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비유의 진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오직 은혜 2019. 6. 21. 19:26
마가복음 7: 5-23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7: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7: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7: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7: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7: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7: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7: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비유는 앞서 6장 게네사렛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 뒤에 제자들에게 주신 비유이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신 일이며, 그리고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일과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과 병자를 고치신 기적이다.

 

먼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냉대를 받으신 사건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기대하고 영접하게 되는 화려한 세상 왕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 낙원을 만들어 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복을 내려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비천한 모습과 초라한 배경으로 오셨기에 세상으로부터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여 배척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처음부터 이 세상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오직 이 세상에서 은닉되어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들어올리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막 6:3-6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

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고향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고 자고 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제사와 율법 지킴에 목숨을 건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지자들과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는 (마 13:57) 마귀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와 이름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기에 주님은 그들에게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막 6:5).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체면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배척하고 은혜 입기를 거부하며 진리의 말씀을 짓밟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과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는 기적들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마치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격이 됨으로 개나 돼지에게 기적을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는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조롱하며 배척한 것이다. 십자가의 구원은 기적과 능력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권능도 행할 수 없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지혜를 계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막 7:3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 왕들의 모형으로 등장한 헤롯과 그 헤롯에게 살해당한 세례 요한이 대조가 되어 나온다. 헤롯왕은 사실 세례요한을 죽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막 6:20). 그럼에도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16살 소녀 앞에서 맹세한 것과 그 맹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세례요한의 목을 벤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열심으로 쌓아놓은 업적과 공로와 의를 예수님이 오셔서 가착 없이 부정하고 부숴버리는 자로 맞서자 이들도 자신들의 체면과 자존감과 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내 핍박하고 죽여 버리는 살인자로 폭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의로운 예수그리스도도 핍박하고 죽였다고 그들의 죄악을 폭로한 것이다 (행 7: 52). 모든 인간은 자기의 ‘자아’를 지키고 자존심을 세워 자기 존재성을 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살인하는 타락한 악마 성을 가지고 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고 침범이 되는 것은 전부 삭제해 버리고 자신을 지켜내고 싶은 마귀의 살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자아 숭배의 악마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바로 하늘의 만나, 즉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구원자이시며,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의 먹이가 되셔서 자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모형화한 사건이다. 무리가 배가 고프니 밥을 먹여야 한다는 육적 현실만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육의 생존에 관한 이 땅의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양식을 구하라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기적이다. 눈에 보이는 육적 생존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제자들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토막과 보리떡 다섯 개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 육적 욕구를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하찮은 보리떡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보이기에 복음을 하찮게 여기게 되며 거절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 6:9)라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부정해 버린 것이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오천 명 넘는 굶주린 장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됨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억지 말씀을 하신다. 그 뜻은 너희가 이 많은 무리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육적 양식을 너희의 능력으로 만들어 줄 수 없는 것과 같이 설사 그들이 원하는 육적 양식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하여도 그들의 육적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즉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여야 하고 장차 주리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양식은 육신의 배를 채우는 이 세상 떡이 아니라 영원히 주리지 않는 하늘의 생명의 양식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다. 즉 너희가 지금 내가 행한 것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양식을 주었을 때만이 그들의 배고픔은 해소되고 넘치게 만족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행하신 기적이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싼 떡, 영생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어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오병이어에서 시작된 식사가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게 함으로 장차 12제자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마리아와 온 유대 땅,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으로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 것임을 상징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네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제자들을 앞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 주님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밤 사경까지 기도를 하시며 제자들을 주시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홀로 바다를 건너가게 한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신나게 흥분되어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밤 사경까지 풍랑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물 위를 걸어서 다가가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외친 것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으로 하늘의 신령한 양식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눈으로 보고 체험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다시 자신들의 생명이 풍랑이라는 현실에 위험을 당하게 되자 이내 주님이 ‘유령’으로 보인 것이다. 그 말은 만약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이적을 영적 진리로 깨닫지 못할 때 예수는 내 현실의 삶 속에서 ‘유령’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내 현실에 침묵하시고 계실 때, 심지어 나를 절벽으로 밀어내는 느낌과 체험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세상 고달픔의 생존에 묶여있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풍랑 속에서 허우적대며 곧 풍랑에 삼킬 것 같은 찰나에 주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물 위를 걸어올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유령’으로 보인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보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명하여 물 위를 걷게 하셨다. 그런데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바람이 불자 두려워하여 바다를 내려다보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만일 물 위를 걷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 능력을 소유한 베드로가 바람을 이겼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에 빠졌다. 베드로는 ‘오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붙들고 있었기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갈 때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진리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베드로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5-37).

