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늘나라의 사건이며, 혈통과 율법 지킴과 도덕과 윤리적 경건함으로 얻을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이내 거듭남의 본질에 대하여 모세의 놋 뱀의 사건을 인용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신다. 즉 장대에 달린 놋 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예표한 것이며, 그 장대에 달린 나를 바라보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근거한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복음의 선포는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 편애로 믿어왔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개로 취급하였기에 하나님이 ‘세상’ 이방인들과 같은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복음의 선포는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땅 끝까지 흩어져있는 모든 족속 이방인 중에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은혜의 새 시대를 개시하는 복음의 선포이다.
사도요한은 이스라엘만이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자신들만이 율법과 제사와 안식일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민족이라는 우월성을 부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놀라운 선포를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메시아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곳에 창세전 택함을 받은 당신에게 속한 자녀들을 예수그리스도 품 안에 끌어모으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의 선포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심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다윗 왕국을 회복하기 위한 그들에게만 속한 메시아로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마 1:21) 위함이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요 17: 6-7)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그리하여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13절)고 확신을 주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시는 천국이 이 세상에 임하셨으며 또 이 세상에서 그 구원이 성취됨을 가리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세상과 인간 창조는 하늘나라의 계시와 모형이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실상, 즉 창세전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짐(마 6:10)으로 그분의 영광과 존귀와 의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원함과 인간의 뜻을 이루어주는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속에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광만이 영존하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심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신의 생명을 죄인에게 내놓는 희생이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어 보여주셨다. 십자가 구원 성취로 그분은 자신의 참 사랑을 독생자 예수의 희생으로 세상에 완벽하게 완전하게 보여주시고 나타내셨음을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의 티끌로 ‘없음’의 존재로 죽음을 정해 놓으시고, 잠시 죄 아래에 가두어 두심은 오직 ‘주 만이 영존할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 세상과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의’ 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또한 영원한 진리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하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으키시는 모든 일들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으며, 그리고 십자가 구원이 이 세상에서 성취되었기에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이라는 엄청난 하늘의 묵시를 이 세상이 담고 있기 때문이며,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주시기로 하신 당신의 백성이 이 세상 속에 숨겨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당신의 만백성에게 알리는 복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전 우주 원시상태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으로 정해 놓으시고 이를 통하여 하늘나라를 계시하고 설명하고 소유하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빛’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혼돈’을 주셨고, ‘은혜’의 충만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공허’를 주셨으며, ‘생명’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흑암’이라는 죽음을 있게 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을 창조하시자 곧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총칭인 ‘선악과나무’를 던져 주심으로 그 ‘선악과’를 통하여 죄와 죽음을 알게 하셨으며, 진정 구원과 생명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게 됨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인간은 죄라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사랑을 깨닫게 되며,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구원과 영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의와 선을 나타내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게 됨으로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 이 세상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소유하도록 몽학선생으로 주신 것이며, 즉 예수그리스도를 내용으로 담아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사도요한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영적 계시로 표현하신 것이다. 우리의 본향은 태초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 영원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시는 하늘나라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이 가시적인 세상 속에 감추어서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창세전부터 감추어졌듯 비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사신 것이다 (롬 16: 25-27). 보이는 이 세상을 통하여 감추어진 하늘나라의 진리, 생명의 보화를 보고 믿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창세전 하나님이 편애하시는 당신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모형으로 잠시 주신 허상인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며, 더더욱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 대상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은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전 아버지께서 택하여 놓으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오직 당신의 백성만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입혀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들이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7). 오직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완전히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걸작이다. 다윗은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그분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시 104: 30-31). 우리의 기쁨과 생명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인식이다. 그분이 먼저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엡 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 들이다. 즉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속의 목적과 대상으로 지우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은혜를 입혀주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영광의 성취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 12:28 / 17:1).
