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39, 40-43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부르시며,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며, 아들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안식일 범한 자, 신성모독 죄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말씀으로 맞서서 당신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들이 이 땅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심을 강력하게 반박하여 이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셨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 세례요한의 증언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언이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과 구약 전체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제시하셨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았고(38절), 영생이신 아들을 거절하였으며(39), 이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었으며(42절),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은 거절하고 다른 것들은 영접하였으며(43절), 서로의 영광만을 취했으며(44절), 때문에 이들을 고소할 이가 바로 모세라고(45)라고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선언하신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들이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다(39절)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이 제시하고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생의 길은 읽어내지 못하였고, 영생의 주가 앞에 나타났음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라고 이들이 스스로 영생을 거절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모세 오경은 유대인들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 경전으로 생각하고 가장 소중한 책으로 여겨 성경암송을 신앙의 기초로 열심히 연구하고 분석하고 토론하여 왔다. 이들은 신명기 6장의 말씀 그대로 계명을 암송으로 마음에 새기며 (6:6),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6:7) 하였으며,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6:8),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여”(6:9), 지켜 행하여(신 26:17,18),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될 것이라(신 26:19) 굳게 믿고 모세 오경을 목숨을 걸고 지켜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과 뜻을 담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읽어내지 못하였다.
모세 오경은 성경의 첫 번째 책으로 배열되어 성경 전체를 이끄는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계시하는 구속사’이다. 창세기 첫 서두에서부터 그리스도가 ‘빛’으로 등장하여 ‘말씀으로’ 만물의 창조가 시작된다. 그리고 신약 요한복음에서 그 ‘빛’과 ‘말씀’이 곧 예수그리스도라고 밝히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요 1:1-4). 사도 바울도 증거하기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계셨느니라” (골 1: 15-17).
만물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 즉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실 구원의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신 것이 바로 노아 홍수의 사건이며,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유월절 어린 양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 죽음을 넘어가게 하셨다. 이는 유월절 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사 죄인을 그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요 그림자이다. 그렇게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을 홍해에서 애급의 더러운 수치를 깨끗이 씻어내는 물세례를 주신 후, 오직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광야로 인도하시고, 율법을 주심으로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심으로 모든 죄인은 오직 어린 양의 희생제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됨을 40년 광야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신 것이다 (롬 3:20 / 갈 3:24).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시겠다는 약속만을 기록한 책이다. 창제 전부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을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다. 바로 아버지 사랑의 본체인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모세오경을 열심히 상고하고 연구하며 다 지켰다고 자고한 자들이지만, 모세가 가리키고 증거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읽지도 믿지도 않았다. 만약 자신들의 말대로 모세의 글을 믿었다면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어있다. 모세 오경이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라고 이들이 실상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핑계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언들을 주셨다. 하지만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증언도, 선지자 세례요한의 증거도, 모세 율법의 증거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거절하고 배척하며, 끝까지 자신들의 고집을 내 세워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여 죽이는 살인까지 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셨기에,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나를 핍박하고 장차 나를 죽이는 데까지 끝까지 고집을 부림으로 너희들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함으로, 이들에게 핑계치 못하는 심판의 근거와 이유를 직접 제시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원인까지 밝혀주시며 이들에게 향한 심판을 선고하신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이유와 원인: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2)
율법 전체의 진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인데,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자고 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신다.
