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핵심 고리는 바로 성자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의 구원 성취를 이루어 가시며, 어떻게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고 가시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설명하여 주신다. 그 핵심의 고백이 바로 성자이신 “그 외 아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다.
독생자 (외아들)
독생자, 오직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격째를 지니고 계신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대표하며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한 본질, 한 성품, 한 인격을 가진 아버지 품속에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영원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로 계셨음을 말씀하셨다 (요 10: 30). 즉 본질상 아버지 품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 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 18) 함과 같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계셨느니라” (골 1: 15-17).
하나님은 창세전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성취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으로 탄생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신이 택한 백성들의 구원과 하늘나라 입성을 아들에게 맡기셨고, 이 세상 임금과 죄에 대하여 심판하는 모든 주권과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 22-24).
그러므로 성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또한 단 한 발자국도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생명의 창조는 오직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지가 창조되었기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고 (옙 1: 4), 그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분의 영으로 영생을 입어 그분에게 속한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신부, 즉 하나로 연합된 부부라고 하셨고, 그가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 그분은 잠시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둘 때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간섭하시고 돌보시며, 그분의 거룩한 자녀에 합당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있다. 때문에 성도는 반드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고백으로 그분에게 속한 신부임을 굳게 믿게 된다.
예수
“예수”의 본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의 이름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 21). ‘예수’는 이 세상의 풍유를 가져다주는 이 세상의 물질과 힘과 권세를 과시하는 세상 임금이 아니며, 유대인들이 갈망하고 기대하는 화려한 다윗 왕국을 다시 건립하는 유대주의 왕도 아니시다. 그분은 분명 창세전 택하심을 받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마 1:21)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 45)라고 이 세상에 오신 의도를 정확하게 밝히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 10)라고 말씀하셨으며; 잃어버린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의 인도를 따른다고 하셨으며;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 3). 그분은 분명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 오신 분이시지, 절대로 이 세상에 복을 내려주고, 발전하고 개선하여 지상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세상 임금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실제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된다.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에 대하여, 즉 그분의 전능하심과 사랑과 영생에 대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제한적 지식과 육적인 인식 속에서는 이해될 수도 또한 알 수도 없다. 그리하여 그분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죄인의 육신을 입으시고 죄인 속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을 계시하심으로 오직 당신만이 생명이시며 진리 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렇게 인간으로 오시게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셨다. 즉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영생으로 이어지는 그 영원한 하늘나라를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왜 이 땅에 보내졌으며, 무엇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를 깨닫게 되며, 실상인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왕의 신분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늘나라의 높은 보좌에서 이 천하고 천한 악한 세상에 죄인을 섬기며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다 (막 10:45)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분은 세상으로부터 멸시 당하고, 핍박 당하고, 매 맞고 조롱 당하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인으로 죽어버린 예수였다. 그분은 분명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죽음에서 빼내어 살리기 위해 오셨으며, 자기 백성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 오신 하늘나라의 왕이시다. 그분의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며,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끌어올리는 구원이었고, 자신의 생명을 주어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한 구원이었으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시기 위해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선한 뜻을 성취하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먼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과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아들 예수가 살아 내신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는다는 것은, 그분이 앞서 이 땅에서 살아내신 철저한 자기 부인과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의 삶, 즉 십자가의 삶을 받아들이는 동행을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 29-30).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는 먼저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세상과 구별된 자여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함께 십자가에 죽는 죽음을 각오한 자여야 함을 제시하여 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오직 그들만이 예수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고백할 수가 있다. “자기 십자가”는 내 인생에서 반드시 겪어내야 하는 고난과 시련으로 내 옛사람 죄인이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 하는 내 ‘자아’가 죽는 십자가이다. 성도의 인생의 목적은 이 세상의 힘, 능력, 명예, 재물을 쌓아 나를 강한 자로, 유명인으로 세우는 자아 확장과 자아실현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철저한 자기 죽음의 광야 생활을 거쳐야 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주셨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의 소유를 다 빼앗기고 헐벗고 굶주리고 수치와 조롱으로 부잣집 문 앞에 버려진 채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 내려간 ‘거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거지 나사로가 바로 천국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자로 이 세상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천국의 영생을 누리는 가장 부유한 자, 복받은 자였다 (눅 16:19-26).