‘영광’은 그분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인격과 성품이다. 그분은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용서와 사랑이시며, 생명과 진리이신 만유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 드림으로 믿어드림으로 영광스러워지는 분이 아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영광은 바로 십자가 구원 성취로 우리에게 생명을 입혀주어 당신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 하나로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일이다(골 1:27). 우리는 다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뜻을 이루시는데 동참하는 것뿐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과 의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으며, 십자가 구원 성취로 완전하게 세상에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입혀짐으로 영광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과 생명을 주신 목적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신바 되어 생명으로 낳은 아들들을 통하여 만민이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함이다(골 1:27).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 내신 그 원대한 뜻과 구원과 생명에 대하여 사도요한은 한마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이 복된 소식을 이 세상에 선포하신 것이다.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시는 그 사랑이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 6-8). 사도 요한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구원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인지 알고 깨달으라고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 9~1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아무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노력도 없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임하는 선물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하나로 죄인의 희생제물이 되어 피 값으로 우리를 이 세상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속량하셨다 (갈 3:13). 즉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독생자 예수에게 전가 시키시고, 그를 저주와 죽음의 사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죄를 범한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하였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 22-23) 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정함으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함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우리가 바로 그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죄 없고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천하에 나타내어 그분에게는 영광이 되고, 만백성에게는 더디어 구원이 성취되는 사랑의 기적이다.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즉 죄에 대한 심판을 독생자 예수에게 내리시는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확증하셨다.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 그분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사망에서 살리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는 영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완벽하게 나타내시기 위해, 처음부터 인간을 ‘없음’의 흙으로 만드시고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이 바로 먼지로 없어지는 연약하고 비천하며 무익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해 지거나 보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도 능력도 주지 않으셨다. 즉 인간의 결국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흙을 입은 육체는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없음’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육은 무익하다 (요 6:63).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으로 귀한 존재가 된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 자신의 생기를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천한 흙으로 지음을 받은 내가 살아있는 것도, 죄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도, 모두가 그분이 나에게 무상으로 입혀주시는 은혜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사랑과 영의 영원한 실상을 나타내시기 위해 처음부터 가장 비천한 흙을 택하셔서 육체를 나약하게 만드시고, 상대적으로 육적 ‘자아’를 추구하는 본능으로 타락과 죽음이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셨다: 욕심, 탐욕, 정욕, 시기, 질투, 분쟁, 거짓, 폭력, 살인 등과 같은 악한 죄의 본능에서 벗어 날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실체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육의 본능으로 죄만을 생산해내는 패역한 자들이다.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열린 무덤과 같이 악취만 뿜어내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육신적 탐심과 욕망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3: 13-18),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7)라고 인간의 실체를 정확하게 폭로하신 것이다.
인간은 오직 육신의 ‘자아’를 위해 마귀의 본능으로 자신의 욕망, 야심, 목적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마저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패역함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셨다. 죄인으로 타고난 본능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일 뿐 무슨 의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인간이 선이라고 행하는 그 선에는 이미 죄가 섞여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회개한다 하여 죄를 씻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 흠이 없다고 자고 할 수 있겠는가? 선행을 하였다 하여 하나님 앞에 선한 자라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의롭게 산다고 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그러므로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아버지의 의로운 속성과 십자가 사랑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은 우리 육의 이 모습 이대로, 죄 투승이 된 모습, 문둥병 환자처럼 썩어져 있는 모습, 만물 중의 찌꺼기 같은 더러운 모습, 창녀와 세리의 모습,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으셔서 당신의 의로운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적 사랑은 바로 본능적으로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십자가의 희생과 능력으로 의롭게 하여주신데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하기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 5). 이보다 더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경건치 않는 자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사랑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기적적인 사랑과 은혜는 경건한 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죄인에게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
구원의 은혜는 오직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거저 받아주시는 죄 사함과 거저 입혀주시는 생명이다. 구원은 죄인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랑의 기적으로 베푸시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이시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은혜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이라”(갈 1:1)고 말씀하고 있다. 즉 구원은 나의 노력과 의지, 패역한 죄인의 모습과 상관없이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이끌어 주심에 호응하는 믿음을 주셔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형벌과 지옥에서 건져 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고 증거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그분이 부어주시는 영원한 복을 입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목숨을 다하여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된 행위와 노력으로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도 더더욱 그분을 사랑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한 의가 나타나서 구원의 의를 이루심으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의 공로로 의롭게 된 자들이다. 그 은혜를 아는 자는 그분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자이기에 스스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자로 이끄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9). 