 입성하여 주시기 때문에 ‘너회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 5:3-12).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이 설교하신 산상수훈과 완전히 반대로 설교하고 외치고 강요하여 ‘자기보다 배나 더 되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열심과 노력으로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와 영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신앙인의 목적지로 설교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가착 없이 버린 ‘배설물’이며, 저주와 지옥 불에 던져지는 미끼이다. 그럼에도 설교자들은 교인들에게 배설물을 복덩어리로 치장하여 주고, 저주를 축복으로 가장하여 주고, 사망의 지옥을 천국으로 포장하여 주고 있다. 하여 무지한 교인들은 눈을 뜬소경과 같이 그것들을 복으로 잘도 받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영과 다른 복음에 대한 것은 잘도 받아들인다고 지적한 것이다 (고후 11:4).

모든 인간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그것이 독이라도 먹게 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들의 힘으로 얻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자기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악한 마귀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변질된 복음을 더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라고 말씀하셨고,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자기보다 배나 더 되는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악한 자들이라고 (마 23:13-15) 저주하신 것이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열심과 노력과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선한 자로 훌륭한 신앙인으로 서는 것이 아니며, 또한 변화되고 성장하여 성숙하는 성화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락과 범죄와 실수 등 악한 것들을 체험하게 하여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실체가 바로 저주와 사망과 지옥임을 깨닫고, 구원과 생명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로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육신적 타락, 범죄, 실수, 질병, 고통, 고난 등을 허락하여 나의 불가능함과 무능함과 추악한 내면을 철저히 폭로하시고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가게 하신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주셔서 자신의 의를 지키게 도우 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도우는 동역자로 능력을 행하는 모델로 세워주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선한 행위 구제 등으로 이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썩어짐을 막는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부르신 것도 아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죄의 본성과 본능을 계속 폭로당하는 실수와 타락과 유혹을 허락하심으로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죄악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하심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자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구하는 완전한 하나님 의존자로 만들어 가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주시는 방법이다. 우리를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지켜주셔서 의인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탄생하여 죄만을 생산하여 내는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 사는 자신의 그 처절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알고 구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악한 존재들을 허락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하나님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막으심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죄에서 지켜주신 것이 아니라, 타락을 허락하셨기에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주셨고, 따 먹도록 사단을 뱀으로 가장시켜 인간을 유혹하는데 이용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의 불의 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으로 세상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지 않고, 오히려 탕자의 불의 한 요구를 다 들어주시고 재산을 주어 세상에서 타락으로 추락하도록 방관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의도는 아들의 방탕함을 막기 위해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오물들을 경험함으로 그가 추구하는 이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돼지 굴처럼 더러우며, 이 세상은 저주와 죽음임을 체험하게 함으로 아버지의 참 사랑을 깨닫고 영원히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는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혜택은 오직 당신에게 속한 자에게만 허락하시는 특권이다. 오직 성도만 십자가의 삶을 지향하게 되며, 성도만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자신에게 당하는 모든 것들을 천국의 복으로 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도의 죽음이 귀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시 116: 15).

반대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그 누구도 가난한 자, 고통을 받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 핍박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 죽고 싶은 자가 되기를 원하시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이 세상에서 그러한 대접을 당하는 자가 복된 자이며,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에게만 복을 주시기로 미리 정해놓으셨기에, 반드시 성도를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자로 강권적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육신은 그 길 가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이끄심을 대적하게 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삶을 살아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분이 말씀의 검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히 4:12) 결코 우리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길로 끌고 가신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 속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주고 막아줌으로 죄를 안 짓는 자로 실수를 하지 않는 의인으로 만들어가는 성화의 길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추악한 죄들을 사용하여 진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죄가 무엇이며, 그 죄가 얼마나 저주스러우며,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옥임을 깨닫게 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의와 생명의 말씀만을 구하는 자로 절대적 하나님의 의존자로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는데 목적을 두신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사도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자아인식이 점차적으로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즉 성도라고 부르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로 부르고, 나중에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로 자신을 낮추게 되며, 말년에 그의 신앙 여정이 다하여 성숙한 신앙인으로 설 때 그에게 터져 나오는 고백이 바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타이틀이다. 바울은 신앙의 여정에서 자신이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말씀이 예리한 칼이 되어 그의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해부로 자신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하더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죄 밖에 내놓을 수 없는 완전한 죄인이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을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믿음도 자신의 소유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가 된 자에게 터져 나오는 심령의 가난한 자의 고백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진리의 말씀이 나의 혼과 관절과 골수와 뼛속까지 파고들어와 나를 철저히 해부함으로 점차적으로 자신의 마음 안에 쌓여있는 추악한 외식과 같은 마음속 깊이 숨겨진 죄들이 발견되고 폭로 당함으로 ‘내가 바로 죄의 조성자로 죄 만을 생산하는 불가능한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즉 나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자녀 되기에 기여가 안 되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됨으로 그분 앞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내려놓고 그분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만을 구하며, 그분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받아들이게 되며, 그 삶이 바로 복된 삶임을 더디어 깨닫게 됨으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 (갈 6:14)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가 되었기에 당연히 신랑 되신 주님의 간섭에 순종으로 화답하게 되며, 그분과 하나로 사는 그 상태가 바로 현재 천국이 내 안에 임하여 천국의 삶을 사는 복된 자임을 온전히 깨닫고 범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그분의 의로운 열심을 찬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의 진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