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선택받은 당신의 자녀에게 지금까지 내 존재 가치로 쌓고 소유하여 왔던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게 하시며,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거지’가 되어 하루하루 오직 당신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어 하늘의 신령한 복, 영생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자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 3).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천하를 달라고 구하고, 세상에서 머리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능력과 힘을 구하고 있다. 이 썩어짐의 천하를 얻고 천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면 그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물으신 것은 성도의 삶의 목적이 이 세상의 썩어짐의 물질과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막 8: 36).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소유된 자이기에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 4)라고 주님은 아주 확실하게 성도의 삶의 근원과 생명의 원천을 제시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과 영생에 대한 복음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로 쌓아놓은 이 세상의 소유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 사는 자가 성도이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으로 매일 나를 비우며, 죽어지는 자기 부인과 순종의 삶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지어져가는 삶이 바로 나의 일상에 적용되는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함과 같다. 우리는 오직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이 역사와 나의 일생을 이끌고 가시는가에 대하여 이해하고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그 말씀이 곧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관적 차원에서 ‘나’ 만 구원받아, ‘나’ 만 천국에 가서, ‘나’ 만 행복하게 사는, 내 탐심에서 나오는 ‘내 구원, 내 천국’이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다.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 7).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백성으로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분에게 앞서 아버지의 영광을 천하에 드러내고 나타내는 철저한 순종의 삶, 즉 십자가 삶을 살아내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그 일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 23-24).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실 것을 기도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 12: 28).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의 삶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십자가의 삶을 허락하시어 내 인생에 고난과 시험과 고통이 들이닥치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이 세상의 것들을 내 존재의 가치로 여겼던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썩어짐의 저주와 죽음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마귀가 공급하는 이 세상의 것들을 내 것으로 챙기는 자기 생존의 방법, 즉 죄되 습성을 태어나면서 배워 왔다. 모든 사람을 나의 경쟁자로 삶고 나 자신만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다른 이를 짓밟고, 빼앗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욕망과 탐심으로 살아온 자들이다. 이러한 삶이 습관화되어 당연한 것으로 집착되어 버렸고, 공식화되었고, 오직 나의 유익만을 추구하며 나의 이름을 빛 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성공의 가치로 되어버린 것이다. 즉 이 세상의 힘과 재물이 진리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에게 힘과 가치가 된다고 인식하는 가증한 것들을 신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며 숭배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는 패역한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정없이 매몰찬 말씀을 하셨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9). 이 말씀은, 이 세상 힘, 명예, 자랑, 재물 등 이와 같은 것들이 이미 나의 소중한 소유, 즉 내 눈과 팔과 다리와 같은 끊을 수 없는 존재로 되어 버렸기에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걸음 돌로 되어버린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그것들은 내 살과 피가 되어 내 몸속에 깊이 침투하여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잘라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그분이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눈과 팔 다리가 찍게 나가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검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렇게 세상의 것들을 찍어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나는 그것들이 잘려 나갈 때마다 아프고 고 통스로 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은 눈이 뽑히고 팔 다리가 잘려 나가면 고통과 아픔을 겪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오히려 “나으니라” 즉 나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막 9: 48) 영원한 지옥이기 때문에 비록 잘려 나가는 죽음의 고통은 있지만 그것들이 나에게서 반드시 잘려나가야 내가 고침을 받고 온전한 자로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1-3). 제자들이 조상의 죄인가 아니면 본인의 죄로 눈이 멀었는가고 예수님에게 물었을 때,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눈먼 자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대답이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구원의 선한 뜻을 이루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목적으로 모태에서부터 우리의 인생 전부를 간섭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태어나면서 소경이 되게도 하시고, 요셉처럼 죄 없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도 하시며, 욥처럼 순식간에 모든 소유, 자식 아내 친구도 빼앗아 가시며, 40년 동안 양만 치는 목동으로 모세를 묶어 놓게도 하시며, 선지자 이사야를 3년 동안 벌거벗겨 맨발로 돌아다니기도 하시며, 호세아에게 창녀를 아내로 삼으라고도 하신다. 바울처럼 핍박과 매 맞음과 감옥살이와 굶주림과 온갖 능욕을 다 당하게도 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같이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하셨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아픔과 고통이 되지만, 이는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하여 그분의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한 뜻임을 성도는 알게 된다. 그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성취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반드시 져야 되는 십자가를 막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창조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아픔과 고난과 시련과 연단을 상처로 여기고 치유 세미나 같은 것들로 치유하겠다고 나서고, 또는 조상의 저주로 겪는 고통과 고난이라고 조상에게 다 뒤집어 쒸워서 그 저주를 끊는 망령된 기도 운동을 벌인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자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로막는 사단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우리에게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2-13).