오직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을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그 고귀한 사랑이 하나님에게 향한 믿음과 사랑을 격발하게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신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첫 서두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그를 알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다고 이 세상을 ‘어둠’으로 총칭하고, 이 세상 땅에 속한 육신은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도 인식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 12-13)라는 결론으로, 이 세상 중에 그 빛을 알아보고 영접하고 믿는 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택함을 받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복음의 진의를 제시한 것이다. 때문에 요한이 말씀하시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는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했든, 악하게 살았던 선하게 살았던, 창녀로 살았던 세리로 살았던 강도로 살았던, 전혀 상관없이 믿기로 작정된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기에” 저마다 하나님을 믿게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를 믿는 자”는 창세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아 아버지께로서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들만을 찾아가 주셔서 그분을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임을 알아보게 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영접하게 하시며, 그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그분 안에 하나로 함몰되는 연합을 이루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 (요. 15:16),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 라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 중에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구원하려 오셨다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마 1:21)이다. 즉 이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 속한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며,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뜻이기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셨음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은, 곧 이 세상 속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자기 백성이 있었으며 그들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9). 때문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게 되어있으며,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 1:12-13)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마 11:27),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옙 1:4) 성도들이며, 오직 이들에게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함이라"라는 복음을 제시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마 1:21) 때문에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 48). 때문에 “믿는 자마다” 이 구절은, 인간중심을 주장하는 인본주의 해석과 같이, 예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전 인류를 위해 오셨으며, 자신을 믿어주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보편적 속죄와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첫 서두에서 먼저 빛에 속한 하나님께로 난자와 이 세상 어둠에 속한 육에 속한 자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분명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에 들어갈 오른편 양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질 왼편 염소는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고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오른편 양으로 불리는 성도를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4)라고 창세로부터 성도를 위해 예비된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왼편 염소를 향하여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2)라고 확실히 분리하셨다. 이미 하늘의 묵시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완성된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 십자가 최후 순간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로 분리가 됨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묘사한 대로 연약하고 흠모할 풍채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러한 삶을 살아 내셨다.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로마 군들로부터 매 맞음과 춤 뱉음과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고, 실호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셨다. 그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엄도 풍채도 능력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 능력 없이 도살당하는 양의 모습을 본 십자가 왼편에 달린 강도는 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믿는다는 열성파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욕하였고,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벌거벗은 연약한 모습으로,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조롱과 수치와 비방 거리로 취급받는 그 나약한 예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하는 우리 죄인을 대표하는 오른편 강도가 있었다. 오직 오른편 강도만 무력하게 보이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로 보여진 것이고, 그 벌거벗은 ‘없음’으로 보이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일어나는 구원의 능력과 기적이다. 그들에게만 예수가 지신 저주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로 생명의 십자가로 알아보는 눈과 믿음을 주신다는 증거이다.
반면 왼편에 매달린 강도와 십자가 밑에 둘러선 무리들에게는 그 구원의 십자가가 무능한 십자가로 보였고,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나약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수치스러운 조롱거리로 보였던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백마를 탄 왕자로 이 세상 힘의 권세자로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성취하여 주는 인간들이 소원하는 강력한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로 내려오셔서 세상과 대치되는 삶을 살아 내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권세자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희생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렇게 보잘것없이 연약해 보이는 예수가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설을 퍼 부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요 19:6)라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오른편 강도나 왼편 강도나 똑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여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오른편 강도만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의탁했고, 그 애통함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라고 놀라운 구원을 입혀주신 것이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갈라내어 분리시키는 능력으로 선포되고 성취된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께로 난 자들이니라”라고 오직 택함을 받아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라고 확고부동하게 선언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아직 후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 과 이 세상 땅에 속한 ‘마귀의 후손’을 철저히 분리시키시고, 이제부터의 역사는 이 두 부류로 구별되며,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만 ‘없음’의 티끌에서 ‘있음’의 아들로 당신의 나라로 끌어올리심을 보여주시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포대로, 하와에게서 첫 후손이 태어나는데 바로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 아벨과 이 세상 땅에 속한 마귀의 후손 가인이다. 하와는 첫 아들 가인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의 뜻은 ‘소유, 회득, 있음’이다. 하와는 가인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은 아들로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자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의지와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가인을 사단의 후손으로 정하셨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신다.