예를 들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18) 라고 물을때 예수님은 이 부자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말씀하신다. 그 청년은 율법을 모두 지켰으므로 부족함이 없다(마 19:20)고 자랑하며 율법 지킴의 공로로 영생을 확보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주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율법을 다 지켰으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마 19:21)라고 영생의 길을 제시하자 부자는 근심하며 주님을 떠남으로 스스로 영생의 주를 거절한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부자 청년을 통하여 이들의 율법 지킴의 초점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은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자기 의와 가치를 하나님보다 영생보다 더 사랑하였음을 폭로하신 것이다. 즉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너는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너 자신의 의와 가치를 더 사랑한 율법을 범한 자로 폭로하신 것이다. 즉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5: 42) 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향한 사랑과 이웃에게 향한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전환시켜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명예와 의와 영광을 갈취하는 자아 건설과 자아실현에 목숨을 건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신으로 섬긴 것임을 부자 청년을 통하여 제시하셨다. 율법을 다 지켜 부족함이 없음으로 자신을 선한 자로 자칭하는 부자에게 주님은 너는 선한 자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율법에 묶여있는 죄의 종이기에 율법의 의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고 확실히 제시하여 주어도 부자는 스스로 영생의 주 앞에 나오기를 거절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시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이다. 그리고 주님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고하는 부자에게 ‘그럼 네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라’는 치명적인 말씀을 던짐으로 그 부자의 율법 지킴이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아니며, 오로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의과 영광을 내세우는 방패였음이 여지없이 폭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열심히 지킨 자로, 부족함이 없는 월등한 민족으로,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자칭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도 더더욱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유로 만들고, 이익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섬기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반항하고, 대적하며, 율법으로 교모하게 자기 사랑과 자기 집착을 덮어 감추고 정당화시키는 회칠한 무덤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가식적으로 행하는 종교의식과 인간적인 계명들을 만들어 지킴으로 자신들의 의를 세우고 그 의로 영광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데 하나님의 법을 도용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거짓되고 외식된 악행에 대하여 저주를 선고하였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16:22).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3)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다른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여 나오는 자를 가리킨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며, 이들이 자신들의 신주마냥 영접하고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바로 율법적 행위로 얻은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운 율법을 자기들의 의와 영광을 쌓는 방패로 개조하여 자신들의 선민적 월등과 자존심을 지켜주는 신주로 영접한 것이다. 즉 구원과 영생을 제시하는 율법을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맘몬, 즉 자신들의 자존심과 의와 영광을 쟁취하는 법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율법이 가리키고 제시하고 보여주는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는 버리고, 자신들의 가치와 자존감을 세워 자기 이름을 높이는 탐욕으로 율법을 섬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라는 뜻이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한 자기 이름으로 온 ‘다른 자들’ 즉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의 총칭이지만, 문맥상 유대인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이 구절에서 이들이 받아들이고 목숨처럼 지키는 것이 바로 율법적 의이며, 이들이 지금 율법으로 예수님을 범법자로 고소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온 자가 바로 ‘율법’외에 제멋대로 정한 장로 유전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저희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 것으로 내 세운 것이다. 예를 들면 이들은 안식일에 관련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360여 가지나 만들어 놓고 율법이라고 지킨 것이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풀밭에 침을 뱉아도 그것은 물주는 것이라 안식일 범하는 것이 되고, 안식일에 손수건도 옮겨서는 안 되지만 옷에 다가 꿰매 붙이면 괜찮다는 등 성경에 없는 것들을 만들어 놓음으로 안식이 사람을 괴롭히고 묶어놓는 범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하여 (마 12:1-8)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트집을 잡고, 제자들이 식사할 때 손을 안 씻었다고 하여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였다고 정죄한 것이다 (마 15:1~9). 이와 같이 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유전과 규칙들은 철저히 지켜 자신들의 의를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마 15:3),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 라고 이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페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즉 이들이 바로 율법을 어긴 불법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해 성경에 없는 이상한 규칙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자기 이름으로 온 다른 것들’이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부른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방식으로 금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린 것이다. 