성도에게 있어서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분명히 불과 같은 시험이 오면 ‘복 있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여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선한 일이기에 그 일에 순종으로 즐거워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그것을 상처 혹은 조상의 저주로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내 선악과 구조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마 10: 28-31).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이기에 그 일에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장성한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밉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구원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선지자, 제사장, 왕은 모두 단 한 분이신 참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 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 10-11).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6)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은 바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여 왔던 구원자이신 참 메시아 이심을 고백한 것이며, 바로 모든 믿는 성도를 대표한 고백이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분으로서 본체가 하나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요 10:30). 하나라는 뜻은 “아버지와 아들은 한마음이다”, 즉 속성과 성품과 능력, 영광과 권세와 모든 면에서 동등하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예수는 자신을 철저히 낮추시고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셔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의 주’ 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 하늘 보좌에서 이 죄로 가득한 세상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늘나라 왕의 신분을 완전히 내려놓으시고 이 세상과 죄인들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거처하는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구유에 눕혀 있었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피와 살을 먹고 (요 6: 55) 죽음에서 살아나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 시도이시다.
그분은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거나 자신을 만왕의 왕으로 나타내려는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으로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 내셨다. 언제나 아버지께 초점을 맞추어 전적으로 아버지께서 하라는 일만 하셨고 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5: 19). 아버지에게 향한 그분의 순종의 삶은, 이 세상으로부터 온갖 고초와 핍박과 매 맞음과 조롱과 수치를 당하시고,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일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살아내신 십자가의 삶이다. 그리고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이와 같이 성도는 그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창세전 선택된 자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목표로 그리스도를 맏아들이 되게 하심으로 예수가 살아낸 십자가의 삶을 본받아 아버지의 나라에 합당한 영화로운 아들들로 지어져 가실 것임을 말씀하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성령으로 다시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전 인생을 간섭하시며, 당신의 의로운 ‘신부’에 합당한 자로, 아버지의 거룩한 ‘아들’로 새롭게 창조하여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고 계신다. 그렇게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분의 다스림에 순종하여 그와 하나로 연합되어 사는 자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며, 그렇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배우고 살아내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고백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자신의 뜻과 꿈을 이루기 위해 전전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해서는 기각되고 죽어지며, 오직 아버지께서 뜻하신 계획과 목적이 우리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순종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그 삶은 예수님이 몸소 겪어낸 삶과 같이 가시밭길이며, 십자가로 향하는 죽음의 길로 온갖 고초를 다 겪어 내야 하는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라고 ‘날마다’ 지게 되는 십자가의 길을 우리에게 확실히 제시하여 주셨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야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세상 모든 죄를 아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분은 공의의 속성을 가지신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를 덮어두시면 그분의 공의의 속성을 위반하게 되며, 또한 죄를 용납할 수도, 죄인과 함께 공존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따라 죄는 반드시 심판으로 멸하셔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멸하시는 가장 공의로운 심판을 아들에게 내리셨다. 즉 우리의 모든 죄를 아들에게 전가시키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멸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 없으신 아들 한 분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죄인으로 심판하심으로 가장 합리적인 공의로 죄를 멸하시고, 우리를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로 잉태시켜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자녀로 탄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의 ‘주’가 되심은, 창세전부터 정하신 아버지의 뜻이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아 그분의 영광에 찬미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옙 1:4-7). 얼마나 정확한 진리의 말씀인가! 그래서 바울은 서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해 ‘주인’의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종’의 삶을 살아 내셨다. 이 세상에서 ‘종’으로 살아낸 그분의 삶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죄인을 섬기는 종의 형태로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죄인들로부터 채찍에 맞고, 춤 배트 팀으로 조롱 당하고, 옷까지 벗겨버리는 수치를 당하는 그런 수모와 고난과 핍박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세상 불의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지도 아니하셨고,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어 이름을 높이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아니하시고,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도살장에 끌러 가는 양으로 자신을 완전히 세상과 죄인들에게 내놓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그 초라한 종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향한 그분의 철저한 종의 삶이 이 세상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이 세상의 심판자로 만물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 22-23) 함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로 오신 ‘주’ 이시며,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셔서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영화롭게 하여주신 ‘주’ 이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참으로 인간의 상상으로 형용할 수가 없는 은혜로운 구원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자신을 완전히 죄인에게 내어 주시는 오직 그분 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십자가이며 능력의 구원이시다.