여자의 후손으로 택함을 받은 ‘아벨’은 이름 그대로 ‘없음’ ‘아무것도 아닌 자’로 태어났다. 하나님의 은총은 ‘없음’으로 내려온 아벨에게 입혀지고, 그가 바로 여자의 후손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첫 후손의 탄생으로부터 인간의 생각과 원함을 배제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의 독립적인 주권으로 이끌고 가시며, ‘아무것도 아닌 자’, ‘없음’에 은혜를 부어주심을 확실히 밝혀주신 것이다. 즉 아벨은 하나님이 정하여진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께 받쳐진 제물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여 태어났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첫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 노력과 열심에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첫 후손 아벨과 가인의 탄생과 제사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더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잘 못 인식하고 믿음을 나의 소유로 내가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주관적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침을 받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이 말씀한 “저를 믿는 자마다” 이 구절을 온 인류에 해당되는 보편적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주관적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 진리를 왜곡하는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생명을 잉태하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믿음의 출발점은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반대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라는 존재가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의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없음’의 존재라는 실체를 투명하게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려가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이다. 즉 나의 영적 가난함을 감지하고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만을 갈망하게 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소경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고, 여인은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임을 인정한 것이며, 세리는 자신의 죄가 너무나 악하기에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며, 창녀는 자신이 바로 세상과 간음한 더러운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며, 강도는 자신이 짓은 죄가 십자가의 처형에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한 것이다.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애통을 ‘믿음’이라고 불려주시고, 그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고 의로운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믿음은 누구의 것이며, 어떻게 선택된 백성에게 주어지고 시작되며, 점차적으로 우리의 주관적 믿음을 격발해 내는가를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스스로 거룩한 생활과 의로운 일들을 하여서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불러내심으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났다”라고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본토에서 이끌어 내시는데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아브라함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즉 믿음으로 시작하신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본래 세상 모든 우상들을 만들어 팔며 바벨론 갈대아 우르에서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삶에서 조금도 하나님과 연관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잡신들을 만들어 팔아먹는 우상 숭배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지고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당신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밀어내심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주권으로 떠밀려 떠돌이 하는 나그네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안락하게 사는 아브라함에게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라는 모든 인간과 사회관계를 끊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코너에 몰아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떠돌이 삶이 시작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오직 먹고사는 일로 벅찬 인생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복된 환경을 마련해 주신 것도 아니고,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는 일로 고민과 부담을 주는 일도 없었다. 다만 세상 사람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떠돌이 삶에서 하나하나의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싹트고 자란 것이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시련도 겪고 고생도 하며, 그 험난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고,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으로 신뢰하게 됨으로 자신에게 아들을 받치라는 그분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믿음의 절정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 지극히 평범한 생활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신도 알 수 없는 인류 구원 역사의 기초를 닦아 가시며 믿음의 아버지로 세워주신 것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고 빚어진 믿음의 작품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정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뜻대로 자신의 각본에 따라 우리를 주관하신다.
