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의 진의

요한복음 [15]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운명적 만남 (요 4:1-30)

오직 은혜 2020. 5. 12. 09:48
요 4: 1-30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조와 복음

사도 요한은 3장에서 유대교 율법주의 대표로 니고데모를 등장시키고, 4장에서는 개로 취급받는 사마리아 땅에 부도덕적인 과부 여인을 대조적으로 기록하여 복음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설명하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모세로부터 받은 율법과 제사와 안식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를 떠나서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이가 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임하게 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2). 구원에는 혈통이나 인간의 그 어떤 조건과 자격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사하여 지는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구원의 길은 인간 측에서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길이신 예수가 찾아오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이 두 사람을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은 높고 낮은 지위와 조건과 공로와 혈통과 전혀 무관하며, 창녀로 살았던 세리로 살았던 강도로 살았던 상관없이 오직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이 입혀짐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주의 상징으로 유대인 중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가장 박식한 율법교사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유대주의 공허와 무지함을 지적하시고, 유대인들이 제일 증오하고 멸시하는 부도덕적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구원이 바로 이러한 부정한 죄인에게 값없이 선물로 임하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임하며, 그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은 하나님이 친히 찾아가 주셔서 신부로 맞이하는 복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는 3장 니고데모와 4장 사마리아 여인을 보면서 아래와 같은 사실들로 복음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차별이 없음을 읽을 수 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에게 개처럼 취급받는 멸시의 대상이다.
니고데모는 율법선생이자 바리새인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무식하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여인이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높은 지경으로 경건하고 겸손한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는
               부정한 여인이다.
니고데모는 확실하게 이름이 밝혀져 있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도 밝혀지지 않는 하층의 여인이다.
니고데모는 남자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인구 계수에도 들지 않던 여자였다.
니고데모는 자기 명예와 평판에 손실이 될 가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제일 해가 쬐는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온 부끄러운 여인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진정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고
전혀 만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셨다.

주님은 이렇게 엄청나게 대조를 가진 두 사람을 등장시킴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먼저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율법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선생’ 이었기에 자신이 어릴 때부터 쌓아온 혈통과 할레와 제사와 율법 지킴과 도덕과 윤리적 경건함으로 구원에 합당한 자로 믿어 왔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모든 율법적 행위를 부정하시고 ‘너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직선적으로 말씀하신다. 즉 ‘육에 속한 네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으로 온 나를 진정 알아볼 수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 많은 바리새인 중에서 니고데모는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였기에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고, 거듭남을 깨닫게 됨으로 거듭난 자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반대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또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는 부도덕한 삶으로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부정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을 주님이 먼저 찾아가 만나주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전혀 예상치도 아니한 상황이었기에, 왜 자기를 찾아와 주셨으며 또한 자신과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이 예수님은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생수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 이방 땅에 버려진 여인을 찾아가신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이 택한 신부는 그가 어디에 있든, 그가 무엇을 했든, 어떻게 살든, 어떤 상황과 지위에 처해있든 전혀 상관없이 직접 찾아가 주시며 당신의 품 안에 안기게 하신다. 길을 잃고 제각기 다른 길을 찾아 헤매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곳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셨다. 주님은 반드시 당신에게 속한 신부를 친히 찾아가주심을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증거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배척한 이유

