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의 진의

요한복음 [78] 주님이 주신 고백: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 ‘내 어린 양을 먹이라’의 진의 (요 21:15-25)

오직 은혜 2021. 11. 12. 04:21

요 21: 15-25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피의 대가로 지불하신 완전한 사랑을 입혀주시기 위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로 완성하신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입혀주셔서 하나가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집요하게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물으신 것이다. 사랑과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분의 사랑을 입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며, 내가 입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곧 ‘이웃 사랑’ 임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주셨으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완성하시기에 반복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고백: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다시 숯불 앞에서 완전한 패배자로 불가능한 자로 폭로당하면서 더디어 자신을 부인하게 됨으로 그 비워진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채워져서 결코 사랑할 수 있는 자로 주님이 만들어 내심으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베드로는 육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영원한 생명의 주를 거부하였다. 잠깐 사는 목숨을 움켜지고 다시 옛사람 ‘시몬’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주님은 끝까지 좇아와 당신의 한없는 아가페 사랑을 입혀주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21:17). 이 고백은 베드로의 육신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앞서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 고백이 이제 실제로 베드로의 진정한 고백이 되어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주님이 입혀주신 영원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됨으로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더디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진실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인간 측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연합되는 언약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계시하신다.

주님은 베드로의 배신을 허락하심으로 내면에 숨겨져 있었던 육적 욕망과 이기적인 사랑과,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을 완전히 드러내어 보여주므로 실패와 죄책감과 실망으로 자신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로 끌어내린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이 그를 끝까지 좇아와 품어주심을 깨닫게 됨으로 면목 없지만 주님이 입혀주시는 사랑을 입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님의 사랑이 그를 굳게 붙잡고 사랑하는 자로 끌고 가심을 깨닫게 됨으로 주님이 입혀주시는 사랑으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지만 그분의 사랑이 나를 감싸주고 나를 덮음으로 그분 안에 있어 그분을 떠나지 않고 그분을 붙들고 의지하며 나의 모든 삶을 그분에게 맡기는 순종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럼에도 당신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주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다. 베드로는 사랑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기에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됨을 깨닫게 됨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확실하게 3번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깨달음을 들으신 주님은 비로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이웃 사랑”을 베드로에게 심어주신다.

 

사랑은 인간의 의지에서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입혀지는 것이다

창세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존재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우리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에 이태까지 살아온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로 빚어지는 인생이었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형성된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었으며, 비록 나는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셨으며, 태어나기 전에 나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으며, 어머니의 사랑의 품 안에서 자라면서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시며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아가게 된다. 똑같은 원리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잉태케 하시고 끝없이 사랑을 속삭이시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낳아주신 ‘아바 아버지’임을 깨닫게 되며, 나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생명을 주셨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이다.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희생 제물로 주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지옥에서 구원하여 주신 일방적 아가페 사랑이며 그래서 은혜이다. 그분은 본체가 사랑이시기에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가 되는 연합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으며 하나님은 곧 사랑이심을 사도 요한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입혀주는 일이 곧 그분이 정하신 뜻이며 그분의 행사임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 피의 공로로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사랑과 생명력으로 영원을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함몰되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 인 치심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의 상태에서 죄밖에 한 것 없는 죄인의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여 주심으로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공로도 없이 오직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심으로 온 천하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셨음을(요 3:16)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과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희생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점도 흠도 없는 자신의 의로운 영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당신의 사랑 안에 함몰시켜 하나로 연합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시고 완전한 사랑을 입혀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켜내시고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사랑을 계명으로 주셨으며, 그 사랑의 계명은 주님이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입혀주심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반드시 전환됨을 미리 제시하여 주셨다. 즉 나 자신만을 사랑한 그 육신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그 새 생명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하나로 사는 생명이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완성되며 그것이 곧 성도의 정착 점임을 제시하여 “이웃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7-11).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에 인간에게서는 ‘사랑’이란 있을 수도 또한 나올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설상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은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구해준 덕분으로 생명은 좀 더 길게 연장되었지만, 나를 구해준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나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본체가 사랑과 생명이시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사랑은 영원을 사는 생명이다. 그분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당신의 자녀로 신부로 하나의 연합을 이루는 영원한 생명을 입혀 주시기 위해 다시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셨다.