믿음은 행하는 주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다. 절대로 나의 주관이나 나의 소유가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 8-9).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을 필사적으로 구하는 애통이다. 믿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긍정의 힘으로 능력과 힘을 발휘하는 의지적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우선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그 가난한 심령의 애통이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용서를 받음으로 구원에 이르기에 믿음을 구원에 이르는 선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출발점이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과 나의 행함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의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으며,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열심히 구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외친 “나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빌 4:13) 라는 말씀은, 감옥에 갇혀 온갖 고난과 매 맞음과 수모와 절망에 달하는 그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굳게 붙드시고 계시는 그 강한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환난을 이기게 해 주시는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며, 자신은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자신이 쓴 편지가 살아서 복음을 전파하는 말씀의 능력을 “능치 못할 일”로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2). 이 말씀의 진의는 태어날 때부터 탐심과 욕심으로 이 세상 것들을 나의 존재가치로 쌓아놓은 그 ‘자아’라는 견고한 반석 같은 산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바다에 던져지는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육신에서 결발되어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은, 내 육신을 위한 주관적 믿음이기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오로지 육신이 원하는 일을 도모하고 구하게 된다. 고통 없이 물질이 풍부한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내 필요를 채워주는 나의 각본에 따라 움직여주는 세상맘몬과 같은 하나님을 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질병과 고통, 가난과 고생이 없는, 사업이 번창하고 육신이 건강하며 가정이 편안하는 이 세상 복을 구하는 육신의 원함을 구하는 차원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또한 선택권이 인간에게 있어 누구든지, 저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여보내 주시는 내 이기적인 억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내가 믿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미리 준비하거나 걱정하거나 책임을 지거나 행위의 노력으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 부담이 없이 그분이 내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선한 일이며 그분의 열심으로 값없이 입하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 구원의 진리를 아는 자는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이와 같이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루어주신 구원을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 말씀한 그 ‘행함’은 바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믿음에 의해 이끌려가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라는 ‘자아’가 해체되고 기각되고 깨짐으로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셔 나의 삶 전체를 장악하심에 온전히 맡기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 전체를 성도의 ‘행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나의 주도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고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등에 업게 하시며, 그분이 내 삶의 주도권이 되어 나의 삶을 간섭하시고 강권적으로 그분의 뜻에 따르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반드시 이끌어 내신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전 15:10)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려가는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성도의 삶 전체를 행함의 믿음으로 의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믿음이기에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전 정하신 뜻과 섭리로 당신의 백성에게만 당신을 알아보고 믿는 믿음을 주신다. 때문에 ‘저를 믿는 자마다’의 진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믿음과 구원이 아니며, 또한 우리 주관적 노력과 열심으로 소유되는 믿음이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 그 많은 열방과 그 많은 훌륭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자격 미달인 우상을 섬기는 아브라함 한 사람만 택하시고 믿음의 아버지로 만드셨으며, 이를 이루시기 위해 열방과 인류의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세상 온 인류 중에서 아브라함만 택하셨다. 하나님은 오직 이 세상 중에서 당신의 백성만 구원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아 홍수 사건에서 오직 당신이 택한 노아 8식구만 구원하시고 온 인류를 홍수의 심판으로 쓸어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한”(마 24:38-39)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즉 육신에 속한 자들의 결국이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에서도, 롯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제 곧 불 심판으로 타서 없어질 소돔에서 함께 떠나기를 사위들에게 권하였으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창 19:14). 아무리 구원과 생명의 진리를 들려주어도 멸망의 직전에 처해 있음에도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절대로 깨닫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들은 구원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이며, 다만 선택받은 하나님 자녀의 구원을 위해 악역으로 쓰임을 받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택에서 제외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티끌, 먼지, 물 한 방울, 진토, 거름더미 (사 17:13 / 시 113:7 / 삼상 2:8) 라고 부르시고. 예수님은 이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이리, 개, 돼지, 배설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흙의 존재에서 하나님은 일부만을 택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나머지는 그냥 소품으로 쓰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교훈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을 ‘죽은 자’ 라고 말하고, 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엡 2:1)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심으로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자신의 생명을 조건과 대가 없이 오직 사랑으로 주시는 은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은혜의 선물을 자랑으로 노력으로 행위로 받지 못하도록 믿음이라는 수용적인 방법을 주셨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9).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진의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영생의 복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과,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지옥 불에 던져질 이 세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구별하셨다는 계시적 말씀이다. 