원래 사마리아인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기원전 722년 북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아시리아)는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곳에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사마리아인과 결혼시키는 혼합 정책으로 이스라엘 혈통의 순수성을 잃게 하였다. 그렇게 혈통이 섞여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겼던 북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이방 땅의 우상을 섞어서 이상한 혼합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피가 섞이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도 부정한 것으로 명시가 되어 있었기에 혈통의 순수성을 목숨처럼 수호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와 돼지로 취급하고 멸시한 것이다. 반면에 남 유다는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혈통과 종교를 잘 지켜내었기에 자신들의 순수 혈통을 높이 자랑하는 민족적 자손심이 강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욱 멸시하여 왔다. 게다가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을 배제함으로 사라마리아인은 앙심을 품고 끈질기게 방해함으로 두 민족은 서로 원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갈릴리로 갈 때에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고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 땅을 밟으시면서 천한 신분을 가진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 우물가까지 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전체 민족의 죄성과 버림과 멸시를 대표하는 비천한 여인을 택하여,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고통과 설움을 잊지 않으셨으며,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결코 구원하여 주실 것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또한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마리아인들을 찾으셔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받아주심으로 그동안 오랫동안 쌓여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혈통적 유대인과 비 혈통적으로 비난을 당하는 사마리아인, 이 둘 간의 장벽과 편견을 깨뜨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신 것은 우연히 아니라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섭리였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4:5) 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가’는 야곱이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은 일백 개를 주고 산 세겜 땅으로 에발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있는 동네이다 (창 33:18-20). 그 ‘수가’라는 단어의 뜻은 ‘값을 치르고 사다’이며, ‘대속’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수가‘는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땅이었고, 그곳에는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택함을 받은 자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수가 동네에 가셨음을 계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은 차별이 없이 땅 끝까지 자기 백성에게 임하게 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섵치하신 무대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장차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이어 땅 끝까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마지막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행 1:8)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언장같이 이방 사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 첫 개시를 예수님이 몸소 실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은 진정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당하고 억압받는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짐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 그 사명을 이루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렇게 창세전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결코 당신의 신부로 만드시는 예수님의 열정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사랑과 생명이 싹트는 곳이다

구약에서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찾아와 만나는 사랑이 싹트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미 깊은 야곱의 우물가를 선택하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신 것이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얻은 곳이 바로 우물가이며(창 24:13-15), 야곱도 우물가에서 아내 라헬을 만나고(창 29:10-12),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다(출 2:15-17). 이와 같이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만나 사랑이 싹트는 성스러운 장소이며, 갈증을 해소하는 물로 생명을 이어가는 필수적인 장소이다.

구약에서 리브가를 만나는 이삭, 라헬을 만나는 야곱, 십보라를 만나는 모세, 모두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집을 떠나서 먼 길을 걸쳐서 우물가에서 신부를 찾아오고, 그렇게 먼 길을 마다하고 자신을 찾아와 주신 신랑에게 신부는 우물의 물을 대접하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함으로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유하게 됨으로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혼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신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앞에 말한 여인보다 비교할 수없이 하늘 위에서 오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영원히 한 몸으로 살게 되는 신랑을 영접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하늘나라 아버지를 떠나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혼인을 실제로 실행하신 것이다. 이는 창세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심으로”(창 2:24) 신부는 신랑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약속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심을 증거하는 뜻깊은 사건이다. 예수님은 언약대로 오셔서 야곱의 우물가까지 당신의 신부를 찾아와 주셨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심으로 성령으로 한 몸이 되는 연합을 이루셨음을 계시한다.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예수님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주님은 그렇게 창세전에 이미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을 찾아 유대인의 원수로 개로 취급받는 사마리아 땅까지 오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영혼 구원의 열정이 6절에서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다’로 표현한 것이다. 