금송아지는 애급에서 섬기는 다산과 풍요를 주는 신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10가지 기적들과 능력을 체험하였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을 넘어서 애급을 탈출하였으며,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너간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세상 풍요의 신을 갈망하였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른 신’ 즉 애급에서 섬기던 풍요의 금송아지로 만들어 놓음으로 금송아지가 하나님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하라고 주신 율법이 이들의 탐심과 욕구를 채우는 ‘다른 것’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까지 제단에 두 신을 모시고 제사를 드렸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얻어내지 못한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한 풍요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단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맘몬을 섬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다른 자’로 받아들이고 섬기는 모습이다. 그러하여 예수님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패역한 자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는 영접하지 아니하고, 이들의 마음에 담고 있는 ‘금송아지’와 같은 이 세상 물질과 세상 영광에 마음을 품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타산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숭배하는 번영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 신앙관을 가진 거짓된 교리와 적그리스도와 거짓된 선지자들을 잘도 영접하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은 자신보다 더 강한 능력과 힘을 가진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이 세상 물질적 복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5병 2어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하늘의 떡을 먹여주신 것은 그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며, 장차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생을 설명하는 표적이었다. 그런데 황폐한 무리들은 육신의 떡을 달라고 예수에게로 모여들 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면서 이들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온통 자신의 배만을 위한 그 사악함을 가시와 가라지 와 돌짝으로 도저히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밭이라는 형태만 가진 황폐한 땅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도 이들이 ‘다른 이름으로 온 자’를 잘도 영접함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요 10: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들은 율법을 영접하여 율법이 계시하는 진의는 버리고, 율법을 지키며 성전에서 열심히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외적 거룩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과 높임을 받아내며, 과부와 고아와 같은 약자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의로 불의로 재물을 삼키며, 이익과 명예와 힘과 돈이 되는 일에 매진하는 이상한 종교 집단 놀이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이다. 주님은 이들의 패역함에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눅 19:46)고 분노하시며 장사하는 상을 뒤엎으시고 채찍으로 장사하는 이들을 좇아낸 것이다. 이들이 바로 양을 도덕 질하고, 빼앗아가는 강도이며, 양들을 너희 탐심의 배를 채우는 상품으로 장사하고 있으니 너희가 바로 삯꾼이며 절도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 10:1-2). 양의 문은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셔서 자신의 양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이다. 이들이 바로 양을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 가치로 장사하는 삯꾼이요 절도요 강도들이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삯꾼은 바로 양을 자신들의 욕구를 챙기는 이용 가치로 써먹고 사망의 늪으로 끌고 가는 거짓 선지자들로서, 율법의 교훈을 거짓 진리로 미혹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인간의 추악함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폭로하기 위하여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 자신도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너희야말로 양을 약탈하는 절도이며 강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은혜로 들어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문을 막아놓고, 율법적 행위로 들어가려는 종교 놀이를 “영접”으로 비유하시고, 율법으로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챙기는 패역함을 ‘절도’와 ‘강도’로 비유하신 것이며,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양의 문으로 만들고, 참 양의 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극구 핍박하여 죽여 버림으로 이들이 바로 마귀이며 뱀이며 독사의 새끼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이 또한 모든 인간의 실존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을 동원하여 제사와 율법 지킴과 청빈과 도덕과 윤리로 깨끗한 자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 칭찬을 받고자 고심 분투한 자들이다. 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일곱 귀신 이야기를 (마 12:38-45) 들려주면서 너희는 자신들을 매일 소제하는 깨끗한 자로 자칭하는데 그 ‘깨끗함의 소제’는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초청하여 완전한 마귀의 소굴로 사는 자들임을 드러낸 것이다. 즉 너희들이 의롭다고 열심히 지키고 행하고 있는 그 율법적 행위가 바로 ‘너회 아비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행사이며, 너희가 바로 일곱 귀신 들린 완전한 마귀 세간이라고 폭로하신 것이다.
그렇게 귀신들린 자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해 무덤 사이로 벌거벗고 돌아다니며 쇠사슬로 묶어도 감당이 안 되는 군대 귀신 들린 광인을 등장시킨 것이다. 너희들은 비록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며 율법 지킴으로 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여 사람들의 높임과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의인의 행세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는 미친 광인과 같이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썩어빠진 무덤과 방불한 존재이며,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감당이 안 되는 목이 굳은 끈질긴 마귀임을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해 광인에게서 나온 군대 귀신을 2천 마리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물에 빠져 몰살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저주의 말씀을 던진 것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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