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살아도 그분의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10).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하는 ‘주’는 모든 이름에 뛰어난 구원자이시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제사장이시며, 만물을 심판하시는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자녀 관계로 회복시키시고, 죄 없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잉태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로 삼아 주셨다. 즉 그분은 자신의 의로운 생명을 완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희생으로 “우리 주” 가 되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한 저주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모든 말씀과 인도에 순종의 삶을 드리는 ‘종’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사 43:10-11). 그분이 앞서 ‘종’의 삶을 충실히 살아 내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이 살아내신 ‘종’의 삶을 본받아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창세전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 29-30). 이와 같이 ‘미리 정하신’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셔서 부르셨기에 그분은 결코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아들이 이 땅에서 살아낸 십자가의 삶으로 우리를 가장 의롭게 영화롭게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통지와 주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내가 철저히 부인되는 종의 자리에서 그분이 주시는 모든 일에 순종하게 된다. 종은 주인이 주시는 대로 받을 뿐, 내 의견, 내 판단, 내 의지를 세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즉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의 원함이 아니요 오직 그분의 원함이며, 내 안에서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에 합당한 일이며,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들임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분을 ‘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는 그 어떠한 일에도, 그것이 고난이든, 핍박이든, 질병이든, 가난이든, 죽음이든, 그 모든 것을 인내하며, 그 과정에서 나에게 계시되는 참된 진리를 깨달아 가며,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자이지 내가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가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신부로 잉태하셨기에 우리는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함과 같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고난과 핍박을 오히려 자랑으로 간주하였고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인 참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종’의 삶을 충실히 살아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 24-27).
이와 같이 성도는 그 어떠한 환경과 죽음의 앞에서도 ‘주’ 와 함께 하는 그 연합의 관계 자체만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천국 백성의 삶을 이 땅에서 먼저 살아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로 맺어진 성도는 그분이 부어 주시는 사랑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 세상이 주는 모든 일들을 감수할 수 있기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는 감개무량한 외침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화답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 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네 살 5:16-18).
결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영 이신 성령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아버지의 자녀로 양육을 받으며, 오직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의지하며, 믿음으로 그분과 하나로 연합되는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어 다시 하늘나라로 복귀되는 자들이다. 우리의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배우고 깨닫는 첫걸음의 시작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다. 그 선악과를 따 먹게 됨으로 인간은 비로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며, 그 죄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 즉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깨닫게 되며,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을 통하여 구원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됨으로 비로소 하나님만이 참 진리 이심을 깨닫게 된다. 즉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구하게 되며, 오직 그분으로부터 생명과 행복을 공급받게 됨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기쁨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며, 진정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내 최고의 행복으로 지향하게 된다.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몸소 배우고 깨닫고, 몸소 삶으로 체험하며, 진정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양육 받는 장소이지, 이 세상의 것들을 내 행복의 근거와 소유로 삼아 잡아 붙드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도리어 이들은 나를 멸망으로 처넣는 악한 독 임을 깨닫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잘라버리는 자기 부인과 죽어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교재용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우리는 잠시 이 땅에서 교육받고 훈련받는 시련을 겪음으로 다시는 선악과를 스스로 따 먹지 않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목적과 의도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이 역사를 주셨다.
이 역사 속에서 인간관계를 통하여 즉 부모와 자식, 친척과 친구, 가족과 국가 등 이러한 혈통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의로운 관계를 배우게 되며,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깨닫게 되며, 이웃 간의 관계를 사랑으로 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얽히고설키는 관계 속에서 죄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 죄가 얼마나 추악하며, 모든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죄의 노예이며, 결국은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옥 불에 던져진 자로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며, 이 죄와 사망에서 건져줄 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임을 적실히 깨닫게 되며, 그분이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마음으로 진심으로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그분을 나의 ‘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된다. 오직 그들만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밉사오니”라고 진실된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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