즉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한 걸음에 먼 길을 고단하게 달려가시는 그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주님이 도착한 그 같은 시간에 그 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이 뜨거운 햇빛에 홀로 물을 길러 나온 것이다. 보통 아침 일찍 혹은 날이 선선한 저녁에 물 길러 나오는데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시간에 나온 것이다. 비록 여인은 부정한 창녀처럼 여러 남자를 상대한 더러운 여인으로 정죄 받고 있었지만, 그가 바로 주님이 이방 땅 사마리아까지 오셔서 꼭 만나셔야 하는 주인공이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오셨기에 대화가 물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물을 달라고 여인에게 요청한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심으로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에 몹시 당황스러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4:9) 라고 반문한다. 여인이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4:9) 설명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와 같이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리라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4: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다만 자신들과 어울릴 수 없는 반갑지 않는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먼저 자신을 여인에게 나타내어 주신다. 주님은 여인에게 물과 ‘생수’를 구별하여 말씀하심으로, 그 생수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신이 바로 그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줄 수 있는 메시아 이심을 암시하신다. 예수님은 이때껏 한 번도 자신의 신분을 밝힌 적이 없었지만, 유독 여인에게만 친절하게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실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도하시고, 26절에 가서는 내가 바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밝히신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세 가지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선물 (구원의 은혜), 그 선물을 주시는 분(예수 그리스도), 그 선물이 바로 영원한 생수(성령)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여인은 물을 좀 달라고 하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4:11) 라고 투명스럽게 반박한 것이다. 여인은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생수’를 육적 갈증을 푸는 ‘물’로 오해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정오에 뜨거운 태양에서 물을 긷는 그 고단한 인생에서 벗어나는 해결 방책이 바로 다른 우물을 찾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지역에는 다른 물을 얻을 수 있는 우물이 없었기에 그나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파서 우리에게 물려줘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당신이 다른 물을 줄 수 있다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한 사람입니까? (4:11)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직선적으로 내가 너에게 줄 물은 야곱의 우물에서 깃는 물이 아니라, 영생의 물이다고 (4:14) 말씀하여 주신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는 지금 너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다른 우물을 원하지만, 오직 내가 주는 생수를 마셔야만이 너의 힘들고 고달프고 부정한 삶에서 벗어나 새사람으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즉 영생을 살게 되는 그 영적 생수, 즉 성령을 주실 것이며, 내가 바로 그 생수를 너에게 주기 위해 너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비록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그냥 유대인이 아님을 직감하고 이내 ‘당신’이라고 부르던 호칭을 “주” 라고 부르면서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이 우물로 살고 있는데 당신이 진짜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 라고 여인은 자신이 믿는 조상 야곱을 언급하면서 진짜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야곱보다 더 큰 선지자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다윗 왕국을 소망하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인들은 야곱을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인은 예수님에게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고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이 현재 믿는 그 수준에서 자신이 야곱보다 크신 분이심을 암시하기 위해 “야곱이 준 이 우물의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4:14)고 자신이 바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나타내신다. 즉 네가 구하여야 할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내가 바로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제시한다. 그러자 여인은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5)라고 잘 이해는 못 했지만, 여인은 예수님이 그 영원한 샘물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그 영원한 생수를 구한 것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4: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4: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4: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한 상징적 우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님은 그에게 야곱의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른 육신의 물이지만, 내가 너에게 주는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을 주는 샘물, 즉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실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목마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여인에게 주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그 목마름의 정체를 밝히는 물과 전혀 상관없는 대화로 갑자기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하신이다. 여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기위해, 즉 여인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알게하는 자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상처를 끄집어내어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4:18)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여인의 들키고 싶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부도덕한 죄를 끄집어 내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그 여인의 과거 어둠을 청산하고 그 어둠에서 빛이신 예수님에게로 나와 구원과 영생을 얻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 라고 고백하게 된다.