부활의 예수, 성령이 실상이다. 이 부활의 생명 씨를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동시키고 잉태시키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신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라고 부활의 본질을 말씀하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은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취되어 우리에게 입혀진 은혜의 선물임을 제시하셨다. 우리의 옛사람 죄인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활하여 영생을 사는 자가 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5). 우리는 그분을 따라서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함과 같이, 이 세상과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자로 하나가 된 것이다(롬 6:11). 그리하여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7-11)라고 감개무량하게 외치고 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진정한 의도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

 

주님은 베드로에게 반복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신을 배신한 베드로의 실수와 허물을 오로지 한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면서 제자들을 무조건 사랑한 그 끝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기를 원하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땅 끝까지 나타내어 보여주는 사랑의 전달자가 되라는 사명이 바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의도이다. 사랑은 내 주관적 의지로 결단하고 노력하는 열심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의 인도로 내가 부인되고 내가 죽는 십자가 삶으로 나타남을 주님은 확실하게 제시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베드로의 십자가 순교가 바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사명임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즉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서 없어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으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됨을 가리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 생명의 잉태는 오직 사랑으로만이 가능하기에 먼저 베드로에게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입혀주신 것이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얻으셨기에 똑같은 원리로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내게 입혀진 주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이웃에게 전달되어 생명이 잉태됨을 제시하셨다.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며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증인의 삶을 가리킨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사명을 제자들 즉 우리에게 명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 증인의 삶은 내 의지와 열심과 노력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증인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전제가 붙어있다. 바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권능과 사역에 의해 이루어짐을 확실히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지 너희가 하는 일이 아니며, 또한 성령의 권능과 인도가 없이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제시하셨다. 증인의 삶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에서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게 됨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분은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신 것이다.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나의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음으로 내가 반드시 부인되고 죽어져야 하는, 즉 내 인생 전체가 그분에게 차압당하는 십자가의 삶으로 다른 이들이 십자가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하여 생명을 얻게 됨으로 “ 양(주님에게 속한 주님의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는 신앙으로 수렴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세워지며, 그렇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들어가 생명이 싹터 열매를 맺게 됨으로 마지막 세 번째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에서 베드로에게 십자가 순교를 제시하셨다. 즉 “내 양을 먹이고 치는”사명이 바로 십자가 자기 부인과 순교임을 마지막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죽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제시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라고 베드로의 십자가 순교를 제시하셨으며,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이미 정해 놓으신 십자가 길로 끌고 간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매일 부인되고 내 ‘자아’가 죽는 죽임을 당하게 됨으로 ‘나는 매일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게 된다’(롬 8:36)라고 성도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를 부인하는 그 십자가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게 되는 성도의 신앙 여정이며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가 죽는 그 삶으로 다른 이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게 되며, 안내자는 양이 목자를 만나면 사라져야 한다.

세례요한의 삶이 바로 “양을 먹이고 양을 치는”삶이었음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셨다. 그 삶은 정확하게 주님의 양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소리’의 역할이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뜻과 생각과 말을 보태거나 빼는 일이 없는 ‘소리’의 역할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제자들과 사도들, 믿음의 선배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목회자들과 사역자들,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즉 ‘소리’의 역할로,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바로 하나님의 편지를 전달하는 우편배달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편지 배달부는 완성된 편지를 그대로 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지, 편지의 내용을 고치거나 빼거나 보태는 편집자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진리 그대로 전할 때 택함을 받은 백성에게는 구원과 생명으로 임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은 진리를 선포하는 ‘소리’를 들으려고도 또한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를 죽여 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정죄와 심판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 일어나며, 생명과 동시에 죽음과 멸망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리’로, 편지 배달부로 보내심을 받은 성도는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배척과 멸시와 조롱과 돌에 맞는 박해와 핍박으로 순교를 당하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근거로 자신들의 멸망을 촉구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의 사명이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며, 그가 바로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소리’의 역할에 충실한 선지자였다. 세례요한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으로부터 광야로 불러내어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물세례를 주어 천국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많은 백성들이 회개하고 더디어 예수님에게로 나아가게 됨을 보고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 하였노라”라고 진심으로 기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으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사역과 신앙 여정에 대하여 한마디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바울도 똑같은 말씀을 주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음을 ”하나님의 열심으로”라고 표현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열심에 중매 역할을 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신부로 취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으며, 먼저 구원받아 신부가 된 성도는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는 중매자의 역할을 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는 의미이다.