그러나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신뢰하여 세상의 풍랑을 바라볼 때 저주의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믿음이나 능력은 성도 자신에게 사유화될 수가 없음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변화산 아래에서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놓고 쫓아내지 못하여 쩔쩔매고 있을 때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매몰찬 말씀을 하신 것이다. 첫 번째 전도 사역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파송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일으키는 능력을 풍성하게 행한 후 그러한 능력이 자기들에게 사유화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아이 하나를 놓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즉 너희가 행한 그 모든 능력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너희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는데 그 능력은 너희에게 매일 들려준 그 진리의 말씀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나오며 그 능력은 바로 예수에게 속한 능력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몇 가지 사건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게네사렛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장로들의 유전을 무시하느냐고 공격하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의 말씀을 던지신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 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7:6~7). 주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들이 장로의 유전까지 지켜가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자고 하는데 사실 너희는 입술로만 섬긴 것이지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데 있었다고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장로 유전을 지킨다는 구실로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왜곡하여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무시하고 대적하더라는 것을 고르반의 예로 폭로하신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부모를 공양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공양의 몫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고르반’ 이라는 구실로 성전에 받치지 않고 자신이 챙겨 먹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부모를 공양하라는 하나님의 법마저 이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데 써먹더라는 것이다. 즉 입으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선민이라고 자고 하는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탐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고르반의 예로 이들의 패역함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너희는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 7:6-7) 라고 이들의 가증한 외식을 지적하시고, 고르반의 예를 들어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18-20)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지금 그들의 율법 지킴을 음식에 비유해서 말씀하신다. 밖에 있는 음식이 몸속에 들어간다고 하여 그 음식이 인간의 마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도리로, 너희들은 깨끗하고 의롭다 함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제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구제로 선행을 하고 도덕과 윤리를 지킴으로 깨끗하다고 자만하고 있는데 그러한 행위의 의로움으로는 절대로 너희의 마음을 깨끗케 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너희에게서 더러운 것이 나오는 것은 너희 마음이 더럽기 때문이지 밖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막 7:15-16).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그 마음이 날 때부터 부패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깨끗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9~10). 죄인의 부패한 마음은 행위와 노력으로 개선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었기에 깨끗한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며,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직 그분만을 담은 새 마음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태어난 옛 육신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 박는 방법으로 제어하여 버리고, 점도 흠도 없는 그분의 의로운 영으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방법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렇게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약속이 되어 있고, 그 속에서 누릴 영생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죄악과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의 것들을 열심히 행하여 하나님 앞에 업적과 공로로 내놓는 그 자체가 바로 죄 없으신 거룩하신 그분에게는 치욕적인 모독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인 속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부패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나열하여 주신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 20-23). 즉 인간의 죄악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막 7:16,18) 말씀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오직 패역한 죄악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거룩한 것과 죄악된 것들을 구별하시고 분리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하늘과 죄와 멸망을 상징하는 이 세상 땅을 분리시키시고, 낮과 밤으로 생명의 빛과 죽음의 어둠을 분리시키셨다. 그리고 창세전 택한 자를 낮과 빛의 하늘로 인도하시고, 이 세상에 속한 자는 밤과 어둠의 지옥에 남겨두시기로 정하신 것이다. 그분은 오직 당신에게 속한 자만 이 세상의 죄와 어둠의 죽음에서 끄집어내어 오직 빛과 영광으로 충만한 하늘나라로 들어 올리시는 구원을 성취하셨다. 즉 이 세상은 죽음의 멸망으로, 당신의 나라는 생명과 영원한 나라로 분리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게 되는 하늘나라에는 다시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던 바다가 있지 아니하고, 밤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 21:23-25) 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서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3-4). 이와 같이 성도는 본래 택함을 받은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의 성취를 위한 목적으로 사는 자들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게 차압당하여 내가 철저히 부인됨으로 오직 그분이 주관하는 모든 일에 순종하는 자로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래서 그분은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삶 전체를 주관하신다. 그렇게 십자가의 삶으로 내가 부인되고 내 안에 있는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를 ‘의인’이라 칭하여 주시고, 그렇게 하나님에게 향한 순종의 마음으로 그분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세를 ‘옳은 행실’ ‘착한 행실’ 이라고 칭하여 주신다.

이제 십자가 복음을 깨닫게 되는 성도는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며 그분 앞에 순종의 삶을 드리기를 갈망하며 최고의 행복으로 감지하게 됨으로 더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에 목을 매인 종의 삶을 살 수가 없는 자로 이끌려가게 된다. 성도는 이 세상에 묶여있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진리를 소유한 자유한 자이며,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그 어디 에서나 천국의 삶을 지향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에 천국이 임하여 날로 날로 확장되어 가는 자에게 무슨 기적과 능력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에게는 보잘것없이 부족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개는 육신의 배를 채우는 떡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살게 되는 하늘의 신령한 생명의 양식으로 충만과 풍성함을 체험하게 되며, 예수님이 유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매 순간 나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영원한 신랑으로 연합된 한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