여인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한 것이다. 자신을 찾아와 주셔서 대화를 하시는 분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려는 선한 분이시며, 그 선물이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적 샘물을 가리키며, 그 샘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자신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아시는 능력을 가지신 선지자로 인식하게 된다. 여인은 예수님을 ‘당신’ 으로 부르기 시작하여 ‘주’ 라고 부르고, ‘선지자’라고 인정하고, 더디어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자리까지 오게 된다. 여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세 오경 지식으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가다리고 있었던 그 마지막 나타나실 ‘선지자’를 예수님과 일치시키고 기쁨이 충만하여 더디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거 한 것이다.

여인의 삶이 곧 사마리아 전체 민족의 삶이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섯 남편과 현재 동거 중인 남자를 거론하신 , 여인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용서와 구원과 영생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방탕하게 고달프게 삶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섯째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는 또한 “6일 천지창조”가 완성이 이루어짐으로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게 되는 복음이 사마리아 땅에 임하게 됨을 상징하기도 한다.

먼저 주님은 여인의 음란한 죄를 통하여, 이 세상 쾌락과 온갖 방업으로 마음의 허무함을 채우려는 끝없는 욕망에 목말라하는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의 목마름을 세상 힘을 상징하는 여러 명의 남자들을 통해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그 공허함과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바로 그 여인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지적하신 것이다. 즉 ‘너의 목마름은 남편들을 5명 갈아껴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 여인에게 이제 진짜 그의 해갈을 채워주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참 남편이 나타나신 것이다. 다시는 그녀를 버리지도 않고 실망시키지도 않는 영원히 함께 사는 참 남편이 찾아오신 것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자신을 대표한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끌어들이는 시도로 그것이 이방 신이 든, 재물이든, 명예이든, 종교행위든 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몽땅 동원하여 자신의 탐심을 채우는 패역한 자들이다. 그렇게 세상과 간음하는 부정한 우리에게 그분이 신랑으로 오셔서 우리를 신부로 맞아주신 것이다. 마치 창녀 고멜에게 호세아가 찾아가 청혼을 했던 것처럼 그러한 일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벌어진 것이다. 성경은 똑같은 이야기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만을 말씀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 여인의 삶을 통하여 사마리아 민족의 삶 전체가 바로 여러 남편과 간음하여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고독 속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남편의 대화가 사마리아인의 신앙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인은 지금 사마리아 전체를 대표하여 등장하고 있기에 사마리아 역사와 신앙을 상징하는 야곱의 우물이 등장하고 예배 장소가 등장한 것이다. 이방인과 뒤섞여 사는 그들의 상태가 바로 여러 남편을 바꾸어 가면서 사는, 즉 수많은 이방의 우상들에게 매달려 살아온 부정함과 여전히 온전한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음란에 빠져있는 부패함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하나님이 긍휼은 바로 그렇게 이방인의 속박과 억압으로 노예 같은 삶을 사는 그들에게, 동족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개로 취급받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면 그러한 속박과 멸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복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말은, 다섯 나라, 다섯 종교가 사마리아를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관하여서는 왕열기 하 17:29-34 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17: 29-31). 사마리아인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신상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산당들에 두어 이들 이방인들의 신을 남편처럼 섬겨왔다는 것이다. 남편은 종교 혹은 신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패역한 종교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의 부패한 신앙을 대표하여 다섯 남편과 이혼한 부도덕한 사마리아 과부가 등장한 것이고, 현재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그들이 현재까지도 다른 신들을 남편으로 찾고 있는 완전 패역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말하기를, “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왕하17:34)라고 지적함으로 이들의 패역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수한 신앙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우상숭배의 패역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임을 먼저 폭로하신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패역한 사마리아 전체가 심판을 받아 마땅함에도, 사마리아 땅에 여인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며, 구원은 바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임하게 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면, 호세아에서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용납이 안 되는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죄인에게 향한 당신의 긍휼한 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렇게 패역한 불가능한 도저히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임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굳이 음란한 창녀 고멜을 밑바닥까지 더는 내려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부패하게 버려진 고깃덩어리로 표현하시고, 그럼에도 호세아를 세워 하나님 당신 자신으로 표현하여 끝까지 죽은 고기처럼 버려진 창녀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아주시게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향한 긍휼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히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0). 이는 하나님의 긍휼히 고멜에게 부어지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창녀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십자가 구원을 제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이와 같이 부패한 도저히 구원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임하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과 피를 섞어 살면서 많은 우상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방 신들을 남편으로 섬겨왔고, 때문에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개 취급을 받음으로 많은 억압과 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죄악들을 용서하시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고통받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의 순수성을 잃은 그들에게 참된 신앙이 무엇이며,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내가 바로 네가 찾는 메시아 그리스도이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과거를 지적함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게 되었고, 정직하게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 속에는 내가 아무리 많은 남편을 갈아끼워도 나를 지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은 찾지 못하였다는 외로움과 목마름을 호소하는 고백이 들어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의 말이 옳도다 그들이 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참 남편이 아니다’라고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꺼냄으로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그 여인의 진정한 남편으로 오셨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여인은 부정한 행실로 여러 명의 남자와 이혼과 혼인을 반복하는 매우 망가진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부도덕성을 비난했고 그녀와 상종하지 않았다. 이 여인의 삶이 바로 이방인들의 속박과 동족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마리아인의 고달픔과 상처, 고립과 암울함을 겪고 있는 삶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절망과 고통의 현실 속에 찾아와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이 세상 죄에서 구원하셔서 자유를 주실 것이며, 이제부터는 신령한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됨을 알려주시기 위해 여인에게 예배의 핵심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제부터의 예배는 예루살렘이나 시금산과 같은 성전 장소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라고 알려 주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제는 영으로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는 말씀이다. 구약적 성전 제사의 종말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신약적 예배를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제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서 제사드림을 멈추고 천국이 임하는 광야로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는 구원을 선물로 받으라고 외쳤다. 왜냐하면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보내주셨기에 더는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모든 제사와 율법 지킴은 끝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새 시대를 여는 예수그리스도가 직접 오셨기에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직접 여인에게 “내가 바로 그이다”. 즉 그 말씀은 내가 바로 희생 제물로 온 하나니의 어린 양이며, 이제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약에서 예언한 모든 언약과 약속이 이루어짐으로 다시는 성전에서 제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없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는 완전히 끝났다는 선포이다 (히 924-28). 그리하여 예수님은 여인에게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1).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24) 라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영으로 받으시는 예배는 건물이 아니며 형식과 의식과 전통과 같은 외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물동이를 던져 버리다