 

신앙은 내 뜻과 내 의지와 나의 모든 생각을 다 내려놓고 오직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만을 추구하는 자기 부인과 순종이다. 그 삶을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이 먼저 살아내셨으며 그와 하나가 된 우리에게도 그 십자가 삶을 요구하신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죽어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바울은 성도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바로 자기를 비우는 자기 부인이며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십자가 죽음이며, 그 삶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됨으로 우리 성도를 대표한 베드로에게 십자가 순교를 제시하여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주님의 양은 주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기르신다

성도는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은 자, 즉 주님의 양이기에 주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돌보시고 지키신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럼에도 먼저 구원받은 성도를 통하여 당신의 예정된 양들을 부르시기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주님께 종속된 양, 성도들이다. 다만 먼저 구원받은 성도의 유익을 위해, 굳건한 믿음을 세워주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다른 이들을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신다.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함과 같다. 먼저 구원받은 성도는 다만 진리의 말씀, 십자가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의 양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말씀을 먹게 하시는 역할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절대로 어느 교회 목회자의 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주님은 성도를 “내 양”이라고 부르신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부 교회 목사들은 주님의 양을 자신의 양이라 부르며 그들의 목적은 양들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는데 있음으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양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10:10) 절도이며 강도라고 질책하셨다. 처음부터 양은 주님의 양이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먹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베드로를 목자로 세워 양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의 대표 인물이지 목자가 아니다. 우리의 목자는 단 한 분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은, 먼저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열심과 성령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 땅 끝까지 흩어져있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사역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님이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일이다.

양은 주님의 양이시기에 주님만이 자신에게 속한 양을 아심으로 친히 양들의 이름을 가각 불러내어 자신의 앞으로 나오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10:3).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이 세상 ‘우리’로부터 자신에게 속한 양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그 사람의 성품과 하나님의 때에 따라서 각각 불러주시며, 한 사람씩 교제하시며, 한 영혼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겨주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주님에게 속한 양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으며, 오직 주님만을 쫓고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수 없음을 깨닫게 되며, 그분에게 속하여 하나로 있는 것이 곧 생명임을 영으로 감지하게 된다. 주님에게 속한 양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깊으며 넓으며 측량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그분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외친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타락한 마귀의 본성으로 태어났기에 질투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며,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해치며 폭력을 휘두르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절대로 다른 이를 사랑하여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아가페 사랑이란 있을 수가 없다.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만 이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 1-2). 그분은 본체가 사랑이시며, 생명이시며, 영생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행사는 우리에게 사랑을 입혀주시는 일이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라고 명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입혀준 나의 영원한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여 그들을 나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라는 뜻이다. 내가 목자가 되어 양에게 꼴을 먹이라는 뜻이 아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가 내 양에게 꼴을 먹인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우리에게는 죄를 사하며 생명을 잉태시키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희생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영원한 생명을 입혀주셨다. 그리고 내가 입은 그 영원한 주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땅 끝까지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내라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온 천하에 전하며,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전하며, 이 세상 죄에 대하여 책망하며, 흙으로 피조된 인간은 한 줌의 흙과 같은 허무한 인생이며, 추악하고 패역한 죄인이며, 죽음에 처해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폭로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선포하여 나 같은 죄인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이다.