즉 이 세상 속에는 멸망하는 자와 멸망치 않는 자로 구별되어 있음을 힌트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자는 멸망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당신의 백성은 영생으로 정해져 있음을 계시하시는 말씀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창세전, 아직 빛이 임하기 전에 우주는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 2)으로 뒤섞여 있었다. 빛이 임하자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낮과 밤이 분리되며, 육지와 바다가 분리되는 틀과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즉 하늘과 땅을 분리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구별하시고, 낮과 밤을 분리하심으로,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를 구별하실 것임을 계시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아직 후손도 태어나기 전에 먼저 여자의 후속, 즉 하나님의 자녀와, 뱀의 후손, 즉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을 분리시키시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 (창3:15).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자 이 세상 ‘어둠’이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고 핍박하여 꺼버리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과 그 빛을 알아보고 영접하여 영생을 얻게 되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 간의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구원 성취의 현장에서도 십자가를 기준하여 왼편 믿지 않는 강도가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을 대표하여 영원한 형벌로 던져지는 것과, 예수를 구원자로 알아보고 자신을 맡기는 성도를 대표한 오른편 강도가 구원받는 두 길로 갈리는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과 철저히 구별되어 있다.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 중에, 창세전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며, 그들은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은혜로운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죽음의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오직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영접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7). 이 세상 중에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이기에 당연히 우리를 데리려 오신 신랑을 알아보는 믿음이 주어지며, 영접하여 영생을 얻는 은혜를 입혀주신다.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요. 15:16) 이다. 때문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멸망치 아니하며,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움도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사도바울은 확신을 주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내려짐을 선고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주님은 분명히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저희를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 12:48). ‘심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 속한 믿지 않는 ‘저들’이며, 말씀을 진리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저들’ 율법주의자들이다. 주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드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회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27-33).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기쁜 소식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천국으로 오셨음에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다(요 1:10-11)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며, 오직 당신이 택한 백성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시며,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고 믿게 하시며 당신을 진심으로 소유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또는 육적인 노력과 혈통의 관계로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라 할지라도, 예를 들면 율법의 권위자로 자고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태어나면서 평생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영을 열어주지 아니하였기에 그들은 그 율법이 담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영생을 읽어내지 못하였고, 그 율법의 계명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걸림돌이 되어 버렸고, 그들에게는 심판의 근거로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백성에게만 모든 것을 성령의 계시로 가르치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감추어진 비밀로 남겨둠으로 선택에서 제외된 자는 예수를 알지 못함으로 영원한 지옥에 던져진다. 이것이 천국의 은밀성이며, 그래서 주님은 비밀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세상 사람들에는 자신을 항상 감추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전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는 보이고 만져지고 소유하게 됨을 나타내시기 위해, 주님은 온 세상에서 오직 12 제자만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이는 영생이신 주님은 오직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만 부르시고 믿게 하신다는 증거이다. 주님이 택한 제자들은 그 어떤 자격도 조건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창세전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을 받았고, 생명이 임하였고, 영생이신 예수를 소유한 자로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화로운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패역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랑에서 출발하신 것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 4-:8).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분의 의로운 죽음이 나를 영화롭게 하셨으며, 그분의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의인의 신분으로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었으며, 그분이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로 연합되는 영생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내가 의인이 된 것은 그분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아무 대가 없이 나에게 입혀 주신 은혜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24).
그러므로 영생은 영원 전부터 선택된 백성에게만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1: 2). 그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생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선물은 주는 분의 선택이며 받은 자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다. 그분의 선택을 받은 자는 감격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너무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그분에게 향한 사랑이 격발되어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이끌려 가게 되며, 결코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 그분이 죄인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당할 수가 없이 위대하기에 은혜를 입은 자는 내 자랑이든가 ‘나’라는 존재 가치를 내 세울 수가 없게 된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죽든지 살든지 오직 내 안에서 존귀하신 예수님만 나타내기를 원하게 된다. 이 은혜를 아는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자발적으로 살아내게 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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