사마리아 여인은 더디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눈과 귀가 열림으로 그 마음에 생수의 강이 넘칠 뜻 기쁨이 충만하여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증언한 하였고(4:28-29), 사마리아인들이 나와서 영접하였고,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이틀을 그곳에 머무르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과거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25절에서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여인은 그동안 알고 싶었던 궁금했던 모든 것이 이제야 다 알게 됨으로 갈증이 채워진 자신의 체험을 의미한다. 더디어 성령의 생수를 마신 여인은 물동이를 던져 버리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이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 한 것이다. 물동이를 내던졌다는 것은 여인의 갈증이 해결됨으로 더 이상 물동이에 의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물동이를 내던짐으로 그동안 부끄럽게 고독하게 산 과거를 청산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생수를 마신자로 , 즉 성령의 거듭남으로 내면의 생수가 넘침으로 더는 갈증이 없음으로 물동이를 내던지고, 그토록 창피하여 숨기고 싶었던 죄에서 자유하여 스스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해 주셨다. 이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시하셨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호칭을 여인에게도 쓰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열심히 율법과 제사를 지키고 행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서는 마귀의 자식, 뱀,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을 항상 숨기시고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먼저 찾아가 주시고,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밝히시고,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생수, 성령을 주시면서 아버지를 만나는 신령한 예배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더 놀라운 일은, 동네 사마리아인들은 "와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외치는 여인의 한마디에 즉각 반응하여 예수께로 나온 것이다. 상식적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음란한 여인으로 왕따 당한 여인의 말 한마디에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좀 안 되는 일이다. 이는 이들이 이미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기를 요청하였고, 예수님은 이들과 이틀씩이나 유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여 놓으신 당신의 백성이기에 이미 메시아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밭이 되어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의 억압과 유대인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신들을 보증해 주고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유대인들보다 더 간절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유대교를 지키고 행하는 유대인들과는 선명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어떤 예배를 가리키는 것일까?

예수님은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미 그 의미를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여인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과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메시아임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예배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심으로 여인은 영의 눈을 뜨게 되었고, 성령의 거듭남을 체험하게 되었다. 바로 여인에게 일어난 내적 치유와 거듭남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체험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우선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기를 내려놓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구하는 항복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물리적인 것에 제한을 받지 않으실뿐더러 물리적인 것으로 만족을 얻으시는 분도 아니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진정 알고 자신을 아는 자각과 회개의 마음이 없었으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진정한 만남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제사와 율법을 자신들의 유익과 의와 영광을 갈취하는 육신의 욕망으로 대용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전과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를 예표하고 있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전과 제사법과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된 육체가 되어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도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도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위한 모형으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신 것이다. 그 제사법을 통하여 죄인은 오직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제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게 됨을 마음에 심어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성전을 일컬어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 곧 영원한 하늘나라를 상징하여 부르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을 앞서 보내셔서 희생 제물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럼에도 이들은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이지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성전에서 열심히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외적 거룩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과 높임을 받아내며, 과부와 고아와 같은 약자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의로 재물을 삼키며, 높은 자리와 이익과 명예와 힘과 돈이 되는 일에 매진하는 패역한 종교 놀이를 하고 있었다. 심지에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로 가득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분노하셨고 채찍으로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 19)라고 말씀하심으로 형식과 위선으로 자신들의 유익과 영광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성전을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파괴하여 끝내시고, 새 성전으로 부활하셔서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참 성전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됨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어느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옳은 것인가를 물었을 때, 이제는 예배하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시금산도 아니며, 신령과 진정으로 영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신령과 진정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기에 그분이 이제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영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서 영원한 성전으로 계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그분이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게 된다는 말씀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성전이 성도 안에 세워짐으로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날에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으셨기에 그분과 동행하는 삶 자체가 바로 예배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