세례요한은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라고 자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자신의 신부를 취하는 기쁜 잔치에 신랑의 친구로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섬기고 충성 봉사하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제와 의를 행하는 행위로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연약함과 무능함과 실수와 허물을 드러내며, 나는 나의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살 가망이 없는 추악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간증하며 십자가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자신의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리스도가 드러나기에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1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함과 같이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패역한 존재임을 간증하며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랑하며 열심히 전하는 일이다. 생명의 원천이시며 사랑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이 바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이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나의 연약함과 나의 추악함과 무능함이 폭로되고 나의 약함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예수의 사랑이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지게 되며 그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지만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여 당신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십자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이 바로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이며, ‘이웃 사랑’이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는 진의는 바로 십자가 죽음이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지막으로 주님은 연약하고 불가능한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입어 사랑의 사도로 세워질것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21:18-19).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마지막 질문에서 갑자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지를 말씀하신다. 즉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는” 그 ‘이웃사랑’이 어떠한 삶으로 나타나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궁극적인 사랑을 십자가 죽음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오직 사랑으로만이 감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직접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성령의 띠를 띠워 우리가 원치 않는 십자가 죽음의 길로 이끌고 가실 것임을 제시하여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길만이 구원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영생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육신이 원치 않는 자신의 뜻을 거스른 반대의 삶으로, 하늘나라 원리의 삶으로 이끌려 가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삶은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위한 이 세상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멸망과 죽음의 결국이기에 그 길을 가지 못하게 주님께서 막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끌고 가시는데 그 삶이 바로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이라고 확실하게 제시하여 “나를 따르라”, 즉 주님을 따라 십자가 길을 걷게 됨을 제시하셨다. 그 십자가의 길은 가시밭길이며,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핍박을 받는 삶이며, 가난한 삶이며, 순교의 삶이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 성도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은닉성으로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자기 부인의 삶으로 다른 이들을 예수에게로 안내하는 밑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썩어서 없어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그 하늘나라 원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는 진의이며, 이웃사랑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십자가 순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됨을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이 제시하신 그 진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주님에게 ‘나를 그 길로 끌고 가신다면 요한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즉 요한도 순교의 길을 가는가고 묻는 말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십자가 길을 제시 하사는 것으로 요한복음이 막이 내린다. 인간은 하나님 은혜와 사랑의 덮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요한복음의 요약

 

요한복음은 처음 시작에서부터 빛과 어둠의 대조로, 즉 이 세상의 어두움과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함께 등장시키고 이 세상 어두움이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을 ‘어둠’이라 부른 것은 창세전부터 이 우주 공간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으로 생명이 없는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은 혼돈된 세상 속에서 공허에 시달리며 캄캄한 죽음에 처해 있는 땅의 존재라는 것을 요한복음 첫 서두에서 암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캄캄한 죽음의 세상에 자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보내주심으로 이 세상의 본체가 바로 죽음의 실체였음을 빛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참빗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1).

 

요한은 창세기 서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같은 맥락으로 요한복음의 서두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동일한 구조로 시작하고 있다. 태초부터, 즉 천지가 창조되기 전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선포한다. 즉 빛이 이 땅에 임하자 이 세상 어둠의 실체가 완전히 폭로됨으로 어둠을 상징하는 유대주의 즉 율법주의가 빛의 대척점에 서서 빛을 배척하고 대적하고 멸시하고 핍박하여 죽이는 데까지 가게 되지만, 실상은 빛이 어둠을 삼켜버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임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함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임하게 되는 복음을 명쾌하게 기록하고 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어둠’은 이 세상 안 믿는 자들도 포함하지만, 요한은 특별하게 유대주의, 즉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지칭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은 그 빛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어둠을 대표하는 율법주의 와 인본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을 의지하고 행위와 노력으로 업적을 쌓아서 자신들의 공로와 의로 구원에 도달하려고 하는 은혜를 거부하는 망령된 행위를 말한다. 인간이 타락한 원인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었기에 우리 안에는 내가 나를 주장하는 인본주의가 작동하고 있기에 진리의 빛을 두려워하며 대적하며 꺼버리려고 한다. 왜냐하면 빛이 어둠의 실체를 드러내어 폭로하며 부수고 삼키기 때문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 이것이 바로 역사와 이 세상의 실존이다. 참 빛이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추어 어둠을 드러내어 보여주는데 어둠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으로 나오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빛을 꺼버리는 형국으로 가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와 같이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 어둠의 실체를 완전히 폭로하시고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되는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사랑을 일관성 있게 기술하고 있다. 신앙생활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끌어당겨 도움을 청하는 나를 위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불가항력적 은혜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뜻과 야망과 꿈을 부숴버리는 내가 부인되는 십자가 삶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어둠에서 태어난 내 옛사람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하며, 빛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나야만 이 생명을 얻어 빛의 나라로 들림을 받기 때문이다. 빛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서 내 안에 탐심으로 도사리고 있는'자아'를 부수고 산산이 흩어버리는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길을 제시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곧 빛이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십자가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진하여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길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원치 않는 십자가 길로 끌고 가겠다고 주님의 견고한 의지로 베드로를 부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향한 주님의 사랑이며 은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바로 ‘사랑’이라고 성경 전체의 핵심을 요한은 “사랑”으로 선언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주셨으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임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